‘도가니 사건’은 피해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큰 불행이지만,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글은 사건 당시 광주 인화학교 재학생, 졸업생, 교사, 활동가 등의 구술 인터뷰로, 그들의 경험과 감정을 언어화하고 그 의미를 되짚기 위해 기획했다.

기억을 환기하고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구술 기록 작업이, 미약하나마 장애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쉽지 않았을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준 구술자들께 깊은 감사와 미안함을 표한다.

광주광역시장애인종합지원센터에서 기획한 이 글은《당신이 모르는 도가니 이야기》(부제 : 소설과 영화에 다 담지 못한 13인의 구술기록집)(도서출판 글을낳는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아홉 번째 구술자는 김민선 광주장애인가정상담소 소장이다. 김 씨는 1965년 광주 출생으로 장애인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도가니 사건’ 당시 피해 학생들의 심리치료 지원과 손해배상 소송 등을 위해 3년여 동안 서울까지 동행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당시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생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처음에 피해자가 인화원 전응섭 선생님께 얘기했고, 전응섭 선생님이 ‘광주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에 가서 상담받고, 아마 사건이 어마어마하니까 지역 상담소에서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서 우리 기관에 얘기한 걸로 제가 기억해요.

저는 ‘실로암사람들’에서 결혼상담소장을 하고 있었죠. 김용목 목사님께 연락이 왔어요. 이게 사회 이슈화가 되기 전에는 목사님도 피해자들을 만나는 것을 기관 내에서 오픈을 안 했죠. 2005년 6월쯤 목사님이 알게 됐을 거예요. 그러면서 다른 피해자도 있다는 얘기, 또 ‘실로암사람들’을 이용했던 청각장애인들도 있고, 부모들이 얘기도 하고, 여기저기에서 피해 얘기들이 들려 왔어요. 그래서 한 명 한 명 만났던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공론화가 되기 전에 다른 직원들은 몰랐죠.

목사님도 수어통역사 자격증이 있거든요. 상담소를 거치면 수어통역사가 대동해야 하는데 이 수어통역사가 가해자가 있는 법인 관계자에게 얘기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통역사도 신뢰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목사님한테 계속 찾아왔던 것 같아요. 수어가 가능하니까 바로 1대1로 피해자들과 대화할 수 있으니까요. 이후에도 성폭력 상담도 했지만, 구체적인 논의나 이런 것들은 목사님이 했고, 여러 지역사회 농인들과 논의 후 대책위가 꾸려지면서 저도 알게 되었어요.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제가 2009년도 6월에 여기 ‘광주장애인가정상담소’로 왔거든요. 그리고 이게 공론화가 되고 ‘도가니’ 영화가 상영된 게 2011년 9월이었죠. 그러면서 수사를 다시 하게 된 거잖아요. 그전에 대책위 활동하면서 제가 주장했던 게 피해자들 치유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근데 대책위 활동에 다들 몰두해 있느라고 피해자들을 상담하고 치유하는 이런 역할이 부족했어요.

그러면서 영화 ‘도가니’가 상영되고 재수사가 되었을 때 광주지방경찰청 이금형 청장님을 통해서 ‘조두순 사건’ 피해자 지원을 했던 이명숙 변호사님이 연결됐어요. 그리고 피해자를 치료한 선생님이 세브란스병원 신의진 선생님이세요. 이명숙 변호사님이랑 경찰청에서 만났을 때 피해자 치료가 우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니까 변호사님이 바로 신의진 교수님을 연결해 주셨어요.

피해자들 심리검사를 하는데 “하루로는 안 된다. 피해자에 따라 3박 4일이나 2박 3일 정도 입원해서 심리검사를 해야 한다.”고 해서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갈 때 이금형 청장님이 경찰 버스를 대절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많이 갈 수 없으니까 5~6명씩 세 차례 세브란스병원에서 4박 5일 입원해 있으면서 심리검사를 했죠.

2011년 피해자 심리치료할 때부터 제가 피해자들과 동행한 거죠. 그리고 경찰 조사도 같이하고요. 당시, 처음에 갔을 때 6명이었어요. 심리치료했던 친구들이 총 12명으로 기억하고 있거든요. 심리상담만 가능한 사람도 있었고, 약물과 상담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었어요.

