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사건’은 피해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큰 불행이지만,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글은 사건 당시 광주 인화학교 재학생, 졸업생, 교사, 활동가 등의 구술 인터뷰로, 그들의 경험과 감정을 언어화하고 그 의미를 되짚기 위해 기획했다.
기억을 환기하고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취지에서 시작된 이 구술 기록 작업이, 미약하나마 장애인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 쉽지 않았을 가슴속 이야기를 꺼내준 구술자들께 깊은 감사와 미안함을 표한다.
광주광역시장애인종합지원센터에서 기획한 이 글은《당신이 모르는 도가니 이야기》(부제 : 소설과 영화에 다 담지 못한 13인의 구술기록집)(도서출판 글을낳는집)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여덟 번째 구술자는 이명숙 당시 ‘도가니 사건’ 담당 변호사다. 이명숙 변호사는 1963년 경북 예천 출생으로 주로 여성과 아동,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 관련 사건들을 변호하는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 중 한 사람인 행정실장의 형사재판을 담당하여 ‘강간치상죄’ 유죄판결을 이끌어냈다.
2011년 9월경 영화 ‘도가니’로 우리 사회가 크게 공분하게 되어, 광주지방경찰청에서 2006년 이전에 있었던 ‘도가니 사건’을 재수사하게 되었어요. 당시 광주지방경찰청장이었던 이금형 청장님께서 “공소시효가 지나서 형사처벌이 안 될 것 같은데, 이명숙 변호사라면 공소시효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 줄 것 같다. 그러니, 바쁘더라도 광주에 내려와서 좀 도와달라.”고 연락을 주셨어요.
제가 피해자들을 지원해 주고 있던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 소속 위원들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2011년 10월 초순이었어요. 이금형 청장님의 요청으로 광주에 내려가서, 경찰 측과 대책위 분들과 함께 ‘도가니 사건’ 수사와 관련된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였죠.
그때 이금형 경찰청장님이 “이명숙 변호사님을 통해서 지원을 해주겠다.”라고 말씀을 해 주셨는데, 대책위에서는 경찰에 대한 불신이 많았어요. 2006년 한차례 형사고소를 했지만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았던지라, 경찰에 대한 불신이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못 믿겠다. 경찰청이 변호사를 연결해 준다는 것은, 또 사건을 무마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냐?”고 하면서 처음에는 대책위 쪽에서 저를 아예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회의에 참석했던 대책위원 중 한 분이 ‘서울에서 성폭력 관련한 이명숙 변호사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강의 내용을 기억해 보면 변호사님을 신뢰할 수 있다.’라고 대책위원들을 설득해서, 대책위 분들을 만날 수 있게 됐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김민선 소장님이셨던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어렵게 만나게 된 대책위 분들이 “그러면 어떤 식으로 도움을 주시려고 하느냐?”고 해서 “현재로는 고소 기간도 지나버리고 공소시효도 만료되어 버려서 형사처벌을 할 수가 없다.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 치료를 받게 하자. 피해자들이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는 게 증명되면, 지금도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인 상해가 남아 있는 것이고, 그러면 강간에서 강간치상으로 죄가 바뀌게 되어 공소시효 문제는 해결이 된다. 그렇게 해결해 보자.”라고 말씀드리면서 설득을 했어요. 제가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서울에 있는 정신과 선생님과 연결해 주겠다.”라고 제안했죠.
그래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신의진 교수님에게 “세브란스병원에서 ‘도가니 사건’의 피해자들을 무료로 상담해서 트라우마가 있는지 확인도 해 주고, 트라우마가 있다면 치료도 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더니, 감사하게도 “도와주겠다.”고 흔쾌히 응하더라고요. 그래서, 피해자들에게 아직도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지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가 보기로 했죠.
그때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피해자들이 10명이 넘었던 거 같아요. 세브란스병원에서도 굉장히 힘들었던 게, 거기는 개인 병원이 아니고 대학병원이잖아요. 우선 세브란스병원을 설득해서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이 친구들의 트라우마를 진단받기 위해서는 외래로 통원 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입원해서 상담하고 관찰해야 하는데, 그걸 세브란스 병원에서 무료로 지원해 주겠다고 해야 하는 거거든요.
게다가, 피해자들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 보니 의료진과 의사소통하는 것도 큰 문제였어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신의진 교수님과 세브란스병원 의료진들이 간단한 수어도 배우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세브란스 병원 외에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밝히는 데 큰 도움을 주신 분이 조용범 교수님이세요. 교수님은 미국 법정에서 성폭력 피해 후유증인 트라우마에 대해서 증언하는 일을 많이 하셨던 분이에요. 제가 조용범 교수님에게 부탁을 드려서, 피해자들이 조용범 교수님이 운영하는 센터에도 가서 여러 차례 집중 상담을 받게 되었죠. 나중에 조용범 교수님은 그 결과물로 아주 장문의 보고서를 1심 법원에 제출해 주셨죠. 그 보고서도 트라우마를 인정하는 재판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아동 성폭력 피해자의 트라우마가 증명되면 강간죄로 공소시효나 고소 기간이 만료된 사건도 처벌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과거에 성폭력, 강간 사건을 당했는데, 현재도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상처, 상해가 지속되고 있다는 뜻인 거잖아요.
