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무실 문은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70세는 훌쩍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바닥을 보며 들어왔다.
“여기 중원이(가명) 담임 선생님 계십니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과 달리 목소리는 쩌렁쩌렁 컸다. 교실 4개를 합친 크기의 교무실에 있던 교사 약 70명의 눈길이 일제히 할머니에게 쏠렸다. 할머니는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다시 한 번 외쳤다.
“우리 중원이 담임 선생님 없스예?”
마음씨 좋은 A 교사가 나섰다.
“할머니, 우리 학교에는 학년별로 6개 학과, 19개 학반이 있어요. 중원이는 몇 학년, 무슨 과인가요?”
“그런 거 몰라예! 그냥 우리 중원이 담임 선생님 보러 왔스예. 지한구 선생님 안 계십니꺼?”
설마 나를 찾아왔을 줄이야. 나는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고, 선생님!” 하며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할머니의 몸에서는 1980년대 시골 옷장에 있던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리 중원이, 중원이 좀 살려주시소!”
3월 2일, 새 학년 신학기를 맞이한 교무실에 할머니의 흐느낌이 퍼졌다. 공업고등학교 1학년 신입생 담임을 맡은 나는 아직 아이들 명단과 얼굴을 다 익히지 못한 상태였다. 머릿속으로 ‘중원이가 누구더라’ 하고 아이 얼굴을 떠올리며, 내 품에 안긴 할머니의 흐느낌이 멈추길 기다렸다.
무슨 민원으로 학교에 오셨는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다시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며 가슴속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것은 앞으로 내가 가르칠 중원이의 비밀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아들은 딱 한 명, 중원이 아버지뿐이다. 트럭 운전 등을 하던 아들은 한 여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 전에 중원이를 낳았다. 둘은 그로부터 4개월 뒤에 헤어졌다. 아들은 핏덩이 같은 중원이를 트럭에 태우고 다니며 생업을 이어갔다.
보다 못한 할머니가 중원이를 데려다 키웠다. “애미 없는 자식”이란 소리 안 듣게 하려고 할머니는 자기 능력을 초과해가면서 중원이를 교육시켰다. 할머니는 ‘대구의 강남’이라는 수성구에 입성해, 최고 명문으로 통하는 중학교에 중원이를 보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할머니는 중원이가 인문계고를 졸업해 일명 ‘SKY’ 대학에 가길 바랐다. 하지만 중원이는 할머니 바람과 달리 공고에 입학했다. 할머니는 ‘공고 입학’ 대목에서 더 크고 서럽게 울었다.
‘이거 뭐지…? 결국 우리 학교 입학이 문제인 건가?’
나는 난감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할머니를 위로했다.
“할머니, 걱정마세요. 중원이 잘 할 겁니다. 비록 공고에 왔지만, 여기서 오히려 성공하는 아이들도 많으니 믿고 지켜봐주세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선생님만 믿을게예. 우리 중원이가 애미 없이 컸지만 바르고 똑똑한 아이라예. 믿을 사람은 선생님밖에 없십니더. 선생님이 우리 중원이 잘 좀 되도록 도와주시소. 꼭이예.”
그 이후에도 할머니의 이야기는 1시간 쯤 더 이어졌다. 가슴 한 중간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올라간 기분이었다. 내가 일하는 공고가 누군가에겐 실패의 상징이란 사실이 슬펐다.
다음 날 중원이를 불러서 면담을 했다. 전날 할머니께서 찾아오셨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직 담임과 제자로 천천히 관계를 맺어가고 싶었다.
“중원이가 만약 학교에서 아프면 선생님은 누구에게 연락하면 될까?”
“음… 부모님은 일 때문에 바쁘세요. 할머니가 편할 것 같아요.”
중원이는 엄마의 부재를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 역시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채 집에만 있다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비상 시 할머니에게 연락해야 하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설명하는 걸 보니, 꽤 오랫동안 비슷한 질문을 받아온 듯했다.
아이가 감추려는 걸 굳이 교사가 먼저 꺼낼 필요는 없다.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교사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걸 알기까지 나는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몇 해 전, 박완서 소설가의 작품 <엄마의 말뚝>으로 수업 할 때의 일이다. 나는 소설을 통해 아이들 각자의 엄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방향으로 수업을 설계했다. 수업 활동지에 나는 이런 질문을 담았다.
“엄마와의 추억을 바탕으로, 작품 속 엄마 행동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작성하시오.”
교실의 아이들은 자기만의 답을 작성해 나갔다. 그런데 동수(가명)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 곧바로 엎드렸다. 나는 동수를 깨워 활동지를 작성하라고 했다. 동수는 “알겠다”면서도 다시 엎드렸다. 결국 나는 폭발했다.
