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씨’는 품사 동사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레즈비언 퀴어 부부가 운영하는 퀴어 페미니즘 출판사 이름. 지난 6월 열린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김건희 여사가 레즈비언 작가의 책을 샀던 그곳이다.
작은 글쓰기 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강사 노유다(42)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던 나낮잠(45)은 움직씨 출판사를 단둘이서 운영하고 있다. 15년째 부부로 같이 살고, 8년째 동료로 같이 일하는 중이다.
낮잠과 유다는 평소에 손을 잡고 다니진 않아도 주변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집에 사는 짧은 머리에 얼굴이 닮은 두 여성. 커플티를 입지 않아도 동네에서 눈에 띄는 사람들이 됐다.
“저희가 40대라서 손을 잡을 때도 있고 안 잡을 때도 있는데, 스킨십이 잦은 커플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관리사무소나 이런 곳에서 ‘두 사람은 자매냐’는, 굳이 듣지 않아도 될 호구조사를 받고는 있어요”(유다)
언뜻 보면 자매로 오해할 수 있을 법했다. 둘은 많이 닮았다. 자매냐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할까.
“’동거인입니다’라고 하죠. 동거인까지 얘기하면 더 이상 안 물어보시는 것 같아요. ‘가족입니다’라고도 얘기를 했고요. 좀 아쉽죠. ‘부부입니다’라고는 아직 생활반경 내에서는 얘기 안 하고요.”(유다)
그래서 부부가 선택한 단어는 ‘가족’이다. 낮잠과 유다가 부부라고 말하기 힘든 순간에는 넓은 의미로 가족이라는 말을 골라 쓴다.
“가족에 되게 다양한 맥락이 들어 있잖아요. 굳이 ‘자매예요’ 이런 얘기는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우리 정체성을 숨기거나 덮는 행위는 (둘이) 함께한 15년 기간에는 없었던 것 같거든요. 다만, ‘(부부라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야 할까?’, ‘그 정보가 저 사람한테 큰 의미가 있는 걸까’에 대한 고민을 하죠.”(유다)
낮잠과 유다가 부부라고 당당히 밝히는 자리는 오히려 ‘대외적인 장소’였다. 다른 출판사와 미팅을 할 때, 도서전에서 독자들을 만날 때는 ‘퀴어 출판사 움직씨’라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심지어 김건희 여사가 방문했던 2023 서울국제도서전에는 ‘레즈비언 만화방’이라는 판넬을 설치했다.
“도서전에 나가는 게 저희가 제일 반복적으로 자주 하는 일인데요. 저희가 같이 있으면 ‘움직씨’를 아시는 분들은 당연히 부부로 반응하시고, 또 옆에 ‘레즈비언 만화방’이라고 적혀 있고, ‘퀴어 출판사 움직씨’라고 외치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아시는 분들도 계세요.”(유다)
다만, 출판업계 모두가 성소수자에게 우호적인 편은 아니었다. 부부가 독립출판사를 공동 운영하는 건 흔한 일이다. 다른 출판사와 미팅을 할 때, 낮잠과 유다는 종종 부부가 아닌 친구로 여겨진다.
“‘두 분은 친구세요? 동업하세요?’ 이렇게 물어보시는 경우가 좀 있어요. 그러면 ‘저희도 부부예요’라고 얘기를 하고요.”(유다)
부부라고 커밍아웃 하면, 상대방의 반응은 다양했다.
“(부부라고 밝힌) 이후로 (상대방이) 말이 없어지거나 하면 괜히 신경 쓰이고….”(낮잠)
“때로는 ‘멋지다, 세상 변했다’ 이렇게 얘기하시거든요. 커밍아웃 하는 것 자체가 그분들한테 굉장히 신선한 이슈여서 ‘그래, 많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얘기해야 해’라는 식으로 멋지다는 표현을 좀 하시죠.”(유다)
낮잠과 유다는 2007년에 처음 만났다. 이들은 15년 동안 함께 살고, 8년째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그래도 세상이 희망적인 방향으로 변한다고 느낀다. SNS를 중심으로 성소수자 부부에 대한 소식들이 빠르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한편 SNS상에서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메시지의 수위도 높아졌다.
“(사회적으로) 퇴보한 지점으로 생각하는 게 ‘혐오 발언’인 것 같아요. SNS상에서 저희 움직씨 출판사도 ‘역겹다’는 얘기까지 들어봤거든요. 혐오 발언의 수위가 굉장히 높다는 생각도 좀 들고요. 심도 있는 어떤 고민이 담겨 있다기보다는 막말이나 욕설 이런 것들이 좀 많이 흘러넘치고 있지 않나….”
움직씨 출판사를 향한 ‘역겹다’는 말. 낮잠과 유다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느꼈다. 부부는 경찰서로 향했다. 하지만 경찰의 대처는 실망이었다.
“경찰들은 ‘들을 수 있는 얘기지 않냐, 객관적인 얘기지 않냐’는 식으로 반응하더라고요. ‘레즈비언이라고 하면 사회적으로 조금 안 좋게 보이잖아요’라고, 대답한다든가…. 커밍아웃 했기 때문에 저희가 겪은 일들이었죠.”(유다)
낮잠과 유다는 퀴어,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조금 안 좋게 보이는’ 사람들인가. 성소수자를 위한 법과 제도가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들 부부는 최근 혼인평등법 발의 소식에 혐오 표현이 줄어들 거라는 기대를 걸었다.
지난 5월 31일 장혜영 국회의원(정의당, 비례대표)은 ‘가족구성권 3법’을 대표발의 했다. 3법은 바로 혼인평등법, 생활동반자법, 비혼출산지원법. 민법상 동성 간 혼인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없음에도 동성 간 혼인이 제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혼인평등법은 혼인의 성립을 이성 또는 ‘동성’의 당사자 쌍방의 신고에 따라 성립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민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부부’와 ‘부모’에도 동성 부부 및 부모가 포함된다.
“기본적으로 법적인 부분이 개정되면 사람들의 인식 변화라는 게 당연히 수반될 수밖에 없고, 저희가 고민하는 혐오 발언, 혐오 범죄가 많이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를 나눈 적 있어요.”(유다)
누군가에게 혐오 받아도, 낮잠과 유다는 커밍아웃을 후회하지 않는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성취이자, 행복이기 때문이다.
“커밍아웃, 결혼. 이 모든 과정이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성취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만약 인생을 돌아봐도 후회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화두였어요. 가족이 생긴 것, 그리고 내 가족이 인생을 지지해주는 것. 응원해 주고, 서로 보듬고, 보살피고, 사랑을 나누는. 이것만큼 삶에서 중요한 성취가 없다고 느끼고 있거든요.
왜냐하면 저희는 취약하기 때문에. 레즈비언이면서 퀴어이고, 어쩔 땐 논바이너리(남성과 여성을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이고.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취약해진 우리 자신을 보호할 때 그런 생각이 들어요. ‘혼자였으면 이걸 어떻게 감당했지? 우리는 둘이었기 때문에 이 순간들을 견딜 수 있었어.’ 우리가 이 취약한 세상에서 사랑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건조한가.”(유다)
낮잠과 유다는 구청에서 혼인신고서 양식 한 장을 챙겨왔다. 빈칸은 아직 채우지 않았다. 혼인평등법이 시행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깨끗한 혼인신고서를 보관하고 있다. 부부는 곧 동성혼 법제화가 이뤄질 거라고 기대한다. 빨리 구청에 뛰어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낮잠이 좋아하는 오징어볶음을 앞에 놓고 막걸릿잔을 부딪치며 기쁨을 나누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