그때 만약에 경찰이 조사했던 것처럼 강간으로만 고소했다면, 처벌이 불가능했을 거에요. 그런데 제가 신의진 교수님과 조용범 교수님에게 부탁드려서 트라우마를 밝혀내서 고소 기간이나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강간치상으로 처벌이 가능하게 되었던 거죠.
이 사건은 법적으로 민·형사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었어요. 민사상 손해배상 사건은 인화학교의 불법행위에 대한 민사상 책임을 묻는 것이었고, 형사 사건은 가해자인 행정실장을 형사 처벌하기 위한 재판이었어요. 민사상 손해배상은 소멸시효가 끝나면 피해를 구제할 방법이 없어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에서도 트라우마 주장을 해서 일부는 승소하고 일부는 사건이 발생한 지 너무 오래되어 소멸시효 완성으로 패소하게 되었죠.
형사 사건은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밝혀낸 것이 신의 한 수가 되어서, 공소시효 문제를 해결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었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법원은 성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상해로 인정해 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트라우마를 상해로 보는 거의 최초의 사건으로 남게 된 거죠.
1심에서는 재판부가 피해자들이나 대책위 분들의 의견도 많이 반영해 주면서 재판 진행을 잘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가해자인 행정실장에 대한 12년형이 기대보다 낮아서 아쉽기는 했지만, 재판 진행에 큰 불만은 없었어요.
그런데 항소심은 1심하고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어요. 첫 재판을 진행하면서부터 징역 12년을 선고한 것을 두고, “나는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겠다. 이 사건을 다시 보겠다.”라고 하셨다고 전해 들었어요.
항소심은 정말 드라마 같은 일이 많았어요. 재판부 기피신청도 했고, 재판장님이 1심에서 증언한 증인들을 법정에 불러 다시 신문하기도 했죠. 그런데 증인으로 나오는 목격자나 피해자가 이미 한차례 조사를 받았거나 증언을 했었던 지라 법원에 출석하지 않으려고 해서, 이들이 법원에 출석해서 제대로 증언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고생을 많이 해야만 했어요.
재판 진행에 너무 불만이 커진 대책위 분들은 항소심 재판 진행에 항의하며 농성을 하고, 광주고등법원 정문 앞에서 돌아가면서 1인 단식 시위를 하기도 했어요. 김용헌 광주고등법원 법원장님께서는 추운 겨울에 시위하면서 고생한다고 매일 아침 따뜻한 차를 전해주시기도 했어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일들이 너무 많이 있었어요.
그리고 제대로 증인도 있어야 하고, 증거도 확보해야 하는 건데, 증인과 증거확보를 위해서 대책위 분들이 정말 수고를 많이 해 주셨어요. 또 피해자들을 데리고 서울까지 한 달에 몇 번씩 치료받으러 다니셨고, 재판 끝나고 나서도 계속 다니셨어요. 저도 피해자들이 치료받으러 서울에 오는 날, 제가 시간이 될 때면 점심도 같이 먹고 얼굴을 보곤 했었는데, 마지막 치료를 받고 돌아가는 날은 그동안의 노고를 축하하며 파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피해자들이 “너무너무 감사하다”라고 하면서, 서로 이야기 나누고 감사 인사하고 그랬는데, 김민선 소장님이 “얘들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거 처음 봤다”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였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을 인솔하고 오셨거든요. 그리고 광주에서 교통약자이동지원센터 운전기사 중 몇 분이 연차를 내서 돌아가면서 광주에서 서울까지 왕복 운전도 해 주셨죠. 너무너무 감동적이고 감사한 분들이 정말 많아요.
이 사건은 법적으로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트라우마가 상해로 인정됐다는 게 의미가 있고요. 또 하나는 강간을 당한 피해자 진술의 일관성에 관한 판단이었어요. 피해자가 경찰 조사에서부터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안 난다.”라고 말했어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병원 기록도 잘 없고, 피해자나 목격자들도 기억이 잘 안 나고, 범죄 현장인 행정실도 없어져 버린 상태에서 피해자가 기억도 못 하고, 그러다 보니 앞뒤 말이 서로 모순되거나 다른 부분도 많았어요. 그래서 가해자 측에서는 진술이 “일관되지 않는다. 그래서 거짓말이다.”라는 논리로 대응했거든요.