심리검사 끝나고 한 달에 한 번씩 피해자들과 세브란스병원에 다녔던 게 국가 대상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끝날 때까지 했으니까 한 3년 했을까요.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끝나니까 광주 전남대병원으로 전원을 했죠. 신의진 교수님도 이제 광주로 가서 해도 되겠다고 해서 청소년 심리 분야의 전남대병원 여자 의사 선생님을 연결해줘서 한 2년 정도 다녔을 거예요. 이 선생님도 아주 열정적으로 치료해 주셨어요.

심리치료를 받았던 친구들은 12명이었지만 경찰 조사는 30여 명 정도였어요. 사건이 기소된 건은 12명 정도였고요. 입원 치료 당시 남자 피해자는 같은 병실을 쓸 수 없으니까 맞은편 병실을 마련해서 통역사나 동행자가 늘 지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어요. 심리검사 중 힘들면 다시 병실에 와서 쉬고 그럴 때 함께 공감하고 안아주는 역할들, 피해자들 만나면서 같이 울기도 하고요. 내 생에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피해자들의 고통뿐만 아니라 피해 내용을 들었을 때 제 안의 분노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저도 처음에 라포 형성이 되기까지 좀 많이 힘들었죠. 대부분 저희 그룹홈에서도 살았던 친구들이거든요. 2006년도인가? 아마 그룹홈이 만들어졌을 거예요. 그때 만났죠. 하지만 피해 내용을 얘기한다든지 그러지는 않았죠. 그룹홈에서 만나서 얼굴도 알고 그랬지만 피해 내용을 얘기한다는 건 심리적인 부담이 클 수 있잖아요. 그나마 그룹홈에서 이미 라포 형성이 된 친구들이어서 심리치료하는 과정에서도 도움이 좀 됐던 것 같아요.

심리치료 과정에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힘겹게 꺼내놓던 학생들을 보며 김민선 씨는 생에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셜록

피해자들이 경찰 조서에서도 얘기해야 하고, 심리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얘기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때 ‘또 얘기해야 하나.’ 이게 정말 이 친구들한테 힘들었어요. 그걸 설득하는 일이 정말 힘들었는데 “그때는 나쁜 사람 처벌하기 위해서 얘기했던 거고, 지금은 너의 이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얘기를 해야 하는 거다”라고 말했죠.

정말 힘들고, 또 피해 내용을 들었을 때 제가 이런 표현을 했어요. 30여 명의 피해 내용을 듣고 나니까 학교 선생이나 관계자들이 학생을 인격체로 본 게 아니라 그냥 운동장에 걸어가면서 밟히는 돌로 봤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지나가다가 선생님하고 마주쳐 인사를 하면 인사받는 게 그 선생님의 도리인 거잖아요. 근데 인사는 안 받고 머리를 친다든지 발로 찬다든지 이게 이 선생님들의 인사받는 태도였더라고요. 그래서 존중받아야 할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학생으로도 보지 않고 그냥 지나가다 발에 밟히는 돌 정도로 학생들을 보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담소 종사자들은 1년에 한 번씩 상담원 역량 강화 교육을 받아야 하거든요. 서울에서 입원 중일 때 교육받아야 하는 기간이 있었어요. 하루는 교육 중에 치유 프로그램을 하는데, 저도 모르게 ‘인화학교를 불 질러 버리고 싶다.’라는 문구를 메모지에다 기록해서 제출했더라고요. 강사 선생님이 깜짝 놀라서 상황을 물어보더라고요. 내 안에 분노가 쌓여 있었던 거죠. 한동안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이 분노들 때문에 정말 힘들게 살았어요. 지금도 꺼내면 또 이렇게 나타나고, 저만 그러겠어요. 대책위 활동을 했던 분들은 모두 그러겠죠.

그 후로 재조사해서 기소되지 않았던 가해자가 기소돼서 형을 받게 되고 그러면서 조금씩 그런 것들이 해결되지만 그때뿐인 거죠. 어느 순간이 되면 힘든 부분들이 또 나타나고, 또 피해자의 힘든 상황들을 만나고 계속 보잖아요.

국민들은 이미 사건이 지났고, 그러니까 잊혀 가는 거죠. 그리고 피해자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런 모습들은 트라우마로 바라보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들이 정말 힘들었어요. 우리 안에서도 그랬어요. 피해자들이 사는 그룹홈 선생님들도 이 친구들을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는 거예요. 저는 늘 “이 친구들은 트라우마로 인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면 안 된다.” 제가 지금도 얘기하는 게 그거예요.

