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무서운 경찰들 있다고요. 아주 벌벌 떨고 그랬지, 우리 어린애들은.”
여든다섯 이풍식(1939년생)의 눈빛에 72년 전 그때처럼 두려움이 비쳤다. 열세 살 소년에게 경찰 기동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풍식이 살던 곳은 전남 함평군 손불면 죽장리. 함평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군유산(해발 403미터)이 마을을 품고 있었다.
1951년 2월. 한국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마을 분위기는 어지러웠다. 전쟁 초기 인민군에 밀려 후퇴했던 군·경은, 1950년 12월 함평군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군내 모든 지역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낮에는 경찰, 밤에는 ‘빨치산’이 마을에 들어오는 상황이 이어졌다.
“군소재지만 수복했지, 산중이나 외진 데는 점령 못했어요. 경찰들이 (낮에는) 마을까지 왔다 갔다 했는데, 저녁에는 못 들어와. 저녁에는 인민군(빨치산)이 또 왔다 갔다 했다고.”
함평군을 수복한 경찰은 군내 여러 곳에서 빨치산에 대한 토벌작전을 벌이는 한편,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군에 협조한 ‘부역자’들을 색출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부역혐의 조사를 이유로 주민들을 연행하는 일이 잦았고, 마을 사람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당시 부역혐의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거였다. 자발적으로 인민군에 적극 협조한 사람도 있겠지만, 그저 밥을 한 끼 해줬다거나, 곡식이나 옷가지 같은 걸 줬다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어느 집안과 사이가 안 좋아서’ 부역자로 몰린 경우도 많았다.
낮에는 경찰 말을 듣고, 밤이면 빨치산 말을 들어야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마을 사람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무서운 소문이 돌았다. 내일 새벽 경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 마을에 있으면 다 죽으니, 산으로 숨어야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풍식의 아버지와 큰형은 토벌작전 하루 전에 먼저 군유산으로 들어갔다. 남은 가족들도 “다음날 아침 경찰이 개미떼처럼 몰려오자”(이풍식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2008. 4. 19.) 산으로 올라갔다. 어머니와 작은형, 이풍식, 그리고 어린 여동생까지. 1951년 2월 19일이었다.
“새벽에 군인·경찰 합동으로 (마을에) 들어온다. 거(군유산) 가야 산다, 피신해라,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전부 (산으로) 올라갔지. 올라감과 동시에 군인들, 경찰들이 막 총 쏘고 (빨치산들과) 싸우는 거예요.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산에 올라가서도 총알을 피하려고 이리 숨고 저리 숨고…. 결국 식구들이 경찰에 잡혀서 다 포로가 됐지.”
이풍식의 가족들은 손불면에 있던 경찰 지서로 연행됐다. 어머니는 직감했다. 여기 있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거란 사실을. 그때 마침 마을 이장이 지서로 찾아왔다. 어머니가 이장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어린 것들만이라도 좀 데려가라고. 그래서 이풍식과 여동생은 이장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는 ‘살아 있는’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이장이 찾아왔더라고요. 어머니가, 요 어린애들은 좀 데려가라 그래서 누이동생하고 나는 나오고, 어머니하고 작은형님은 총살을 당해 돌아가시고…. 꼭 감정이 있어야만 죽이는 게 아니에요. 무조건 이렇게 저서버린(난사해버린) 거예요. 산에도 송장이 많고, 경찰에 잡혀 들어가서 죽은 사람도 (많고). 내가 보니까 (어머니는) 얼굴도 없어…. 얼굴에도 쏴버링게….”
이풍식의 어머니 신연여(당시 43세), 작은형 이창식(당시 18세)은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군유산 골짜기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수습했다. 토벌작전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날로부터 5일 뒤였다. 큰형 이형식(당시 20세)은 행방불명이 됐다. 하지만 두세 달 뒤, 그 역시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가 이풍식의 귀에 전해졌다. 죽은 날도, 죽은 자리도 알 수 없었다.
“음력 11월 4일(경찰이 함평군을 수복한 1950년 12월 12일) 뒤로는 신광 경찰고지에서 조사한다고 날마다 불러내니 주민들은 군유산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피난을 갔습니다. 이풍식의 가족은 인민군 점령기에 특별한 활동도 하지 않았지만 신광 경찰고지에서 못 살게 하여 군유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풍식의 어머니와 작은형은 군유산에서 연행되어 손불 경찰고지 부근 산당고랑에서 총살되었고, 큰형은 나중에 사망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나 시신은 찾지 못하였습니다.”(당시 마을 주민 이○○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2008. 5. 21.)
