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편 <‘누가 아들을 죽였나’ 어머니의 쪽지에 숨어 있던 진실>에서 이어집니다.
2020년 8월 진정을 접수한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군사망사고규명위)는 그해 11월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1년 5개월 만인 2022년 4월, 방성률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의 퍼즐을 다시 맞출 수 있게 됐다.
1995년 3월 14일 제102보충대로 입대한 방성률은, 신병교육 훈련을 마치고 5월 7일 제12사단 52연대 전투지원중대 탐지소대에 청음병으로 전입했다. 나흘 뒤인 11일부터 을지포 소초로 파견돼 근무를 시작했다. 그곳은 병사들 사이에 악명이 자자한 곳이었다.
을지포 소초가 다른 소초보다 특히 가혹행위와 구타가 심했으며, (…) 당시 저도 같은 처지라서 (방성률이) 자살한 이유에 대해 깊이 공감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청음반 신병은 책 두 권 분량의 암기자료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도록 외워야 했는데 못 외우거나 틀리면 선임병으로부터 어김없이 구타를 당해야 했습니다.(탐지소대 부대원 지○○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오리걸음으로 산에 오르기”, “봉분(탐지공이 묻힌 뭉툭한 지형)에서 머리 박고 내려오기” 등 여러 가지 얼차려나 구타를 당했는데, 이러한 야만스러운 군대 문화를 고립된 곳에서 겪으며 우울증이 올 것 같았습니다. 법대생인 망인(방성률)도 저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많은 자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탐지소대 선임병 남재영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가명)
매일같이 암기 테스트를 해서, 통과하지 못하면 혹독한 질책이 돌아왔다. 사방에 지뢰가 묻혀 있는 최전방 산악지역. 그곳에서 무거운 전선을 메고 다니며 탐지장비 점검과 보수 등 ‘노가다’ 작업도 많이 했다. 작업 중에도 구타와 가혹행위가 일어났다. 인원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당시 정원은 6명이었지만, 4명이 2인 1조로 3시간씩 2교대 근무를 이어갔다.
고립된 곳에서 소수의 병사들끼리만 생활하면서, 야외화장실을 갈 때도 항상 고참과 2인 1조로 다닐 정도로 사생활이 없었다. 고참들의 눈을 피해 어딘가 하소연할 기회도 없었다.
이준형(가명) 상병은 사단장 운전병으로 있다가 낙하산으로 탐지소대에 전입한 고참으로 성격이 까칠해 후임병들을 힘들게 하였는데, 심한 구타를 하지는 않았으나 후임병들에게 “야, 이 개×끼야, 똑바로 못해”라는 등 심한 폭언을 많이 하고 늘 큰소리로 욕을 하여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습니다.(선임병 일병 김수철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가명)
을지포 소초에 파견된 지 약 40일이 지난 1995년 6월 21일, 방성률은 본부소대로 복귀한다. 이유는 ‘복무 부적응’. 6월 30일에는 중대장과 따로 면담도 했다. 방성률이 보내는 ‘위험신호’를 병사들은 모두 느끼고 있었다. 그를 PX로 데려가 간식을 사주며 위로했던 선임병도 있었고, 그를 을지포 소초로 복귀시키면 안 된다고 청원한 선임병도 있었다.
(저도) 을지소초에서 청음병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후임병인 망인(방성률)이 무슨 일을 겪는지 잘 알고 있어 위로를 해주었는데 망인이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였음. (…) 소대장에게 ‘방성률 이병이 매우 불안해하니 을지소초로 복귀시키면 안 될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소대장도 다른 소초로 보내겠다고 한 것으로 기억함.(선임병 남재영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가명)
하필 이때 선임병 이준형(가명) 또한 다른 일로 본부소대에 내려와 여러 날을 함께 지냈다. 방성률의 가족들이 그를 면회한 것도 바로 이때.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내무반에 선물을 주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고 도채숙은 묘한 낌새를 맡았다.
