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가 가까워지는 시간, 사람들은 일찍이 더위를 피해 건물 안으로 숨어들었다. 한산한 거리를 걷다보니 이상하게 긴장이 풀렸다. 앞뒤로 맨 가방의 무게도 잊고, 헌법재판소 맞은편 상가들을 오르내리며 전경을 찍으려고 애썼다.
나 홀로 소풍도 잠시, 검은색 SUV 한 대가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단발머리를 한 중년의 여자가 전화를 받으며 내렸다. 조심스레 다가가 명함을 건네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국가보안법 마지막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던 그 사람. 바로 박미자(63)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였다.
박미자 연구교수가 눈에 띈 건 특이한 이력 때문이었다. 그는 세 차례 해직과 두 차례 복직을 경험한 중학교 국어교사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해직 사태’가 있었던 1989년 9월 박미자는 첫 번째 해직을 당한다. 공안당국은 ‘체제수호’를 명목으로 교원노조 결성을 막아섰다. 문교부(현 교육부)는 전교조를 반체제 세력으로 규정하고 탈퇴를 종용했다. 이 과정에서 ‘전교조 탈퇴 각서’에 서명을 거부한 교사 약 1500여 명이 해직됐다. 박미자도 그중 하나였다.
‘전교조 해직 사태’ 이후 해직교사 원직복직 운동이 줄기차게 이어졌고, 1994년 3월 1287명이 다시 임용된다. 이때 박미자도 인천 미추홀구에 위치한 관교중학교로 복직한다.
한 번의 해직과 한 번의 복직. 그러나 이어진 교직생활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국가정보원은 2012년 1월 당시 전교조 수석부위원장으로 있었던 박미자의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이듬해 2월 국가보안법 위반(▲이적단체 결성 ▲회합통신 ▲이적표현물 제작 반포 ▲이적표현물 소지죄 등) 혐의로 박미자를 기소했다.
2015년 1월 1심 재판에서 ‘이적표현물 소지죄’가 인정돼 집행유예 판결이 나오고, 인천교육청은 교육부의 명령에 따라 박미자에 대해 직위 해제조치를 취한다. 이후 2018년 다시금 복직하지만, 2020년 1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이 확정되면서 결국 교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법원이 ‘이적표현물’로 인정한 것은 ≪봉이 김선달≫ ≪조선의 력사≫와 같은 북에서 제작된 서적들이었다. 이는 남북교류가 활발했던 2005년 남북교육자교류 행사에 참여한 박미자가 구입했던 아동 서적들이다. 당시 평양 시내 서점에서 구입해 남쪽으로 돌아올 때는 검열 절차를 받아 적법하게 통과된 반입물이었다.
법원이 ‘이적표현물’로 인정한 ≪조선의 력사≫는 국내 도서관 ‘북한자료센터’에서도 열람이 가능하고, 한때 남한에서도 손쉽게 구매할 수 있는 책이었다. 당시에는 적법한 절차를 통해 반입한 북한 서적들이 수년이 지나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굴레로 박미자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그는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몸소 느꼈다. 특히 국가보안법 7조의 심각성을 알고, ‘7조부터 폐지’하자는 운동을 펼쳐 나간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박미자를 만난 건 지난 12일 헌법재판소 앞이었다. 그는 2020년 4월 27일부터 매주 월요일 헌법재판소 앞을 찾고 있다. 헌법재판소를 향해 국가보안법 위헌 판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날은 150번째 ‘국가보안법 7조 위헌심판 촉구 월요 1인시위’가 열린 날이었다.
현장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정연진 액션원코리아(Action One Korea, 이하 ‘AOK’) 상임대표와 양희제 AOK 공동대표, 이기만 AOK 운영위원, 홍덕진 AOK 회원까지 5명이 1인시위에 함께했다.
이들은 뙤약볕 아래 피켓을 들고 각자의 위치에 섰다. 정문 양옆에 두 사람, 쪽문 옆 그늘막 아래 한 사람, 도로변에 한 사람. 저마다 자연스레 정면을 응시했다. 그제야 한 사람이 아닌 피켓이 눈에 들어왔다.
“헌법재판소에 국가보안법 7조 관련 위헌 판결을 촉구합니다”
제7조(찬양·고무등) ①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⑤제1항·제3항 또는 제4항의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자는 그 각항에 정한 형에 처한다.
국가보안법 7조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라는 대목에서 주관적 해석의 폭이 크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아왔다. 또한, 이적표현물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부족하다는 점도 지적돼왔다. 이 때문에 사회의 민주화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고, 심지어는 무고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적표현물 소지·유포’와 ‘찬양·고무’. 왠지 익숙한 말들 아닌가? 셜록이 앞선 기사를 통해 전한 국가보안법 ‘무죄’ 당사자들의 이야기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들이다.
