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동안 한집에 살고 있는 50대 중년 부부가 있다. 부부는 빌라 테라스에 작은 텃밭을 꾸몄다. 함께 과일나무와 채소를 기르고, 손을 꼭 잡고 시장에 간다. 배우자로서 서로 돌봄과 책임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2003년 11월에는 마주 앉아 혼인신고서를 썼다. 이들이 가족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부부는 혼인신고서를 미처 접수하지 못했다. 액자에 걸어 간직하고 있을 뿐. 거실에 부부의 첫 제주도 여행 사진이 붙어 있다. 야자수 앞, 어깨를 겹쳐 다정하게 선 두 남자의 앳된 얼굴이 미소 짓고 있다.

두 남자의 이름은 천정남(53), 유승정(55)이다. 정남은 서울 종로구에서 퀴어 바 ‘프렌즈’를 20년째 운영 중이다. 승정은 금융권에 종사하다가 최근 서울시 중장년 재취업 컨설턴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9일 천정남(53) 씨가 본인이 운영하는 바 ‘프렌즈’에서 셜록과 인터뷰하고 있다 ⓒ셜록

부부는 2001년에 만나 1년 만에 살림을 합쳤다. 그렇게 지낸 세월이 벌써 22년이다. 정남과 승정은 화려한 결혼식이나 이벤트 없이 소박하게 살아왔다. 결혼식 대신 구청에서 혼인신고서를 가져와 빈칸을 채우고 벽 한편에 걸었다. 이들만의 약속인 셈이다.

“구청 접수용은 아니었고 그냥 우리 둘 사이에 서로 약속 같은 개념이었어요. 물론 저희가 혼인은 법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서로의 약속이었던 거고, 그래서 혼인신고서를 가져와서 작성하고 증인까지 서명해서 집에 보관하고 있는 용도였죠.”

법적 혼인 관계가 될 수 없는 정남과 승정. 이들에게 ‘혼인평등법’이 필요했던 순간은 대부분 위기를 마주했던 기억이다. 위기의 순간들은 부부에게 차별로 다가왔다.

“차별을 사실 많이 느끼는데, 이성애자들은 사귄 지 한 달 만에 결혼하고, 혼인신고를 하고 그 기간이 합쳐서 3개월이라도 어디를 가나 부부로 인정받고, 합당한 권리를 받잖아요. 저희는 오랫동안 부부로 생활을 같이하고 있어도 아무런 법적 권리를 누릴 수가 없거든요.”

천정남(왼쪽, 53) 씨와 유승정(오른쪽, 55) 씨는 2001년도에 처음 만나 23년째 부부로 함께 살고 있다 ⓒ천정남

10년 전, 정남은 큰 수술을 받게 됐다. 하지만 수술 동의서 보호자 서명란에 승정의 이름을 적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법적인 가족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저는 원가족이 경상도에 살고 있고, 수술한다는 걸 어머니께 알리기 그렇더라고요. 너무 걱정하지 않을까 싶어서…. 저는 같이 살고 있는 제 배우자가 있는데 아무리 설명해도 병원 측에서는 무조건 법적인 가족만 서명이 가능하다고 하니까, 결국에는 누나가 병원이랑 전화해서 (수술 동의) 했었거든요.”

생로병사는 누구나 피해갈 수 없다. 혼인 관계, 사실혼 관계도 아닌 법적인 ‘남’인 정남과 승정은 나이를 먹을수록 돌봄과 책임에 걱정이 많아진다.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법적으로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면회할 수가 없고, 지금의 법으로는 우리는 부부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 사람의 장례를 치를 수도 없어요.”

부부의 휴대전화 연락처 목록에는 서로의 가장 가까운 형제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다. 지갑에는 배우자의 연락처를 적은 쪽지를 늘 가지고 다닌다. 만일의 경우 정남과 승정이 서로를 지키기 위한 장치다. 이들은 배우자가 혼자 길을 걷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배우자의 신변에 대한 연락을 받을 수 없고, 수술 동의를 해줄 수 있는 법적 보호자도 될 수 없다.

“이성애자 부부들은 그럴 때 먼저 연락이 가잖아요. 근데 저는 그걸 연락할 길이 없으니까…. 재작년에 우리 배우자가 정말 응급실에 한번 실려간 적이 있었거든요. 집에서 쓰러져서 다행히 제가 119를 불렀지만 만약에 출근하는 길에 쓰러졌다거나 그런 경우였으면, 제가 없었으면 저한테 연락이 오질 않죠.”

건강 문제뿐만 아니라, 부부는 20년 동안 공동재산을 모았지만 서로 상속의 권리를 가질 수 없다. 국민연금, 건강보험, 일반 보험까지 수혜자가 되지 못한다. 법적 혼인 관계가 아니기에 발생하는 문제는 무궁무진하다.

지난 5월 31일 가족구성권 3법 발의 기자회견 ⓒ장혜영 페이스북

지난 5월 31일 장혜영 국회의원(정의당, 비례대표)은 ‘가족구성권 3법’을 대표발의 했다. 3법은 바로 혼인평등법, 생활동반자법, 비혼출산지원법.

혼인평등법은 한마디로 동성혼 법제화 내용을 담은 법안이다. 민법상 동성 간 혼인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없음에도 동성 간 혼인이 제한되고 있는 게 현실. 혼인평등법은 혼인의 성립을 이성 또는 ‘동성’의 당사자 쌍방의 신고에 따라 성립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부부’와 ‘부모’에도 동성 부부 및 부모가 포함된다.

드디어 동성혼 법제화 추진의 첫 발을 뗀 것. 정남은 걱정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법안 통과가) 참 험난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평등의 관점으로 결국 동성혼 법제화를 우리가 얻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과거에 생각했을 때는 법안 발의뿐만 아니라, 법제화까지도 이미 10년 전쯤에 될 거라고 했었는데, 지금에라도 어쨌거나 법안이 발의되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좋았죠.”

동성혼 법제화는 말 그대로 이성애자의 권리를 성소수자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 누구의 권리를 빼앗거나 축소하지 않는다. 왜 반대 세력은 여전히 존재하는 걸까.

“많은 분들이 동성혼 법제화가 되면 큰일이 날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들(이성애자)의 삶에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어요. 손해 보는 것도, 내놔야 하는 것도, 해가 되는 것도 없고, 그냥 누군가는 당연하게 누리던 것을, 누리지 못하던 어떤 그룹들도 함께 누리게 되는 것뿐이거든요.

그래서 솔직히 격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냥 단순히 싫은 거죠. 혐오. 근데 그건 개인의 생각이죠. 나의 권리가 소중한 만큼 나와 다른 타인의 권리도 소중하잖아요.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당연히 (동성혼 법제화가) 수용돼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정남에게 양해를 구하고 식상한 질문을 던졌다.

“혼인평등법이 시행된다면, 첫날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정남은 식상한 질문에 당연한 대답을 내놨다.

“구청에 혼인 신고하러 가야겠죠. 아마 기념일이 하나 또 생기겠죠. 우리가 법적으로 부부가 된 날.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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