항소심에서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를 증인으로 신문할 때, 제가 판사님께 “말로 표현하는 것뿐 아니라 피해자의 눈빛과 목소리 톤이나 온몸의 반응, 표정으로 나타나는 몸으로 하는 말도 꼼꼼히 잘 봐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어요. 실제로 피해자가 성폭력을 당한 상황을 말할 때,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을 비틀며 울부짖다시피 너무 고통스럽게 표현하는 거예요.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고 온몸으로 흐느끼면서요.
전문가들에 의하면, 실제로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런 표정들이나 몸의 반응이 안 나온다고 해요.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오르니까 정말 피눈물로 절규하듯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면서 견디지 못하는 거죠. 그 표정과 반응을 본 재판부라면 그 누구도 피해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볼 수는 없었을 거예요.
법원에서도 ‘부수적인 부분들은 일관성이 없이 모순되더라도 핵심적인 부분만 일관성이 있으면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는 취지의 판단을 했어요. 이 부분 또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판례여서, 이것도 이후 성폭력 관련 사건에서 많이 인용되고 있죠.
저는 항소심에서 강간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면 무죄가 될 것 같아서 긴장을 많이 했어요. 재판부는 “증인을 다시 불러 직접 증인 신문을 해서 진실을 밝히겠다.”고 할 정도였죠. 그러자 대책위에서는 강간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남학생을 증인으로 세워서 사실을 밝히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었어요.
그 남학생은 우연히 행정실장실을 지나가다가 현장을 목격하게 되어서, 그 다음 날 행정실장으로부터 “네가 본 걸 말하면 죽여버리겠다.”는 이유로 사이다병과 각목으로 처참하게 맞았던 학생이었죠. 강간 현장을 목격한 것도 충격인데, 그 일로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으려고 어느 건물에서 뛰어내렸다가 다치기도 했던 친구였어요.
졸업한 이후에 자기 핸드폰에 저장된 사람들의 숫자가 다섯 명도 안 될 정도로 인화학교에서 알던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다 지우고 아무하고도 연락을 안 하고 지내는 친구였는데, 증언을 부탁했더니, “내가 왜 또 그때 기억을 되풀이해야 하냐? 증언하는 거 싫다.”며 거절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 친구가 결정적인 증인이자 목격자잖아요. 그래서 김민선 소장님이 저보고 “법원에 증인으로 나올 수 있게 변호사님이 설득 좀 해 달라.”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들은 며칠 뒤, 이 친구가 저에게 전화를 했더라구요. 그래서 컴퓨터의 메신저로 밤 11시부터 새벽 5시경까지 밤새 이 친구와 그 사건에 대해서 대화를 했어요. 이 친구는 겨우 사물을 볼 정도로 시력이 아주 좋지 않았고 청각장애와 약간의 언어장애도 있었어요. 그래서 이 친구가 대화 나누기에 가장 편한 메신저를 이용해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이야기하게 된 거죠. 그렇게 밤새워 당시 상황에 대한 대화를 나눈 뒤, 이 친구가 마음을 열게 되었고, 결국 법정에 나와서 증언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증언해 준 그 친구와는 증언 준비를 하면서 인간적으로 친해져서 오랫동안 연락하고 지냈어요. 그 친구는 정도 많고 정의감도 강한 친구였어요. 처음 제가 광주에 내려갔을 때, 저를 마중 나와 주기도 했고요. 제가 자기를 위해서 여러 번 광주에 내려오는 게 고맙다고, 자기가 일해서 번 돈으로 가장 멋지고 비싼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면서 밥도 사 줬고, 재판하는 당일에는 드링크도 준비해 와서 저에게 마시라고 건네곤 했죠.
만날 때마다 늘 반갑고 환하게 웃던 그 친구는 재판이 끝난 뒤 저에게 제 초상화를 그려서 액자에 담아 선물로 보내주고, 겨울이면 아이폰 터치되는 장갑도 보내주고, ‘너무 일하지 말고 쉬면서 일해라’는 문자를 자주 보내 주고 했어요. 그 친구가 바리스타도 했는데요.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직도 상처가 많아요. 그래서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국내외로 훌쩍 떠나기도 하고, 많이 방황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저는 이 친구에게 너무 감사하게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 친구가 목격자로서 어렵게 마음을 열고 증언을 잘 해줬기 때문에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으니깐요.
그리고 강간당했던 피해자도 증언을 했거든요. 문제는 수어가 통역인에 따라 조금씩 뉘앙스가 다르잖아요. 그런데 법원에서 증언하는 것을 통역하는 것은 법원에서 지정한 통역인만 할 수 있는지라 혹시 통역이 서툴거나 잘못될까 봐 피해자를 위해서 계속 통역해 주셨던 김창호 통역사가 증인인 피해자 옆에 나란히 앉아서, 통역이 제대로 되는지 확인하도록 해 줬어요.