통일학 연구자였던 유영호 ‘왈가왈북’ 대표는 연구 목적으로 소지했던 북한 영화들이 ‘이적표현물’이 됐고(관련기사 : <유튜브에 널린 북한영화, 눌러볼 ‘용기’ 있습니까?>), 간디학교 최보경 역사교사 역시 교육자료로 활용한 북한 관련 문서들이 ‘이적표현물’이 됐다(관련기사 : <382번의 단식… ‘흰옷’ 입은 학생들이 국보법을 이겼다>).
재미동포 통일운동가 신은미 작가는 “대동강 맥주가 맛있다”는 발언 때문에 ‘찬양·고무’의 죄를 뒤집어썼고(관련기사 : <언론이 만들어낸 마녀… ‘1788 : 12’라는 참혹한 대비>), 강성호 교사는 ‘6·25 북침설을 가르쳤다’는 학생들의 거짓 진술 때문에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는 혐의를 받아 교단에서 쫓겨나야 했다(관련기사 : <‘빨갱이 교사’ 한 명을 만들기 위해, 모두 공범이 됐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7조로 수사와 재판을 받는 동안 오랜 시간 고통받았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국가보안법 ‘무죄’ 판결 이후에도 어쩔 수 없이 ‘자기검열’ 하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2022년 9월 15일은 국가보안법 역사에 중요하게 기록된 날이다. 헌법재판소에서 국가보안법 2조(정의)와 7조(찬양·고무 등) 위헌 여부를 가리는 첫 번째 공개변론이 열린 날. 이날 심판대에 오른 조항은 국가보안법 ▲제2조 1항 ▲제7조 1항 ▲제7조 3항 ▲제7조 5항으로, 2017년 이후 접수된 11건의 위헌소원 사건, 위헌제청 사건이 병합돼 열렸다. 위헌소원과 위헌제청은 헌법재판소에서 법률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것을 말한다.
- 위헌 측 : “이적행위조항 및 이적표현물조항은 매우 포괄적이고 불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여 그 적용범위가 광범위하게 지나치게 자의적이고, (…) 그 결과 자기 검열에 의한 위축효과가 발생하게 하여 ‘사상의 시장’에서 유통되는 것을 막게 하여 오히려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시키는 결과가 된다.”
- 합헌 측 : “‘실질적 해악을 미칠 위험성이 명백한’ 행위만 처벌되고 있어 악용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이적행위로 야기된 명백한 위험은 그것이 반드시 현재 시점에 당장 현실화된 것은 아닐지라도 언제든지 국가안보에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고, (…) 따라서 이적행위조항 및 이적표현물조항은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이상 헌법재판소 공보관실 보도자료 2022. 9. 8.)
국가보안법 7조는 법안 일부가 개정된 1991년 5월 31일 이후 일곱 차례 헌재의 심판대에 올랐으나 모두 합헌 결정이 내려진 바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개변론도 진행되는 등 과거와 다른 판단이 있을 거라는 관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과거의 흐름을 보면 이러한 기대는 터무니없는 바람이 아니었다. 비록 합헌 결정이 내려졌지만, 2015년에는 재판관 3명, 2018년에는 5명이 ‘위헌’이라는 소수의견을 제시했다. 재판관 9명 가운데 6명이 동의해야 위헌 결정이 나온다.
“이적표현물의 소지·취득행위를 처벌함에 따라, 누가 보더라도 이적 목적이 없음을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특정신분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보통의 일반 국민들은 북한과 관련된 자료를 소지하거나 취득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므로, 통일·외교·군사 등 국가의 중요사항에 관하여 일부계층이 정보를 독점하고 국민의 알 권리는 부정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2015년 4월 30일 국가보안법 위헌법률심판 사건에 대한 소수의견)
지난봄에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심판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전망도 있었다. 4월 퇴임을 앞둔 이석태 재판관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오랜 숙원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그는 2004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으로 있으면서, 한 해 주력사업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꼽을 만큼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변호사로서 간디학교 최보경 교사와 같은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낸 바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재판관은 예정대로 퇴임했고, 헌법재판소의 국가보안법 위헌 결정은 나오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이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쉬웠죠. 재판관들마저도 자신의 뜻만으로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헌재 판결이 무기한 연결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 민중의 힘이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4년째 시위를 이어오게 된 것 같아요.”