1995년 7월 3일 또 한 차례 중대장 면담이 이뤄졌다. 방성률을 을지포 소초로 보내면 안 된다는 선임병의 보고도 있었고, 중대장의 직접 면담도 두 차례나 있었지만, 7월 6일 방성률은 을지포 소초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7월 7일은 그의 인생 마지막 날이 됐다.
약 한 달이 지난 8월 2일, 선임병 이준형(가명)은 ‘가혹행위’ 사유로 영창 14일의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훗날 군사망사고규명위 조사 과정에서, 방성률을 괴롭힌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구타나 가혹행위가 아예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최전방에서 실탄을 소지하고 근무했기 때문에 후방 부대보다는 덜한 편이었습니다. (…) 엉덩이를 야전삽의 둥근 부분으로 가볍게 치며 재촉하는 정도 (…) (징계는) 제가 실제 망인(방성률)에게 가혹행위를 하여 받은 것이 아니라 분대장이란 직책 때문에 받은 것입니다.(선임병 이준형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가명)
당시 기록에도 방성률의 사망 원인은 가혹행위가 아니라고 남아 있다. “내성적인 성격과 지병(고혈압, 중이염, 당뇨병)으로 인한 군 복무 미적응”이 직접 원인이라는 것. 하지만 훗날 군사망사고규명위가 부대원들을 직접 조사한 결과, 단 한 명을 제외한 부대원들은 ‘방성률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일관되게 말했다. 진술이 다른 단 한 명은 이준형(가명)뿐이었다.
방성률을 을지포 소초로 돌려보내면 안 된다고 보고했던 선임병 남재영(가명)은, 사건 이후 군 수사기관에 진술서를 써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보고가 왜 묵살됐는지 군은 더 이상 알아보지 않았다. 그저 개인의 성격과 나약함 탓으로 수사는 끝났다. 심지어 당시 사건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가 있었지만, 당시 수사 기록에는 목격자의 존재를 지워버렸다.
부대 적응에 힘들어하는 망인(방성률)이 애틋하여 단둘이 있을 때 편하게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해주고, 망인에게 컵라면을 먹이고 싶어 관물대에서 라면을 꺼내 돌아가던 중, 청음실에서 갑자기 뛰쳐나온 망인이 상황실 책상 위에 있던 무언가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뒤쫓아 나갔습니다.
앞서 뛰던 망인이 바위가 있는 공터에 멈춰서서 “개×끼야, 죽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라고 하면서 눈을 마주쳤는데 눈에 살기가 있었습니다. (…) 뒤에서 ‘펑’ 하는 폭음이 들려 주저앉으며 뒤돌아보니 망인의 신체가 공중으로 떴다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망인이 저를 해치려면 충분히 해칠 수 있었음에도 서로 고생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배려한 것 같았습니다.(선임병 일병 김수철 군사망사고규명위 진술, 가명)
2022년 4월 군사망사고규명위는 방성률 사망의 원인이 당시 기록과 달리 “선임병의 구타와 가혹행위와 지휘관의 허술한 부대 관리·감독”이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국방부에 방성률의 사망 구분을 ‘일반사망’에서 ‘순직’으로 재심사할 것을 요청했다. 그해 11월 29일 국방부가 보낸 ‘순직확인서’가 집으로 배달됐다. 아들이 죽은 지 1만 하고도 8일이 더 지나서였다.
“28년 만에, 죽었던 자식이 살아났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나라에서 (불명예를) 다 벗겨줬으니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됐다는 걸 밝혀줬으니까, 지(아들)가 마음 편하게 안 가겠나. 자기도 억울한 게 있겠지만 늦게나마 지도 마음 풀고 편히 안 가겠나….”(도채숙)
도채숙은 그제서야 남편에게 사실을 알렸다. 순직 확인과 함께 사망보상금도 지급됐다. 세상 어느 부모가 그 돈을 함부로 쓸 수 있겠나. 방성률에게는 두 명의 조카가 있다. 고민 끝에 그 돈은 조카의 대학 등록금으로 쓰기로 했다. 삼촌은 2주밖에 다니지 못한 대학. 조카들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삼촌은 죽은 지 28년이 지나 조카들의 ‘키다리 아저씨’가 됐다.
