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최상구(1946년생)의 마을을 ‘빨갱이밭’이라 불렀다. 경기(지금은 인천) 강화군 교동면 상룡리. 당시 여섯 살이었던 최상구가 ‘빨갱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했을까. 하지만 그 말 때문에 최상구는 젊은 어머니와 세 살 난 동생까지 잃어야 했다.

그곳을 ‘빨갱이밭’이라 부른 이들은 바로 ‘특공대’. 한국전쟁 당시 활동하던 유엔군 유격대(UN Partisan Forces)였다. 현역 군인·낙오 경찰·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원래 38선 이북지역의 치안대였다. 그들은 군·경을 도와 좌익 혐의자 색출에 앞장서다가, 1·4후퇴 당시 교동도로 피난을 나와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특공대를 조직했다.

‘특공대’가 최상구의 가족들을 잡아간 날은 1951년 음력 1월 11일경. 전쟁통에 난리를 피해 외가에서 지내던 최상구의 가족들이 정월대보름을 쇠러 큰댁에 온 날이었다.

“정월대보름을 쇠러 왔는데, 오는 걸 기다렸다가 그날 저녁으로 붙들어다 간 거예요. 나도 그때 같이 잡혀 있었어요. 동네 사람들하고 같이 우리 작은할아버지네 골방에다 가둬놨다가, 그 다음 날 저녁에 안개산(사태골)으로 끌고 가서 사살했어요.”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유족 최상구 ⓒ구자환 감독

1·4후퇴로 군·경이 모두 떠난 교동도에는 여자, 어린이, 노인만 남아 있었다. 황해도 지방에서 피난 나온 청장년들이 주축이 된 ‘특공대’는, 처음에는 남의 집 된장·고추장 따위를 훔쳐 먹다가, 나중에는 부역혐의를 받고 있는 집의 소·돼지를 잡아먹기도 했다.

나중에 그들은 각 리마다 조직돼 있는 자체 치안대에 지시해, 부역혐의자들을 연행하고 살해하게 했다. 소년단원들도 특공대의 지시에 의해 해안경비를 서거나, 부역 혐의자 가족들을 소집하거나, 살해 현장인 상룡리 사태골의 땅을 파거나 시신을 묻는 일에 동원됐다.

“다 죽여!”라는 특공대원들의 소리를 듣고 그곳을 떠난 이○○은 너무 놀라 단숨에 야산을 넘는데 “땅” 소리 후 “따 땅땅” 소리가 나면서 “악~ 악~ 악” 하는 주민들의 아우성이 들렸다고 하였다. 다음날 특공대의 지시를 받은 소년단원들은 상룡리 사태골(숯고개)의 얼어붙은 땅을 삽으로 파서 새끼줄로 묶인 시신 30여 구를 파묻었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강화(교동도)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보고서> 중)

최상구의 어머니 노분임과 동생 최봉구가 희생됐다. 당시 노분임은 스물여덟 살, 최봉구는 겨우 세 살이었다. 그리고 최상구의 숙부 최진용과 숙모 임옥순도 죽임을 당했다. 잡혀간 가족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최상구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구사일생이었다.

“(골방에 가둬둔 사람들을) 아무래도 죽일 것 같으니까, 할머니가 묘안을 낸 거예요. 소 한 마리를 잡아서 막걸리하고, 특공대들한테 퍼먹인 거죠.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 할머니가 물어봤어요. ‘우리 손주들 물이라도 좀 먹이자.’ 특공대가 그러라고 한 거죠. 그래서 할머니가 나를 들쳐업고 뒷산으로 내뺀 거예요. 다음 날, 날 밝고 나서 나는 외가로 피신했고.”

할머니에게 업혀 뒷산으로 달아난 최상구는 이튿날 외가로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 ⓒpixabay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는 모두 183명이다. 이들 대부분은 최상구와 같이 가족 단위 희생자였다.

희생된 가족은 모두 71가족으로, 한 가족당 희생자 수는 평균 2.6명이다. 8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경우도 두 가족이나 있었고, 7명이 학살당한 경우도 한 가족 있었다. 183명의 희생자 중 136명(74.3%)이 아동·노인·여성. 15세 이하 아동이 61명으로 희생자의 33.3%를 차지하고 있으며, 51세 이상 노인도 27명으로 희생자의 14.8%를 차지하고 있다.