지난 12일 헌법재판소 앞을 지킨 정연진 AOK 상임대표는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헌법재판관조차 국가보안법 건드리는 것을 겁낸다면 ‘민중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 나왔다고 전했다.
이날 1인시위를 지켜본 건 기자만이 아니었다. 그 앞을 지나는 수십 명의 시민들도 이들의 시위를 지켜봤다. 이기만 AOK 운영위원은 “수십, 수백 명 중 단 한 사람이라도 보고 가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위에 나왔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피켓에 관심을 갖는 시민에게 국가보안법의 위법성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국가보안법은 뿌리부터 악법이었습니다. 애국투사나 민주투사를 고문하는 역할을 해왔으니까요. 이름만큼은 국가의 안보를 책임질 것 같은데요, 정말 국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정권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말이죠.”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는 평소 “기득권이 가진 헤게모니를 생각하며 산다”며, “국가보안법 문제도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졌다”고 엄지를 들었다.
헌법재판소 앞에서 시위를 이어간 한 시간. 시민들의 ‘시그널’은 기자의 눈에도 포착되었다. 엄지를 드는 것은 물론이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날 시위에 처음 나온 홍덕진 AOK 회원은 “묵언의 지지를 해주시는 분들을 덕분에 힘이 났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토론회를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이들도 있다. 지난 14일 국회 의원회관 제2세미나실에서 유신청산민주연대가 주관한 6월항쟁 36주년 토론회가 열렸다. ‘유신청산, 고문과 국가보안법 없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토론이 이어졌다.
최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전교조, 금속노조, 민주노총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뤄졌다. 이에 ‘신공안세력’을 저지하고, 타개하기 위해 의견을 나누는 자리였다. 현장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문을 받은 피해자와 가족, 피해자 단체 대표 등이 참석했다.
최정순 전 이화여대민주동우회 회장은 ‘고문기술자’ 이근안 때문에 한평생 후유증에 시달리다 지난해 숨진 이을호 전 민청련 부위원장의 부인이다. 그녀는 윤석열 정권에서 1980년대 국가폭력의 망령이 되살아난 듯 기시감을 느꼈다.
“노동조합을 했다는 이유로, 노동자 투쟁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노동자가 구속되는 검찰정권의 모습을 보면서 또 다시 국가폭력과 고문의 두려움이 되살아납니다.”
“‘교사된 이는 정치와 종교에 대하여 평론하지 않아야 한다. 가령 사회 풍조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말고 오로지 교육에만 힘을 쓰는 것이 좋다.’ (…) 이 말은 1907년,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인 교원들에게 훈계하였던 것이다. 교육활동에 대한 이러한 이토 히로부미의 왜곡된 관점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교사들에게 주입되었고 (…) 나는 국가보안법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남긴 말이 살아 있음을 본다.”(6월항쟁 36주년 토론회 박미자 성공회대 연구교수 발제문)
이날 박미자 연구교수는 이날 ‘미래교육과 국가보안법’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맡았다. 그는 2023년 ‘월요 1인시위’ 구호를 ‘국가보안법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협한다’로 정했다며, 국가보안법이 학생들의 학습 기회를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정권이 바뀌면 교사들은 도서관에서 책 구매하는 것도 고민하게 된다”며, 교육 현장에서 연구의 자유 및 사상이 침해된다고 밝혔다.
마지막 토론자는 우희종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였다. 그는 토론문을 통해 “(국가보안법은) 21세기 한국 사회, 교육 현장, 대인 간 교류, 심지어는 개인 생각에 있어서도 치밀하게 작동하고 있다”며, 국가보안법을 ‘가장 전근대적 악법’이라고 지칭했다.
“질긴 놈이 이긴다”라는 심정으로 헌법재판소 앞에서 위헌판결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4년째 진행하고 있으며, (…) 이런 지속적인 활동과 투쟁으로 수십년 간 이어져온 국가보안법은 기어코 사라질 것이라 믿습니다.”(6월항쟁 36주년 토론회 전희영 전교조 위원장)
국가보안법은 1948년 제정됐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치안유지법(1925년 제정)에 근간을 뒀다는 점을 생각하면, 약 100년간 이 사회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셈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국가보안법은 수많은 국민들을 탄압하는 무기로 활용됐다. 국가인권위원회와 국제인권기구의 폐지 권고는 물론, 사회 곳곳에서 수십 년간 이어져온 폐지 운동에도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질기게’ 존치되고 있다.
무고한 피해자들의 생을 먹고 자란 국가보안법, 그 질긴 생명력을 끊어내려는 ‘질긴 놈’들은 오늘도 싸우고 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