근데 여전히 그렇게 바라보고 있고, 사회는 이 친구들이 문제해결이 다 됐으니까 잘 살아갈 걸로 생각하는데 그 피해는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요. 어느 순간 조금씩 조금씩 또 나타나기 시작해요. 그러다가 좀 평정심을 가지고 살다가 힘들어지고, 여전히 지금도 이 생활이 계속되고 있어요. 그런 것들을 지금까지 보고 사는 거죠. 그러나 보이지 않게 조금씩 평정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날이 조금씩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을 보며 위안을 받고 살고 있죠.

영화 ‘도가니'(2011)의 한 장면 ⓒ㈜삼거리픽쳐스/㈜판타지오/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도가니’ 상영 이후에 재수사가 시작되고, 2005년 당시에 기소되지 않았던 사건이 기소됐던 거죠. 근데 가해자가 1심에서 12년 선고를 받았는데 우리가 봤을 때 2심에서 재판부가 가해자의 관점에서 재판하는 분위기였어요. 가해자들에게 ‘너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서 방어해라’ 그런 식으로 재판부가 재판을 이끌어 갔어요.

그때 저희가 비상 상황이라는 걸 감지하고 지방법원 앞쪽에 있는 사거리에 주유소가 있어요. 그쪽에다가 천막을 쳤죠. 법원에서 몇 미터 정도 벗어나야지 천막을 칠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그렇지 않으면 불법이어서 천막 농성을 시작하는데, 시민사회단체에서 돌아가면서 지킴이를 했어요. 그전에 광산구청, 시청, 광천터미널 앞에서도 그렇게 다 연대했고요.

처음 ‘도가니 사건’ 재수사했을 때 광천터미널 앞에서 천막을 치고 기소가 되고 나서 1심 선고될 때까지 농성을 했죠. 2심 시작했을 때 재판부의 태도나 분위기를 보고 법원 앞에 쳤죠. 그때 시민사회단체의 연대 활동에 대해서 굉장히 힘을 얻었어요. 돌아가면서 천막 지킴이를 할 때 자기 당번 날에 주·야간 돌아가면서 했는데, 그 어느 단체도 공백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정말 그때 ‘광주시민들의 힘이 이런 거구나.’ 그런 것들을 느꼈죠. 그게 어떤 특정인을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어요. 시민사회단체의 연대가 그렇게 힘이 됐어요. 그래서 처음 2005년 시작해서 2012년에 재수사로 1심 판결이 났으니까 7~8년이라는 세월을 오랫동안 이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시민사회단체의 힘이었다는 얘기를 제가 다른 사람들한테 종종 하죠. 그러면서 이전에는 우리끼리만 뭔가 해왔다면, 장애인 당사자들도 시민사회와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당시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활동도 같이하고 있었는데 그분들이 또 연대를 해주셨어요. 그때 그 연대의 모습들을 몸소 체험하고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주가 돼서 함께 연대했죠. 시민의 연대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에요.

2012년에 ‘도가니 사건’ 2심 때 법원 근처에 천막을 쳤어요. 그때가 11월 말쯤이나 됐을 거예요. 천막을 치고 단식 농성을 시작했죠. 번갈아 가며 하루씩 단식해가면서 농성을 시작하고 삭발식을 하고요. 그러는데 재판부의 상황을 보면서 마음이 불안한 거예요.

그러니까 2005년도의 사건이 2011년도에 영화로 개봉됐죠. 11년도에 다시 이 사건을 끄집어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그리고 영화를 보고 목격자가 나타났잖아요. “내가 그 목격자다, 이 사건을 봤던 사람이다”라고 영화를 보고 나타났어요. 근데 이 친구는 성폭행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폭력을 당한 후로 힘들게 살다가 어느 건물 옥상에서 떨어졌어요. 죽으려고 그랬는데 어쨌든 살아난 친구예요.

이 친구의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서 세브란스병원에서 심리상담을 먼저 했죠. 심리상담을 토대로 해서 경찰 진술이 나왔는데 그 과정이 엄청 힘들었어요. 이 친구가 트라우마가 심하다 보니까 우울도 심하고요. 그래서 경찰관 집으로 데리고 갔는지 경찰관이 이 친구 집으로 갔는지 정확하진 않지만, 이 친구가 힘들어하니까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있었다더라고요.