2심에서 피해자를 증인신문 할 때, “피해자에게 증인 신문할 때 어려운 말이나 추상적인 단어, 긴 문장으로 묻지 말고, YES나 NO처럼 단답식으로 묻지 말고, 오픈 방식으로 질문을 해 달라.”고 제가 재판부에 요청을 했어요. 그러자 상대방 변호사가 제대로 증인 신문을 못 하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변호사들이 “행정실에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지요?”라는 식으로 YES, NO로만 답변할 수 있도록 질문을 하지, “방 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세요” 이런 식으로 증인이 자세히 설명하는 형식의 질문은 거의 하지 않거든요.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방식의 질문을 하라고 하니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지 당황하셨던 거죠.
상대방 변호사의 첫 질문이 “증인은 행정실장을 아는가요”라는 것이었는데, 제가 “증인은 ‘행정실장’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이의를 제기했죠. 그러면서 미리 준비해 간 아이패드에 담긴 행정실장의 사진을 증인에게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아느냐”라고 질문을 했어요.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할 때마다 추상적인 단어나 너무 긴 질문 등에서 계속 이의가 들어가자, 상대방 변호사는 몇 가지 질문을 시도하다가 ‘도저히 못 하겠다.’며 미리 준비해 온 수십 페이지의 증인신문을 포기해 버렸어요. 증인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오픈형으로 질문하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거죠.
또, 피해자는 인화학교를 졸업한 뒤 결혼해서 임신한 상태로 증언을 하고 있었는데, 상대방 변호사는 증인의 가족들 학력이나 가족 중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 몇 명인지를 질문하는가 하면, “강간을 당했다면서 어떻게 결혼하고 임신까지 할 수 있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방청객들이나 대책위 분들이 인권 침해적 질문에 격분하고, 성폭력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 대해 실소를 금치 못했죠. 그게 법조인들의 편견이자 무지인 거예요.
성폭력을 잘 모르는 이들 중에는, 강간을 당하면 남자친구를 사귈 수도 없고 결혼도 못 하고, 임신이나 출산도 못 한다는 편견을 가진 사람도 있는데, 상대방 변호사도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결혼도 하고 임신도 한 걸 보니, 그게 바로 강간을 안 당했다는 증거가 아니냐?”는 식으로 질문을 하는 거예요.
제가 증인신문에 앞서 “쉬운 말로,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묻지 말고 한가지씩 질문하고, 오픈형으로 질문해 달라”, “말로 표현하는 언어 외에도 표정이나 말투, 몸짓, 눈빛 이런 것들까지 유심히 살펴봐 달라.”고 했던 것처럼 장애인에 대한 증인신문은 좀 더 많은 배려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법조인들이 성폭력에 대해서, 장애인에 대해서 편견을 갖거나 이해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거죠. 그러한 이해 부족과 편견으로 재판 과정에서도 피해자에게 상처를 많이 주고 있고요. 물론 지금은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다고 생각해요.
사건을 잘 해결하기 위해서는 변호사 혼자만 노력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증인이나 관계되는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모여야 하고, 특히 관련 분야,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네트워킹이 잘 되어야지만 진실이 밝혀지고 사건이 잘 마무리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죠. 사건을 진행하면서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증인으로 나가는 것을 극구 거부했던 그 친구가 마음을 열고 증언을 해 준 것이었어요. 그리고 자기 자식처럼, 내 일처럼 함께해 주셨던 광주시민들과 대책위 분, 특히 김민선 소장님과 김용목 목사님의 열정과 사랑도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도 ‘도가니 사건’의 재판이 있을 때마다 서울에서 광주까지 내려와서 재판을 모두 다 지켜보고, 대책위나 우리 변호인단과 함께 같이 고민하고 상의하곤 했었어요. 돌이켜보면, 이 사건을 해결하기까지 각계각층의 수많은 분이 함께해 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신 것이 새삼 떠오르네요. 한국성폭력상담소,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대책위 분들, 수어통역사분들, 무료로 운전해 주신 분들, 피해자들과 많은 변호사님이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했었죠. 무슨 일이건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손을 맞잡고 함께 할 때,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을 이 사건을 통해서 다시 한번 더 하게 됐죠.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피해자들이 너무 많아요. 이런 분들에 대해서 좀 더 우리 사회가 찾아내고 도와주고, 지지해 주고, 감싸 안아주고,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가니 사건’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도가니 사건’은 상처도 너무 많고 오랫동안 지체된 사건이었지만, 그래도 결국은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었고 피해자 친구들이 트라우마 치료도 받을 수 있었던 점에서 성공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해요. 각계각층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무료로 재능기부를 해 주시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이 잘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피해를 당한 모든분들이 ‘도가니 사건’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을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에요. 피해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보다 많은 제도와 단체가 만들어지고, 누구나 쉽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그런 지원기관과 제도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