여성 희생자도 90명으로 전체의 49%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중 21세부터 30세 사이의 여성이 25명으로 각 연령대의 남녀를 통틀어 가장 많이 학살당했다. 이들은 유아를 데리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 아이를 업은 채 학살당했고, 그중에는 임산부도 여럿 있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같은 학살이 “군인과 민간인을 엄격히 구별하여 민간인을 보호하며, 적대행위에 능동적으로 참가하지 아니하는 자에 대한 살인 등을 금지하는 전시 최소한의 인도 기준인 제네바협약 공통 3조나 제16조의 중대한 위반행위로 ‘전쟁범죄’에 해당된다”고 판단했다. 이는 또한 당시 존재하던 사형금지법(私刑禁止法)에도 위배되는 행위였다.

전쟁 중인 1950년 12월 1일 발효된 사형금지법은 당시 권력남용적 살인·감금·고문약탈·파괴 등의 행위가 군인·경찰·청년대에 의해 널리 자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당시 사형금지법 제3조에 따르면, 군인, 경찰관, 청년방위대원 등이 비상사태를 빙자해 사형을 감행하거나 사형을 명령 또는 용인했을 때,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지울 수 없는 바람 하나는, 끝내 누명을 벗지 못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길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 ⓒ구자환 감독

최상구의 아버지는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좌익’ 누명을 쓰고 경찰 지서로 불려간 아버지는 강화경찰서에 갇혔다. 할머니가 경찰서로 다니며 밥을 해서 넣어주고 옥바라지를 했는데, 어느 날 수형자들 밥그릇이 경찰서 마당에 다 나와 있었다.

“할머니가 ‘사람들 다 어디 갔냐’ 물으니까 ‘다 인천으로 넘어갔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할머니가 막냇삼촌을 보낸 거예요. 너희 형 인천으로 넘어갔다니까 어떻게 됐나 소문이라도 좀 들어보라고. 그런데 삼촌까지 안 돌아오고. 그렇게 두 분은 실종이 된 거예요.

아버지는 실종됐고 어머니와 동생은 목숨을 잃었다. 숙부 내외도 살해됐고 또 다른 숙부는 아버지와 같이 행방불명됐다. 최상구는 이런 비극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 철이 들어서야 (가족들이 어떻게 희생됐는지) 알았죠. 제가 열아홉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제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 이야기를 해준 거예요. 각인이 될 수밖에 없죠. 어릴 때는 생각지를 못했는데 나이 먹고 가만히 생각하니까 (울분이) 치밀어 오르는 거예요.”

어머니와 동생, 숙부와 숙모의 죽음은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국가 차원에서 진실이 규명됐다. 하지만 행방불명된 아버지와 막내 숙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밝혀진 것이 없다.

최상구는 올해 78세. 무심히 흘러버린 세월이 72년이다. 그래도 지울 수 없는 바람 하나는, 끝내 누명을 벗지 못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길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이 땅에서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 최상구의 마지막 바람은 그것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 김광동 위원장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과 명예. 여섯 살 꼬마가 여든을 눈앞에 둔 노인이 될 때까지, 최상구는 그 두 가지 단어를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 원한을 풀어줘야 할 사람이 최근 유족들의 가슴에 도리어 대못을 박았다. 그는 바로 진실화해위원회의 김광동 위원장이다.

지난 9일 김 위원장은 서울 영락교회에서 열린 강연에서 “침략자에 맞서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인과 경찰이 초래시킨 피해에 대해 (희생자) 1인당 1억 3200만 원의 보상을 해주고 있다”며, “이런 부정의는 대한민국에서 처음 봤다”고 말했다.

그는 “침략자에 의해 초래된 희생은 감추고, 침략을 막는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을 ‘국가범죄’, ‘국가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교육”한다는 비판도 덧붙였다.(한겨레 <[단독] 민간인 학살 피해보상에 “정의 아니다”…김광동 망언> 윤연정 기자, 2023. 6. 9.)

진실화해위원회는 “인권유린과 폭력·학살·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왜곡되거나 은폐된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1조) 만들어진 국가 조사기구다.

그런데 그 기구의 위원장은 지금 수많은 민간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두고, 다시 한번 그 죽음의 ‘색깔’을 묻고 있다. 어떤 죽음 위에 빨간색을 덧칠하며, 죽음마저 좌우로 갈라놓는다. 72년 전 최상구 가족의 목숨을 빼앗은 학살이 생명에 대한 학살이라면, 지금 진실화해위원장의 망언은 그들의 명예에 대한 학살이다. 대체 언제쯤, 언제쯤이면 이 학살이 끝날까.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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