그런 과정을 거쳐서 기소돼서 1심에서 12년 선고를 받았는데, 2심에서 재판부의 과정들이 불안한 거죠. 그래서 단식 릴레이 피케팅을 하자고 며칠을 했는데 제가 너무 불안하고 힘든 거예요. 집에 있기도 힘들고 천막에만 계속 있었죠.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 이게 원상태로 되돌아가 버렸을 때, 무혐의 판정이 났을 때…’ 정말 급박했어요. 그래서 제가 12일 동안 법원 정문 앞에서 단식을 시작했죠.

그해 겨울이 정말 추웠거든요. 12일이 되던 날 그다음 날인가 선고가 있었을 거예요. 12일째 되던 오후쯤이었던 것 같은데 제가 정신을 잃었어요. 제가 추위를 많이 타는데 그 자리는 하루에 한 30분 정도만 빛이 들어오고 다른 시간엔 안 들어와요. 그 응달에 앉아서 단식 농성을 했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힘들 것 같아서, 그야말로 저를 위해서 했던 거예요. 그때 피해자들이 또 하나하나 이렇게 공부방에서 오히려 저한테 응원하는 편지를 써서 보내왔더라고요. 그걸 가지고 또 힘을 얻었던 거죠. 결국 판결 전날 쓰러졌어요.

2심 때 8년으로 선고가 줄어들었죠. 어쨌든 무혐의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지요.

가장 컸던 게 영화에 나왔던 것처럼 사지를 묶어놓고 성폭행을 했던 거와 세탁기 폭력 사건이죠. 사주한 선생님이 있지만 그야말로 학생 간에 일어났던 사건이잖아요. 두 남학생을 인화원 선생님이 집으로 데리고 가서 성폭행한 사건도 있었고요. 그리고 무작정 폭력을, 그냥 폭력을 행사한 사건들이 많았어요.

부당 노동행위도 그전에는 있었어요. 그 전 선배 세대에서는 아마 얘기하실 거예요. 청소를 시킨다든지 뭐 이런 것들은 비일비재하게 있었던 거죠. 농인이니까 욕이 들리지는 않지만 지나가면서 때린 거, 표정이나 삿대질이나 발길질이나 이런 것들은 알고 있는 거죠. 그리고 화장실에 데리고 와서 추행했던 사건도 있었죠. 가해자는 선생님들이고요. 인화학교 교장 같은 경우는 기소돼서 5년형을 살았잖아요. 2심에서 2년 6월로 감형받았어요. 석방 후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행정실장은 출소 후 피해자들과 가까운 집으로 돌아갔다. 피해자들은 언제 가해자가 들이닥칠지 모를 공포 속에 매일을 살았다.  ⓒ픽사베이

행정실장은 재작년 한 6월쯤에 출소했을 거예요. 행정실장이 사는 주소지를 알게 되었는데 덜컥했죠. 그쪽 근교에 사는 피해자들이 있거든요. 그런다고 해서 피해자들한테 이 사람 여기에 산다고 얘기할 수도 없고요. 당시 그 피해자와 사건을 목격했던 피해자에게 늘 저한테 카톡이 왔어요. “이 사람 풀려나면 어떡해요. 목격자가 가해자가 석방된 것을 알고 저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 얘가 수시로 그거를 확인해왔던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도 늘 불안함으로 살고 있다는 거잖아요.

한동안 저한테 그렇게 “가해자가 나와서 끌고 가면 어떡하냐”는 질문을 계속해요. “걱정하지 말아라. 앞으로도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그렇게 하면 더 큰 벌을 받으니까 너희들한테 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런 얘기들을 계속하면서 안심시켰죠.

가해자 중에는 본인들이 안 했다고 하면 증거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기소 못하고, 또 2011년에는 공소시효 만료 때문에도 기소하지 못하고요. 2011년에 기소했던 이 사건은 감지했던 때부터 해서 7년이었죠. 그게 얼마 안 남겨두고 된 거죠. 그러니까 다른 건들은 예전의 건들, 얘네들 초등학교 때의 사건들이었기 때문에 최근의 사건만 기소됐던 거죠. 그때 당시에도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거예요. 근데 기소가 안 된 거예요.