“니 지금 샘하고 장난치나? 쓴다 캐놓고 왜 자꾸 자는데? 샘 무시하나?”
이에 질세라 아이도 목소리를 높였다.
“쓸 게 없는데 왜 자꾸 쓰라카는데요?”
“뭐라도 써 봐라. 그게 그리 어렵나?”
“아이씨…“
아이는 교실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교실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따라가서 잡아야 할지, 그냥 태연한 척 수업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영화처럼 수업 마치는 종이 울렸고, 사건은 일단락됐다.
알고 보니, 동수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엄마와의 추억만 없는 게 아니라, 엄마 얼굴 자체를 몰랐다. 이런 동수에게 엄마와의 추억을 쓰라고 재촉했으니, 나의 문학 수업은 얼마나 잔인했을까.
동수만이 아니었다. 당시 수업을 듣던 아이 약 20명 중 5명(동수 포함)에게는 엄마가 없었다. 열정만 앞서고 디테일에서 부족했던 그날의 문학 수업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사건 이후, 아이들에게 부모 혹은 가족 관련된 질문을 할 땐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했다. 수수께끼 혹은 미로 같은 질문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질문 – “지금 집에서는 몇 명이 살고 있니?”
(진짜 의도 :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니?)
대답 – “두 명요.”
(해석 : 부모님 중에 한 분이 안 계세요. 더 묻지는 마세요.)
질문 – “부모님은 주로 언제 집에 계시니?”
(진짜 의도 : 부모님의 직업은 무엇이니?)
대답 – “몰라요, 부모님이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해석 : 묻지 마세요. 말하기 싫은 직업에 종사하세요.)
사정이 이러니, 중원이가 나에게 부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중원이는 운동을 잘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우리 반 부반장이 되어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다. 당당하고 밝아서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게 겉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중원이가 사라졌다. 이틀째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애지중지 소중하게 키운 손주가 가출을 하자 할머니는 다시 한 번 학교로 찾아왔다.
“샘요. 이노무 자슥이 집을 나갔는데 오지를 안네예. 다리 몽둥이를 뿐질러 뿌야 되는데… 집에를 안 들어오니 환장하겠스예.”
할머니의 통곡이 다시 교무실을 흔들었다. 사실 가출한 아이 찾기는 어렵지 않다. SNS를 살피거나 친구들을 수소문하면 금방 찾을 수 있다. 학교에서 가까운 친구 집에 중원이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나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중원아, 샘인데… 너 지금 ○○네 집에 있다며? 샘이 많이 걱정했다. 학교 째고 안 오니 편하고 좋나? 내일은 학교 꼭 와라잉. 안 오면 샘이 그 집에 찾아간데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학교 와서 이야기 하자. 오케이?”
중원이는 다음날 학교에 왔다. 할머니도 학교에 오셨다. 모범생의 일탈 정도로 여기고 일을 마무리하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노무 새끼가 어디 집을 나가? 니가 진짜 미쳤나?”
가출한 손주에게 받은 상처가 컸는지, 할머니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셨다.
“할매랑 같이 살기 싫어요! 할배도 싫고… 다 싫어요! 아, 짜증나….”
할머니와 아이 모두 평소에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악담으로 쏟아져 나왔다.
“할매가 내한테 해준 게 뭔데요? 맨날 뭐라카기만 하고, 6시까지 들어오라카고. 요즘 초딩도 9시 넘어서 집에 들어가는데, 저는 왜 이렇게 살아야 되는데요! 할매가 엄마였어도 이렇게 했겠어요?“
중원이는 다섯 살까지 할머니를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를 본 적 없어, 얼굴을 모르니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렇게 키운 손자의 비난에 할머니의 얼굴이 하얘졌다.
“애미 없는 거 거둬서 키워줬더니, 뭐가 어째고 어째!?“
급소를 찔려서인지 이번엔 중원이의 눈이 뒤집혔다. 중원이는 앉은 자리에서 거칠게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거칠게 뒤로 넘어졌다. 나는 중원이 앞으로 그야말로 튀어 나갔다.
“앉아! 박중원, 당장 자리에 앉아! 이 자식이, 니 지금 뭐하는 짓이고! 샘도 있는데 할머니한테 이리 해도 되나!”
나는 창문이라도 깨질 듯이 소리쳤다. 머리가 하얘져 눈앞에 뵈는 게 없었다.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동료 교사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중원이는 놀랐는지, 의자가 아닌 바닥에 주저앉았다. 할머니가 다가와 중원이의 어깨를 감쌌다. 두 사람은 앉아서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니, 할매가 니를 어떻게 키운 줄 모르나? 이게 뭐하는 짓이고?”
