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원해서 입학한 사례가 거의 없는 만큼 공업고등학교의 아이들은 어떻게든 빨리 학교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공고 교복이 낙인이 되어 “꼴통”이니 “공돌이”니 하는 모욕의 수근거림을 몇 번씩 들으며 학교를 다녔으니, 그 심정도 이해된다.
하지만 무슨 마음인지 아이들은 졸업 후엔 공고를 그리워하며 꼭 한 번 쯤 학교를 찾아온다. 대개는 한두 번으로 그치지만, 인연이 길게 이어져 술친구처럼 지내는 제자도 더러 있다. 강정훈(가명)은 후자에 속하는데, 최근에도 연락이 왔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저랑 선우(가명)랑 찾아뵐라 카는데요.”
“오~ 정훈이 오랜만이네. 근데, 느그 또 술 먹고 싶어서 전화했나?”
정훈이는 속내를 말하지 않았다. 술집에서 마주 앉아서도 한동안 그랬다. 정훈이와 선우는 두 손으로 받은 술을 90도 이상 고개를 돌려 천천히 마시고, 공손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샘, 어서 드세요.”
녀석들은 내가 먼저 안주를 먹기 전까지 젓가락을 드는 법이 없다. 편하게 하자고 해도 어디선가 배우고 익힌 자신들만의 예의와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다.
“선생님, 저 벌써 28살이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얘가 왜 이러나 싶어 나는 술을 들이켜고 정훈이를 빤히 바라봤다. 표정을 보니 돈이 궁해 찾아온 건 아닌 건 분명했다. 괜히 어색해질까 봐 내가 크게 말했다.
“뭐라카노! 니 때문에 샘이 얼마나 학교생활 편하게 했는데. 하하하.“
정훈이는 나만큼 웃지 않았다. 내 머릿속처럼 녀석의 내면에서도 여러 기억이 밀려오는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정훈이의 학교생활과 녀석과 관계된 나의 교직생활은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 시절, 큰 파도가 우리를 수시로 덮쳤고 그 중 몇 번은 쓰나미처럼 거대했다.
짧은 머리에 팽팽한 피부, 넓은 어깨를 가진 정훈이는 외모처럼 단단한 믿음을 주는 아이었다. 약 10년 전 공고에서 처음으로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나는 정훈이의 리더십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실에서 아이들끼리 분쟁이 생기면 정훈이는 화해와 중재자로 나섰다. 교사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공고생들의 내밀한 고민을 알려주는가 하면, 학생-교사의 갈등이 벌어지면 큰 사고(?)나 징계 사태로 이어지지 않도록 신통한 능력도 발휘했다.
친구들 내면의 불만과 분노를 잘 이해하고 풀어주는 아이, 그게 정훈이었다. 누가 봐도 리더십은 좋으나 성적은 바닥인 아이, 그 역시 정훈이었다.
공고에서 성적이 뭐가 중요하냐고 하겠지만, 공고도 대한민국 고등학교다. 모든 아이는 1등과 꼴등으로 분류되고, 등급이 매겨진다. 결국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대기업 취업 우선권이 주어진다. 공고에서도 성적은 성공의 중요한 열쇠 중 하나다.
드디어 취업 시즌이 시작되었다. 마침, 학교의 취업 담당 부서에서 좋은 회사에 대한 안내가 왔다.
‘○○기업(대기업), 연봉 2800만 원 전후, 채용 인원 4명, 군 제대 후 근무 가능, 학과 무관, 학반별 2명씩 추천 바람.’
좋은 회사가 분명했다. 당시 우리학교 3학년은 총 19개 반. 두 명씩 추천이니 총 38명이 경쟁한다는 의미다. 나는 이 회사에 우리 반 아이 두 명을 꼭 보내겠다는 결심으로 작전을 짰다.
공부를 가장 잘하는 성수(가명)와 리더십이 좋은 정훈이를 우리반 대표로 추천했다. 자격증 4개, 성적 1등, 각종 수상 등 화려한 스펙의 성수와 달리 정훈이는 내세울 만한 이력이 없었다.
탈락 확률이 높았지만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정훈이의 성실성, 책임감 등을 알아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두 학생을 추천했는데, 얼마 뒤 취업 담당 교사에게 전화가 왔다.
“지 선생님, 산학협력부에 좀 오십시오. 부장님이 찾으십니다.”
“네? 혹시 무슨 일이 있나요?”
“일단 와보셔요.“
학생들 취업을 담당하는 산학협력부는 공고에서 힘이 센 핵심 부서다. 담임 교사가 맞춤형 인재를 추천해야 산학협력부는 기업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이런 신뢰가 무너지면 아이들 취업에 문제가 생긴다. 그런 부서의 책임자에게 호출되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지 선생, 니 정훈이를 와 추천했노?’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학기 초부터 있었던 수많은 일과 정훈이의 활약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야말로 ’세상에 이렇게 좋은 아이가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됐고! 이거나 보고 말해봐라!”