다 인화원 생활하던 친구들이 피해자였어요. 집에서 다니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어요. 그냥 들리는 얘기도 있었지만, 부모나 당사자들이 원하지 않아서 수사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요. 일반 시민들이 알고 있는 피해 상황은 빙산의 일각이에요. 큰 사건으로 다른 건들은 그냥 묻혀버리는 상황들인 거죠.

세탁실 폭력 사건도 집행유예로 끝났어요. 그때도 정말 힘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같은 피해자잖아요. 피해자가 입을 연 그날 학교에서 알고 이 학생을 학교 관계자가 사주한 거예요. “너 얘 데리고 가서 좀 혼내주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 이 학생이 진술한 피해자를 세탁실로 데리고 가서 세탁기 돌아가는 곳에 머리를 처넣은 거죠. 그러니까 피해자가 안 했다고 번복한 거예요. 학교 관계자들은 비디오를 켜놓고 진술하게 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안 했다고 하는 거죠. 그런 것들 때문에 더 힘들었죠.

근데 학교 관계자에게 협박당해서 사주받고 이렇게 했다는 진술은 끝까지 안 했어요. 법원에서는 자기의 진술이 중요하잖아요. 안 했다고 끝까지 하거든요. 그냥 혼자 했다고 뒤집어쓴 거죠. 근데 본인이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서 너무 안타까웠어요. 이 친구가 가정적으로도 본인을 안아줄 가정이 없어요.

우리 피해자들도 마찬가지예요. 가족이 있지만, 이 친구를 돌볼 여력이 없어요. 엄마, 아빠가 장애가 있는 친구들은 인화원 생활을 하고, 비빌 언덕이 없는 이 친구들은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곳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이 친구가 혼자이다 보니까 가해자가 맛있는 거 사주고, 옷도 사주고 잘해주다 보니까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 거예요.

이 친구를 보면 너무 화도 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랬어요.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 재판이 끝나면 바로 가버리고요. 가해자 친구가 같은 학년이기는 한데 학교를 늦게 들어가서 나이는 더 많았어요. 그리고 가해자 이 친구가 굉장히 강성이더라고요. 폭력 사건의 피해자는 청각장애도 있었지만 정말 자기 주장을 얘기할 상황이 되지 못했어요.

한 2006~2007년부터 학생들이 학교 가는 걸 거부해서 ‘실로암사람들’에서 공부방을 만들었어요. 또 인화원으로 갈 수 없거나 집으로도 돌아갈 수 없는 친구들이 있어서 그룹홈을 만들기 시작했죠.

근데 대부분 시설을 만들면 1년 정도 자비로 운영을 하다가 1년이 지나면 시에서 지원한다든지 보조금이 지원되는데, 저희 그룹홈 같은 경우 청각장애인 대상으로만 여자, 남자 그룹홈 2개를 만들었어요. 그랬는데 3년 이상을 광주시에서 지원해 주지 않았어요. 그렇게 사건이 돼 가고 이런 친구들이 오갈 데가 없어서 만들었는데도 예산이 없다고 안 해줬어요. 한 3년 이상을 자부담으로 운영을 했죠. 후원금으로요. 그룹홈은 6~7명 있었어요.

공부방도 마찬가지로 이 친구들이 이용했고 집에 있는 친구 중에서도 공부방을 이용한 친구들도 있었어요. 학력 인정은 안 됐죠. 그 애들이 거기 학교가 폐쇄되면서 일반 학교의 특수학급으로 전학을 갔어요. 일반 학교 특수학급 다니고 오후가 되면 우리 공부방에 와서 공부하고 그렇게 하다가 졸업장을 받았어요.

교장이 구속되면서 학교에 새로운 교장이 부임해 왔어요. 아마 이◇◇ 교장일 거예요. 농인학교니까 선생님들이 수어로 공부를 가르쳐야 하잖아요. 근데 수어를 제대로 한 선생님들이 없어요. 얘네들이 공부를 제대로 했겠어요. 제대로 못 배웠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해도 글을 제대로 아는 친구들이 거의 없어요.

수어를 할 수 있는 선생님들을 배치해달라는 요구를 교장한테 얘기했는데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얘네들이 교장실을 쳐들어가면서 교장 선생님께 달걀하고 밀가루를 던졌는데,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을 경찰에 고소해서 애들이 다 경찰에서 진술하고 그랬거든요. 교장 선생님은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대책위에서 이 친구들이 기소되지 않도록 반성문 이런 것들을 쓰게 만들었죠. 그런 사건도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애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하겠어요? 이제 학교를 거부한 거죠. 그래서 한동안 교육청에다가 천막을 쳐놓고 학생들이 공부했어요. 윤민자 선생님이 그 역할들을 했죠. 그러다가 공부방을 만들었죠.

