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집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경남 창녕군 부곡면 부곡리. 밀양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열여섯 살 이우화(1935년생)는 1950년 7월 여름방학을 맞아 창녕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들을 반겨줄 거라 생각했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마흔셋 됐을 쯤에 ‘민주일보’ 밀양지국장을 했어요. 새벽에 밀양역에 나가서 신문을 받아와서 밀양 시내에 신문을 돌리고 이랬어요. 경찰이 아버지를 항상 감시했어요. 그런데 보도연맹에 가입하고 나서는 감시가 사라져서 부산으로도 다니고 무사히 지냈어요.”
민주일보는 1946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장 엄항섭을 사장으로, 부주석 김규식을 명예사장으로 추대해 창간한 신문이다. 이우화의 아버지 이돈화(1904년생)는 민주일보 밀양지국장을 하면서, 일제강점기 창녕 지역에서 농민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전쟁 전부터 아버지는 경찰의 감시를 받고, 수시로 경찰 지서에 불려가기도 했다. 하지만 1949년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지고 아버지가 거기 가입하면서, 경찰의 감시도 사라졌다.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인다’는 목적을 표방한 국민보도연맹. 김효석 당시 내무부장관이 총재를 맡아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관변단체였다.
하지만 실제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경찰에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좌익과 무관한 사람들을 가입시키기도 했다. 비료나 곡식을 주겠다는 말에 속아, 보도연맹이 뭔지도 모르고 가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창녕군 지역 보도연맹원 수는 약 200명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1950년 6월 전쟁이 시작되자,‘대한민국 국민으로 받아들인다’는 보도연맹의 목적은 완전히 뒤집어졌다. 오히려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는 살생부(殺生簿)가 돼버린 것이다.
“여름방학을 하고 (창녕) 집에 오니까, 어머니가 ‘며칠 전에 너희 아버지가 창녕경찰서에서 오라 해서 갔는데 못 오고 있다, 면회도 안 된다 하고 어쩌면 좋으냐’ 그러시는 거야. 보도연맹 도장을 찍고 국가에 충성하겠다 했기 때문에 (전쟁 전까지는) 괜찮았거든. 그래서 아버지도 (아무 의심 없이) ‘금방 갔다 오마’ 하고 옷을 챙겨입고 나가셨다는데….”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8월까지, 창녕경찰은 관내 보도연맹원 등을 예비검속해 창녕경찰서와 경찰서 인근 무도관(강당)에 구금했다. 인민군들이 빠른 속도로 남진함에 따라 국군과 UN군은 최후의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으로 몰린 상황. 이우화의 마을 역시 안전하지 못했다.
“집에 온 지 한 열흘 만에 피난을 갔으니, 아마도 8월 초쯤 (될 겁니다). 그때 도로에는 미군 차가 늘 다니고 비행기가 하늘에 뜨고 이랬는데, 이장들이 ‘피난을 가야 한다’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전부 옷보따리 챙기고 양식 챙기고 팔도고개를 걸어서 피난을 나간 거야. 피난 갔다가 두 달 채 못 돼서 왔거든, 그런데 (창녕경찰서로 잡아간 사람들을) 마산형무소에 갖다놨다가 마산 앞바다에 수장을 시켰다, 이렇게 소문이 나더라고.”
피난을 떠났다 두 달 뒤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대신 전해진 소문은 이우화의 가족들을 절망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제는, 살아서, 만날 수가, 없었다.
창녕경찰서에 소집돼 트럭으로 실려나간 창녕 보도연맹원 및 예비검속자들은 마산시민극장을 거쳐 마산형무소로 이송됐다. 그곳에 구금됐던 사람들은 ‘괭이바다’(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원전마을과 거제시 장목면 칠천도 사이의 바다)에서 총살된 후 수장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날 점심 무렵 GMC 트럭 열 몇 대 정도가 사람들을 가득 싣고 창포동 해안가로 오는 것을 보았고, 트럭에서 짚으로 만든 벙거지를 쓴 사람들이 내렸는데 모두 손이 뒤로 묶였고 앞뒤 사람의 허리에도 로프가 묶여 있었다. 이때 LST(전차양륙함) 두 척이 왔는데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이 옮겨 탔다. 나중에 들으니 그들은 괭이바다에서 총살된 후 수장되었다고 한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창녕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토호세력의 뿌리》 김주완, 2006년 재인용)
마산형무소로 이송되지 않은 일부 사람들은 창녕읍 솔터마을 뒷산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1990년 당시 이 지역 목격자 김동수의 인터뷰를 실은 항도일보는, “창녕읍 솔터마을 인근 주민들은 1시간여 동안 총소리를 들었고, 주민들이 부역을 나가 5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밧줄에 몸이 묶인 채 넘어져 있는 시체를 구덩이에 파묻었다.”고 보도하였다.(2009년 진실화해위원회 <경남 창녕 국민보도연맹 사건 조사보고서>)
사건으로부터 59년이 지난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경남 창녕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49명과 희생추정자 2명, 모두 51명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 사건 희생자는 모두 최소 120명에서 최대 2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이우화의 아버지 이돈화 역시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 49명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우화는 여전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도, 돌아가신 곳도 알지 못한다.
아버지의 마지막 숨이 멈춘 곳은 괭이바다의 차가운 바다 아래일까, 솔터마을의 어느 골짜기 땅속일까. 진실화해위원회가 보내준 ‘진실규명 통지서’ 한 장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곳’이 여든아홉 이우화에게 아직도 남아 있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구자환 감독 documo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