부장님은 서류 한 장을 내밀며 내 말을 끊었다. 흰 서류를 보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강정훈. 1학년 무단결석 56일, 2학년 무단결석 58일’
“지 선생, 니 정신이 있나 없나? 뭐 이런 아(아이)를 추천해가지고, 학교 엿 먹일 일 있나!”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학생을 추천해보겠습니다.”
“그래. 야는 제일 마지막에, 아들 다 보내고 나면 그때 보내라. 이런 아들은 (좋은 회사 보내봤자) 보나마나 바로 튀 나온다.”
이럴 수가. 다른 아이도 아니고 정훈이가 2년 연속 무단결석을 50일 넘게 했다니.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현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학생은 진급(학년이 올라가는 것)을 하려면 기본 출석을 채워야 한다. 결석 60일이 넘으면 유급, 같은 학년을 다시 다녀야 한다는 뜻이다. 능숙한(?) 교사들은 무단결석이 잦은 아이들에게 자퇴를 권유하곤 한다.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주거나, 학교의 골칫덩이가 되기 전에 그 싹을 자르는 것이다. 정훈이처럼 무단결석이 50일이 넘는 아이는 공고에서조차도 문제아로 찍혔을 가능성이 높다.
종례를 마치자 정훈이는 웃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내게 다가왔다.
“선생님, 어떻게 됐어요? 저 대기업 면접 준비하면 되죠?”
정훈이의 미소가 이전과 다르게 보였다. 정말 서류 전형 통과를 자신하는 건지, 출결 엉망이라는 과거 이력을 끝까지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마음에서 화가 일었다.
공고 취업에서 성적만큼 중요한 것이 출결 사항이다. 인성, 태도, 성실 등에 연결된 지표이기 때문이다. 지병이나 개인 사정으로 출결 사항이 안 좋은 학생이 있으면, 학기 초에 담임교사에게 모두 인수인계가 된다. 하지만, 정훈이 관련 정보는 내게 전달되지 않았다. 나는 이전 담임 교사를 찾아갔다.
“아, 정훈이… 좋지, 좋은 애지. 그래서 내가 안 잘랐어. 언젠가는 정신 차릴 거 같아서. 근데 걔가 학교는 잘 안 왔어. 무단결석 60일이 넘으면 정리해야 되는데, 정훈이는 넘지는 않더라고. 벌점 줘서 퇴학시킬 수도 있었는데, 정훈이는 말썽도 많이 부리지 않아서 내가 진급시켰지.”
1, 2학년 모두 정훈이의 무단결석은 60일 언저리에서 멈췄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선도위원회를 열어 정훈이를 학교에서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정훈이도 학교도, 최악으로 가지 않도록 서로 노력했다는 의미다.
나는 정훈이에게 운동장을 좀 걷자고 했다.
“정훈아, 너 이번에 ○○기업 힘들 것 같다.“
“아, 왜요?”
“니 정말 몰라서 묻나? 1, 2학년 때 정말 어떻게 산 거고?”
화가 났다. 가장 믿었던 아이가 사실은 심각한 문제 학생이었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꼈다. 좋은 기업 취직도 물 건너갔으니 더 속이 상했다.
“그냥 1, 2학년 때는 학교가 다 싫었어요. 재미도 없고, 만날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따분한 수업 견디기도 힘들고… 그래서 학교에 안 왔습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운동을 걷다가 정훈이에게 물었다.
“그러면 지금은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그거 다 가식이었나?”
정훈이는 불쾌했는지 따지듯 말했다.
“대충 살고 싶었고, 막 살려고 했습니다! 근데, 샘이 학기 초에 지각하면 집에 가서 벨 누르고 같이 학교 데리고 간다 카고, 학교 안 오면 동네 다 디비서(뒤져서) 찾으러 다닌다 카고 했잖아요! 집에서 자다가 눈 떴는데 샘이 딱 서 있고, 개처럼 끌려서 학교 오면 짜증나잖아요! 그래서 귀찮아도 학교에 왔어요. 그랬더니 도서부장도 시켜주고… 칭찬도 해주고….“
앞서 말한 대로, 원해서 공고에 온 아이는 없다. 중학교 성적이 안 좋은 아이들이 우리 학교에 온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아이만을 탓할 수도 없다. 어려운 가정환경, 부모의 돌봄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 당장 학교 갈 차비를 걱정해야 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우리 학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공부에 집중하기 어렵고, 학창 시절을 마냥 즐길 수도 없는 아이들. 공고에서 일한 지 어느덧 10여 년, 자퇴나 퇴학 등으로 학교를 떠나는 아이가 40명을 넘긴 해도 있다.
네 명이 아닌 40명. 나는 이 수치가 무섭고 마음 아프다. 학교를 떠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 게 슬프다. 가난해서, 부모가 없어서, 돌봄을 받지 못해서 공고에 왔는데, 여기서마저 나간다면 도대체 아이들은 어디로 간단 말인가.