농인학교인데 수어를 못하면 공부를 가르칠 수가 없잖아요. 수어를 배우려고도 안 하고요. 가르치려면 전문적인 수어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전문적인 단어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하거든요. 사건 이후 그런 선생님들밖에 없다는 걸 알았죠. 성폭력 사건 전에는 수어를 모르는 선생님들이 농학교에 있다는 걸 몰랐어요.

‘카페홀더’는 인화학교 출신 농인들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 형태의 커피숍이다. ⓒ셜록

‘카페홀더’는 광주도시철도공사에 1호점(2011년 12월), 광산구청에 2호점(2013년 3월)을 오픈했어요. 처음에는 ‘실로암사람들’에서 운영하다 나중에 1호점은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했어요.

1호점은 두 번의 모금 공연으로 기금을 마련했고, 2호점은 공지영 작가와 창비 출판사의 후원이 큰 힘이 되었어요. 카페 운영은 쉽지 않았어요. 그동안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청각장애인 바리스타와 비장애인 직원이 협력하면서 이겨내고 있어요.

임은정 검사님은 2007년 사건의 공판검사였어요. 그때는 검사님에 대해서 저희가 잘 몰랐어요. 검사님도 당신이 공판검사이기 때문에 어쨌든 객관적인 입장이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희한테도 가까이 안 하셨기에 그렇게 피해자들에게 애정을 가지고 사회적인 어려운 상황들에 관심이 있었는지 몰랐죠. 영화 이후로 검사님이 청문회 때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 이후로 2007년 당시에 공판검사하면서 썼던 일기를 SNS에 올리신 거죠. 검사님이 그런 마음이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죠.

‘카페홀더’가 생기고 얼마 안 돼서 다녀간 사진을 SNS에 올린 걸 제가 보고 연락했죠. “오시면 연락을 주시지” 하니까 “조용히 다녀가고 싶었다”라고 하셨어요. 이분은 늘 오월이면 광주를 다녀가셨어요. 그 이후로 오시면 연락은 안 하지만 카페 직원들이 검사님을 아니까 저희한테 연락이 와서 저희가 가죠. 그렇게 해서 만나지 “저 가요”라고 하지 않아요. 그냥 조용히 오세요. 작년엔가는 “언제 내려오는데 혹시 시간이 되시냐”고 연락이 한 번 온 적 있어요. 오시면 식구들 밥 사주시고 직원들 밥 사주시고 가고, 코로나 이후로 오셨을 때는 같이 밥 못 먹으니까 봉투 주시고 가고 그러셨죠.

임은정 검사님이 2019년 ‘송건호언론상’을 받았어요. 송건호 선생님이 5·18 묘역에 잠들어 계시거든요. 그 이후로는 그분 묘소에 늘 와서 참배하고 가시는데 고 김경철 님에 대해서 어느 날 말씀을 드렸어요. 김경철 5·18 피해자, 청각장애인 사건 얘기를 우리를 통해서 듣고, 작년에 진짜 눈보라 쳤을 땐데, 광주에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김경철 님 묘비에 꽃바구니 놓고 참배하시고 저희 카페에 오셨더라고요. 마음 씀씀이가 그런 분이세요.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공소시효 만료 때문에 패소가 됐어요. 이명숙 변호사님이 이것도 맡으셨거든요. 처음에 소 제기한 사람들 주소지가 광주잖아요. 그래서 서울에다가 소 제기를 했는데 광주로 이관이 됐거든요. 근데 저희가 국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하게 해달라고 해서 서울에서 재판했죠. 광주로 이관했다가 서울로 다시 또 이관했어요.

이명숙 변호사가 “공소시효가 법적으로 걸리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선례를 남길 필요는 있다”라고 해서 피해자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하고 승인을 받아서 소송했죠. 그런데도 피해자들은 기대한 거잖아요. 피해자들이 법원에 출석하고 진술하는 것들이 있었는데 패소하니까 그 실망감이 또 어마어마했어요. 이미 다 설명은 했지만, 가졌던 그 기대감 때문에, 그때 좀 많이 미안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그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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