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살(代殺). ‘대신 죽이다’. 의미를 들어도 선뜻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이 끔찍한 단어가 1951년 방계숙(당시 12세)에게는 ‘현실’이었다.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지석리. 그해 1월 눈이 많이 오던 겨울밤, 방계숙의 집으로 시끌벅적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밤에 발로 대문 차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거든요. 엄마가 껌껌한 데서 불도 안 켜고 나를 깨워가지고 옷을 주워 입히더라고요. 빨리 문을 안 열어주니까 (그 사람들이) 발로 대문을 찼는데, 나무 대문 한 짝이 떨어졌더라고. 그 정도가 되니까 마지못해 호롱불을 켰어요.”
집에는 방계숙과 엄마, 그리고 어린 동생 셋이 자고 있었다. 대문을 발로 차고 들어온 사람들은 신발도 벗지 않고 방 안까지 들이닥쳤다. 모자를 쓴 세 남자. 그들은 장농이고 벽장이고 모조리 뒤지면서 물건을 방바닥에 집어던졌다. 대체 뭘 찾는 건지, 세간살이를 모두 끌어내리고 펼쳐보느라 집 안은 난장판이 됐다. 그중 하나가 엄마에게 물었다.
“당신네 몇 식구요?”
“애 보는 아이 하나 해서, 다섯 식구요.”
“애 보는 아이가 누구요?”
엄마는 손가락으로 방계숙을 가리켰다. 엄마의 직감이었을까. 바른 대로 말했다가는 모두 살아남지 못할 거라는. 과거에는 남의집살이를 하며 살림을 돕거나 아이를 봐주는 여자아이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남자의 질문이 방계숙을 향했다. 그는 방계숙을 한쪽으로 불러 물었다.
“너 여기 어떻게 왔냐?”
“우리 집이 가난해서 이 집에 아이 보러 왔어요.”
이심전심 전해진 엄마의 마음에 방계숙도 거짓말로 답했다. 남자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랬더니 (엄마에게) 아이를 업으라고 그래요. 젖먹이 막내가 아장아장 걸을라고 할 때였는데 그거 업고, 젖 떨어진 동생은 안고, 내 바로 밑 동생은 걷게 하고, 엄마가 그렇게 셋을 주섬주섬 챙겨서 나갔어요. 내가 쫓아 나가니까 바깥에 이웃 사람들이 쭉 서 있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집 뒤에 산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러고 얼마 안 있으니까 총소리가 나더라고요.”
혼자 남은 방계숙은 겁에 질려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떨고 있었다. 총소리가 사라진 지 얼마나 더 지났을까, 남자들이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네 명이었다. 한 사람은 가슴께가 시커멓게 젖어 있었다. 피가 튀었다고 투덜거리더니, 아무렇게나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들은 구둣발로 방 안까지 들어와 이불이고 뭐고 짓밟고 다니면서 또 한참을 뒤졌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방계숙에게 의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그런데 너 성씨가 뭐냐?”
이 사람들은 누굴까. 대체 뭘 찾는 걸까. 끌려나간 엄마와 동생들은 어떻게 됐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죽는다는 것.
“정가예요.”
그렇게 방계숙은 살아남았다. 그날 밤 엄마도 세 동생도 모두 죽고, 방계숙만 살아남았다.
나중에서야 그날 밤 집으로 찾아온 남자들의 정체를 알게 됐다. 1951년 1·4후퇴 이후 교동도에서 활동하던 유엔군 유격대(UN Partisan Forces). 사람들은 그들을 ‘특공대’라고 불렀다.
한국군과 미군의 통제하에 있던 교동 주둔 유엔군 유격대는 현역 군인·낙오 경찰·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등으로 구성된 치안대였다. 경기 연백군을 비롯한 38선 이북지역의 치안대로 구성된 이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군·경을 도와 좌익 혐의자 색출·검거에 앞장서다가, 1·4후퇴 당시 교동도 등으로 피난을 나와 ‘치안을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특공대를 조직했다.
특공대는 초기에 교동도로 유입되는 피난민을 조사하거나 식량보급을 목적으로 연백군 등 북한 점령지역을 드나들다가, 서해안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활동을 벌이던 한국군과 미군 정보․첩보부대의 지원으로 점차 통합·확대돼 유엔군 유격대의 지위까지 갖게 됐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의 진실을 규명했다. 유엔군 유격대 소속 ‘강화해병특공대’와 ‘해병특공대’에 의해, 내응(內應)행위자, 즉 북한군과 몰래 내통한 자라는 확인되지 않은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 학살된 사건.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는 모두 183명이다.
“아버지는 농사꾼이라 쇠스랑 메고 들에 나가는 것만 많이 봤어요. 딴 거는 몰라. 어느 날, 아침은 같이 먹었는데 저녁엔 안 보었어요. 지금 아이들 같으면 ‘아버지가 왜 안 들어오지?’ 이럴 텐데, 그때는 그냥 ‘들에서 늦도록 일하나 보다’ 이렇게만 생각했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방계숙 가족이 희생된 이유는 아버지가 피신 월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집을 찾아온 남자들은 방계숙의 아버지가 북한군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그렇게 온 집 안을 뒤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끔찍한 ‘대살(代殺)’을 자행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들이 희생된 날을 1951년 1월 13일로 추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의 희생자들은 남편 또는 아들이 북한군 점령 시 부역을 하다가 피신 월북했다는 혐의를 가진 자들의 가족이었다. 신원이 확인된 183명 중 74.3%인 136명이 아동·노인·여성이었다. 15세 이하 아동이 전체의 33.3%로 61명이었으며, 51세 이상 노인은 14.8%로 27명, 여성은 전체의 49%로 90명이었다.
아동·노인·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학살행위는 인민군과의 교전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군사작전 상의 피해가 아니다. 이는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을 살해하겠다는 인식을 갖고 비무장민간인을 대상으로 하여 의도적으로 행해진 공격행위로 ‘인도에 반한 죄(crime against humanity)’에 해당되며, (…) 전시 최소한의 인도 기준인 ‘제네바협약’ 공통 제3조나 제16조에 위반되는 ‘전쟁범죄’에 해당된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보고서> 중)
하루아침에 온 가족을 잃고 혼자 살아남은 방계숙. 열두 살 소녀는 이제 팔십 대 노인이 됐다.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이고…” 한숨이 길다. 그리고 지난 72년 동안 가슴속에 묻고 지낸 질문을 다시 꺼냈다. 그날도, 지금도, 아무도 납득시켜주지 못한 질문 하나.
“뭣 때문에 죽였는지 알고 싶어요. 도대체 무슨 죄로 어떻게 죽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