1951년 2월 24일 경찰의 <적일일동향보고>(Daily Enemy Activity Report)에는 “1951년 2월 19일 전라남도경찰국 기동대와 함평과 영광경찰서 기동대가 군유산 인근 ‘빨갱이’를 소탕”하는 작전을 벌였다고 기록돼 있다. 이른바 ‘군유산작전’이다.
경찰의 <한국경찰대일일보고서Ⅰ> 에는 군유산작전을 통해 ‘빨갱이’ 165명을 사살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들은 모두 누구였을까. 그렇다면 이풍식의 어머니와 형들 같은 ‘민간인’ 희생자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그 수는 58년이 지나서야 일부 확인될 수 있었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함평지역 민간인희생사건’ 희생자 184명의 신원을 확인하고 41명의 희생을 추정했다. 225명의 희생자 중 이풍식의 가족과 같이 군유산작전 이후에 사망한 희생자는 110명으로,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48%를 차지한다.
희생자 대부분은 남성이었지만, 이풍식의 어머니 신연여와 같은 여성 희생자도 35명(16%) 있었다. 연령별 분포를 보면, 20대와 30대가 98명으로 전체의 43%를 차지했고, 10대 희생자도 21%나 됐다. 당시 18세의 나이로 희생된 이풍식의 작은형 이창식도 그중 하나다.
희생자 대부분의 직업은 농업. 하지만 전직 면장을 포함한 공무원이 3명이었고, 국민학교 교감, 휴가를 나온 방위장교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빨갱이’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군유산작전이 경찰의 기록처럼 ‘성공적인’ 작전이 아니었다는 경찰 쪽 증언들도 있다. 무리하게 작전을 펴지 않았다면 큰 민간인 인명피해 없이 수복할 수 있었을 거란 말이다.
“군유산 작전은 전라남도경찰국 기동대 1개 대대 150명 이상이 작전에 참여하였고, 함평과 영광 경찰도 참여하였다. 그럼에도 경찰은 군유산이 피난민들로 꽉 차다보니 처음에는 들어가지 못하다가 좌익세력이 빠져나간 뒤에야 들어가 민간인들을 산 속 고랑으로 밀어넣고 총살하였다. (…) 피난민에 대하여 제대로 된 정보만 있었어도 피해는 줄었을 것.”(당시 함평경찰서 의용경찰 임○○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2008. 9. 21.)
“군유산에는 무안에서 올라온 사람들(빨치산)이 ‘무호대’라면서 총 서너 자루 정도 가지고 있었다. (…) 무안 사람들이 들어왔다고 하니 경찰이 과대평가하여 손불(면) 수복이 염산(면)이나 신광(면)보다 훨씬 늦었다. 그래서 손불은 ‘경찰이 키워서 잡아먹었다’는 말이 맞다. 경찰에서 손불면 소재지만 수복하고 군유산은 그대로 두었어도 무안 사람들은 도망갔을 것이다.”(작전 당시 빨치산에 잡혀 있다가 나중에는 경찰로서 지리산지구 토벌작전에 참여한 김○○ 진실화해위원회 진술 2009. 8. 6.)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함평지역 민간인희생사건’을 “경찰과 국군이 ‘함평지역 수복’ 과정에서 민간인을 빨치산 협조자 또는 좌익협조자로 판단하여 적법절차 없이 살해한 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당시가 전시, 특히 빨치산과 교전 직후 또는 인민군 점령기 직후라고 하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가진 군인과 경찰이 비무장 민간인을 적법절차 없이 총살한 것은 불법행위였다”라고 그 불법성을 확인했다.
동시에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의 공식 사과 ▲위령시설 설치 등 위령사업 지원 ▲공식 문서기록 정정 ▲역사 기록 수정 및 등재 ▲평화인권교육 강화 등을 정부에 권고했다.
군유산작전과 이후의 학살이 일어난 전남 함평군 손불면 희생지 현장에는 2013년 손불면민간인집단학살희생지 표지석이 세워졌다. 그밖에도 함평군 곳곳에 희생지 표지석이 세워져 과거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고 애도할 수 있게 돕고 있다.
그리고 2019년에는 월야달맞이공원(전남 함평군 월야면 용월리 355-4) 안에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추모공원이 조성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들이 이름이 위령비에 새겨졌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