“(방성률의) 질녀(조카)가 둘인데, 걔들은 (삼촌에 대해서) 일절 모릅니다. 말을 안 해서. 불문율같이, 삼촌 이야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진상규명 이후에) 이제는 손녀(방성률에게는 조카)가 ‘할머니, 삼촌 사진 있어요?’ 이렇게 물어요. 내가 ‘너희 삼촌은 나라를 위해서 군에 가서 돌아가셨으니 훌륭한 분이다’ 이제는 그렇게 이야기하잖아.”(도채숙)
두 시간 남짓 이어진 인터뷰가 끝났다. 나란히 앉아 있지만, 어머니 도채숙과 아버지 방근태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이제야 한을 풀게 됐다고 한결 다행스럽고 홀가분하게 이야기하는 도채숙에 비해, 방근태의 말에는 여전히 긴장과 조심스러움이 숨어 있었다.
그 이유는 며칠 뒤에 알게 됐다. 어느 날 오후 방근태로부터 온 전화. 인터뷰 때는 마음이 아파서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잊을 수도 간직할 수도 없었던 1995년 그날의 기억에 대해 털어놨다. 그의 말이 꼭 긴 독백처럼 들렸다.
“시신을 봤어요. 안 볼 수 없죠. 확인을 하라고 했으니까. 보고 나서 후회스럽더라고. 유골을 화장해서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하는데 내가 막 쇼크가 오더라고. 왜 그걸 못 이겨내고 그랬나 (아들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또 내 자신도 원망스러웠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건) 도저히 내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나중에 내가 죽고 나서 영혼이 있다면 만나서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안 될 일이다. 그러니 빨리 포기하는 게 집사람도 살리고 가정도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날 본) 아들 시신 얼굴이 자꾸 생각나요. 자꾸 잊어버리려고 해도. 아들을 생각하면 그 얼굴부터 눈앞에 보이고…. 몇 년 뒤에 나도 큰 병에 걸려가지고 치료도 하고 수술도 하고 여러 가지 병을 가지고 살았어요. 어떻게든 잊어보려고 지금까지 살아왔어요.
진실을 못 보고 나도 죽는다 생각했는데,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기적이 생겨서 참 기쁩니다. 이제 아들 얼굴이 험한 모습이 아니라 밝은 얼굴로 나한테 다가와요. 웃는 모습으로 점점점 나한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아마 죽은 아들도 이제 기쁘게 가지 않았을까.
나도 이제 죽은 아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되지 않겠나, 그래서 마음이 긍정적으로 돌아왔어요.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마음속에 맺힌 것이 금세 없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내 마음도 풀리네요. 이제 내가 건강하게 잘 살 것 같아요.”(방근태)
그의 독백은 나를 향한 것 같기도 하고, 그의 가슴에 묻은 아들을 향한 것 같기도 했다.
하루아침에 아들을 떠나보내고, 진실을 밝히는 일조차 단념해야 했던 아버지.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죽은 아들의 얼굴이, 평생 그의 마음을 가시처럼 찔러오진 않았을까. 이제야 기적처럼 찾아온 진실의 힘으로, 아버지는 아들의 웃는 얼굴을 본다. 부르지 못한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28년간 오해의 장막 속에 가려져 있던, ‘그날’ 아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지난 4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육군 이병 방성률’의 위패가 안장됐다. 다시는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세 글자.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 밖으로 아들의 이름이 살아 돌아왔다.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 이 기사는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2023년 9월 13일 발간 예정인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5년 종합활동보고서 피해사례집’에 수록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