이런 아이들일수록 학교가 필요하다. 그래도 학교는 거리보다 안전하고, 교사가 있고, 친구들이 있으니 말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그래도 학교는 와야 한다”, “힘들어도 학교는 다니자”고 닦달하는 이유다. 정훈이 이전 담임 교사도 이런 마음으로 퇴학 카드를 꺼내지 않았던 거다.
정훈이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취업 부서 부장님을 찾아갔다.
“부장님, 정훈이가 문제아였던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일탈 한 번 안 해보고 어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정훈이가 1,2학년 때 출결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3학년 되어서는 지각, 조퇴, 결석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좀….“
“지 선생, 일단 알겠는데, 그래도 이런 아를 추천하면 뽑히겠나? 너무 기대는 하지 마레이.”
학교 자체 면접 통과를 위해 나는 특별 교육에 들어갔다. 자기소개서 수정, 면접 연섭, 발표 등을 반복시켰다. 정훈이는 1차 관문인 학교 경쟁을 통과했다. 곧바로 회사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해당 회사 사장님께 자필 편지를 썼다.
“○○회사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귀사에 입사를 지원한 학생의 담임 교사입니다. 제가 펜을 든 이유는…(후략).”
서류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말고, 꼭 아이를 만난 뒤에 결정해 달라는 내용으로 A4 두 장을 채웠다. 정훈이도 많이 노력했다. 회사는 정훈이를 채용했다.
정훈이의 합격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비록 1, 2학년 때 방황을 했더라도, 마음을 잡으면 좋은 쪽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사례였다. 하지만 감동 스토리는 여기까지.
정훈이는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을 금방 그만두고 학교로 돌아왔다. 정훈이를 지원한 학교는 물론이고, 담임인 나는 그야말로 난처한 처지가 됐다. 그 자리를 원했던 다른 학생에게도 미안했다. 취업 부장님은 “지 선생, 봐라… 내가 안 된다고 했지?”하는 눈길로 날 바라봤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왜 퇴사했는지 정훈이에게 물었다.
“날마다 공장에서 단순 작업 하는 게 재미없고 견딜 수가 없더라구요. 이 일을 평생한다고 생각하니 눈앞도 캄캄 했구요.”
더는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공고생이라고 왜 취향과 적성이 없겠는가. 대기업이라고 누구에게나 다 좋은 건 아니다. 정훈이는 요리를 하고 싶다고 했다.
얼마 뒤 ‘자랑스런 동문’이 학교를 방문했다. 시내에서 큰 횟집을 운영하는 분이다. 외고, 과학고, 자사고의 자랑스런 선배는 의사-변호사-판검사일지 모르나, 내가 일하는 공고의 성공 케이스는 대개가 자영업 사장님이다.
자랑스런 동문 사장님은 후배를 채용하겠다고 했다. 정훈이는 선배님이 운영하는 횟집에 취업했다. 정훈이는 아침 조회 시간마다 영상 통화로 근황을 전했는데, 어느 날은 망치를 들고 나타났다.
“샘, 대방어 잡는 거 보여드릴까요? 대방어는 망치로 대가리를 쳐서 죽여삐는데요. 지금 제가 망치로 치는 거 보여드릴게요.”
“정훈아! 아니다, 됐다! 샘도 대방어 잡는 거 많이 봤다. 하지 마라.”
어느 아침에는 날카로운 긴 회칼을 들고 화면에 나타났다.
“샘, 내가 이 ‘사시미 칼’로 오이 써는 거 보여드릴까요?”
정훈이는 곧바로 오이 써는 시범을 보였다. 나는 교실에서 정훈에게 박수를 보냈다. 정훈이는 화면 너머에서 미소를 지었다.
시내를 걷다 보면, 건장한 청년들이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일 때가 많다. 나를 알아보는 왕년의 내 제자들이다. 오토바이로 음식을 배달하거나, 고깃집에서 숯불을 피우거나, 택배를 나르고 있거나…
공부를 잘한 학생들은 서울로, 대도시로, 외국으로 떠난다지만 공고를 졸업한 나의 제자들은 내 주변에서 이웃으로 살고 있다. 부끄럽거나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 못난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한 시절 제자였고 오랜 시간 이웃으로 살아가는 이들 덕에 나는 일상을 꾸리고 있다.
정훈이는 술자리가 마무리 될 즈음에야 연락한 이유를 말했다.
“선생님, 저 결혼합니다.”
술자리를 파하고 제자의 청첩장을 들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거리에서 또 다시 누군가가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오른손 한 번 흔드는 걸로 화답했다. 집으로 가는 길이 괜히 편안하게 느껴졌다.
정훈이는 지금 대형 횟집 중간관리자로 일한다. 녀석은 원했던 일을 하고 있다.
글 지한구 교사 longlong19@hanmail.net
그래픽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