나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중원이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도 나에게 “내가 손주를 잘못 키웠다”며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몇 시간 뒤, 감정을 추스른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중원이는 예의 모범생 모습으로 학교에 왔다. 어제의 일은 서로에게 큰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중원이가 감춰온 비밀이 한꺼번에 드러난 점이 그랬다.
“샘요. 저 진짜 힘들었어요. 제가 보이는 모습은 다 가식이에요.”
상담 시간에 중원이는 자기 이야기를 풀어냈다. 중원이네 집은 기초생활수급 가정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중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모가 매달 주는 약간의 돈이 가족 수입의 전부였다. 할머니의 사랑은 중원이에게 집착과 압박으로 다가왔고, 그럴수록 얼굴 모르는 엄마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커졌다.
할머니 기대는 큰데 자기 머리는 따라주지 않고, 빨리 돈을 벌고 싶은데 능력은 안 되고, 가난과 상처를 누군가 알까 두렵고, 계속 숨기는 것도 힘들고, 생각은 많아지는데 집에 있으면 답답하고… 그러다 할머니와 싸우고 가출을 감행했다는 이야기.
나는 가만히 중원이의 말을 들어줬다. 중원이에겐 돈과 엄마만 없는 게 아니라,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도 없는 듯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고생했다”며 중원이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전부였다.
평온이 찾아온 뒤에도 “우리 중원이 좀 살려달라”는 새 학기 첫날 할머니의 강렬한 민원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학부모 민원으로 골머리 앓는 학교가 많다지만, 우리 공고에서는 다른 나라 이야기다.
우리 학교에는 학부모 민원이 거의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이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민원 없음’은 서글픈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 공고에는 부모 없는 아이가 많다. 부모가 있어도 당장 먹고사는 일을 해결하느라 자녀 교육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처지가 대부분이다.
며칠 뒤 중원이에게 나는 한 가지를 제안했다.
“니 샘하고 올해 뭐 하나 해볼래? 별건 아니고, 그냥 니랑 내랑 약속을 하고 지키면 되는데….“
어느 학교에는 학생 해외 연수프로그램 같은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공고에는 모 기업에서 운영하는 저소득층 지원 사업이 있었다. 교사와 학생이 멘토-멘티로 지내며 일정한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매달 장학금 30만 원을 주는 프로그램. 중원이는 ‘멘토-멘티 프로그램’ 잘 따랐고, 그 돈을 받게 됐다.
적은 돈일 수 있지만, 이는 중원이 가정의 유일한 고정 수입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중원이의 자존감은 높아졌다. 장학금을 꾸준히 받으려면 주어진 임무를 계속 이행해야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원하는 것과 목표’를 주고받았는데, 중원이는 이런 걸 하고 싶다고 적어서 줬다.
‘○○브랜드 운동화 사기, 고기 뷔페 먹기, 최신 영화 보기, 바다 가기.’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들. 하지만 중원이에겐 경험 못한 미지의 세계였다. 나는 이 모든 걸 중원이와 함께 ‘수행’했다. 이번엔 내가 ‘원하는 것’을 요청할 차례.
‘SKY’ 대학을 꿈꿀 수 없던 중원이는 해군 부사관을 희망했다. 일정한 테스트를 거쳐야 하니, 공부와 학습은 필수였다. 나는 ‘방과후 수업 하나 이상 듣기’를 제안했다. 중원이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에도 수업을 잘 듣는지 살폈고, 고민은 없는지 수시로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고정 수입 30만 원’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이제 겨우 높아진 아이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싶었다.
중원이가 2학년이 되면서 우리는 헤어졌지만, 관심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과거는 어땠는지 모르나, 지금은 ‘누군가 너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인을 계속 주고 싶었다.
그런 관심이 나쁘지 않았는지, 중원이는 꾸준히 노력했다. 3학년이 돼서는 그 해 가장 먼저 실시된 해병대 부사관 시험에 단번에 합격했다. 이어 시험이 좀 더 어려운 해군 부사관 시험에도 최종 합격했다.
할머니의 통곡으로 시작된 중원이의 공고 생활 3년. 나는 중원이에게 “행복했느냐” 혹은 “마음속 상처는 많이 아물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졸업해 학교를 떠날 무렵, 녀석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줬을 뿐이다. 오래전 상담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지금 이 시각, 아마 중원이는 푸른 바다 위에 있을 거다. 눈물 많고 목소리가 큰 중원이의 할머니는 지금도 종종 연락을 해온다. 더우면 더워서 안부를 묻고, 추우면 춥다고 내 안부를 묻곤 하신다.
글 지한구 교사 longlong19@hanmail.net
그래픽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