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금단의 땅’은 결국 ‘우상의 정원’으로 돌아왔다. 용산어린이정원(서울 용산구 용산동5가) 이야기다.
지난 5월 4일 용산어린이정원은 120여 년 만에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 후에는 일본군이 주둔했고, 해방 이후로는 미군기지로 활용됐다. 우리 땅이지만 정작 우리는 가볼 수 없었던 땅.
대통령실은 주한미군 반환 부지 일부를 용산어린이정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하며 “국민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이 지켜졌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개방’을 강조하며 요란한 홍보를 했던 용산어린이정원은 되레 ‘출입금지’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다. 출입이 금지된 시민은, 진실탐사그룹 셜록이 직접 확인한 수만 30여 명에 이른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프로그램을 소셜미디어에 알린 시민단체 대표와, 그와 같은 날 용산어린이정원을 출입한 용산 주민 5명(관련기사 : <‘윤석열 색칠놀이’ 제보자들, 용산정원 출입금지 당했다>), 그리고 대학생 20여 명까지. 가히 ‘블랙리스트’ 사건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관련기사 : <최소 23명 더 있다… 용산어린이정원 ‘블랙리스트’>)
윤석열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로 논란은 시작됐지만, 문제의 본질은 ‘출입 제한’ 규정이다. 특정 인물을 콕 집어 ‘입맛대로’ 출입을 막을 수 있는 막강한 조항. 용산어린이정원은 아래 규정을 근거로 일부 시민들의 출입을 거부하고 있다.
용산 반환부지 임시개방구간 관람 규정 제5조(관람신청 및 입장) 6항 “관련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 예약신청 또는 현장접수를 받은 대상자의 출입을 제한할 수 있다”
특정 행위 혹은 특정 물품의 반입 금지를 명시한 게 아니라, 특정 ‘인물’의 출입을 막을 수 있다는 조항. 어떤 인물의 출입을 막겠다는 건지, 그 사유도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다.
용산어린이정원 측은 개장 이후 약 두 달 만인 7월 10일, 오직 ‘출입 제한 조항’만을 새롭게 추가하기 위해 규정을 개정했다.
이미 용산어린이정원 관람 규정은 다른 조항을 통해 ‘제한 행위’와 ‘반입금지 물품’을 상세하게 정해두고 있다. 사전예약 신청 시엔 신청인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13자리 전체), 휴대전화 번호 등 개인정보를 제출받고 있다. 들어갈 땐 보안 검색대를 통한 소지품 검사도 시행하고 있다.
대통령실이 가까이 있다는 이유가 아니라면 평범한 공원에서는 상상도 못할 수준의 통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모자라다고 판단한 걸까. 용산어린이정원은 ‘출입 제한 조항’까지 만들었다. 대중에게 개방된 관람 공간이면서, 개인정보 수집과 소지품 검사로도 모자라 ‘관련기관’의 요청에 따라 특정한 인물의 출입까지 제한하는 곳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출입 제한 조항’은 위헌성 여지도 다분하다.
‘용산 반환부지 임시개방구간 관람 등에 관한 규정’은 국토교통부로부터 용산어린이정원 관리를 위탁받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만든 규정이다. LH는 지난 2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해당 규정은 용산어린이정원 내 자체 규정”이라고 설명했다.
용산어린이정원 관람 규정은 ‘법령’에 근거한 규정이 아니라는 이야기. 이럴 경우 문제는 180도 달라진다. 헌법상 기본권은 꼭 필요할 때에만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헌법 제37조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ㆍ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 출신 A 변호사는 2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법률 혹은 법률의 위임에 근거한 하위법령에 의해서 기본권을 제한해야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며, “하지만 용산어린이정원 관람 규정의 경우 법률로써 기본권을 제한한 게 아니기 때문에 기본권 침해로 볼 수 있다”고 자문했다.
이어 그는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를 당한 시민들은 행복추구권과 행동자유권, 그리고 ‘블랙리스트’ 관점에선 표현의 자유까지도 침해당했다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B 변호사도 지난 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용산어린이정원의 출입제한 조항은 법리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며, “차별행위는 장애, 병력, 성별 등 어떤 사회 구성원 집단이라는 신분을 이유로 하는 행위인데, 해당 규정은 사유조차 명시하지 않아 오히려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최정규 법무법인 원곡 대표변호사는 지난 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국가기관이 합리적 사유 없이 특정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은 국민의 기본권을 부당하게 침해하는 인권침해행위”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관람 질서 등을 위해 관람자의 일정한 행위를 제한할 수는 있지만 특정인의 출입을 제한할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며, “해당 조항은 특정인에 대한 출입을 제한하는 것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우려는 이미 현실화됐다. 현재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금지당한 시민은, 셜록이 파악한 수만 30여 명.
출입 제한 규정이 신설된 7월 10일 바로 그날,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소속 대학생 수십 명이 출입 금지당했다. 7월 11일 용산어린이정원 방문을 신청한 대학생들은, 방문 예정일 하루 전인 7월 10일 오후 6시경 돌연 “입장이 불가함”을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셜록은 설문을 통해 대학생 23명이 실제로 출입금지 메시지를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대학생들은 출입금지 인원을 40여 명으로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이들 중 대다수는 이전에 용산어린이정원을 방문해본 적도 없다. 이들은 모두 23일 현재까지 출입금지 상태에 놓여 있다.
출입금지 당한 시민은 또 있다. 윤석열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프로그램을 소셜미디어에 알린 시민단체 대표다. 김은희 ‘온전한생태평화공원조성을 위한 용산시민회의’ 대표는 7월 22일 용산어린이정원을 방문했다. 김 대표는 특별전시의 일환으로 진행 중인 윤석열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프로그램을 사진으로 찍고,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 올렸다.
김 대표의 사진은 큰 이슈가 됐고, 많은 언론사가 해당 사진을 인용해 “용산어린이정원에서 아동을 상대로 ‘대통령 우상화 교육’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했다.
이후 8월 2일, 김 대표는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 사실을 인지했다. 그와 함께 7월 22일 용산어린이정원을 출입한 용산 주민 5명도 출입을 거부당했다.
기자는 그동안 이들에 대한 출입금지 조치를 LH 측에 요청한 ‘관련기관’이 어디인지 여러 차례 질의했다. 하지만 LH는 “관계 기관의 요청에 따라 시스템만을 제공 중이며, 구체적인 현황 등은 파악하고 있지 못한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그러던 중 돌연 대통령경호처가 스스로 ‘등판’했다. 대통령경호처는 지난 14일 국토교통부 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환경부와 함께 보도설명자료를 냈다. 대통령경호처가 LH 측에 일부 시민들의 출입금지를 요청했다고 사실상 자인한 셈.
대통령경호처는 “불법적인 행위가 확인된 당사자에 대해 대통령 경호·경비 및 군사시설 보호, 용산어린이정원의 안전 관리 등을 고려해 통제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대통령경호처는 누가, 어떤 불법적인 행위를 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출입금지의 대상이 된 이들을 어떻게 ‘특정’했을까. 여기서 ‘민간인 사찰’이 이뤄진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진다.
김수형 대진연 환경동아리 ‘푸름’ 대표는 자신들이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거부당한 사유를 이렇게 추측했다.
“대진연 대학생들은 그동안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는 활동을 많이 해왔습니다. (…) 현 정부에 대한 비판 입장을 보이는 활동을 한 게 주된 출입 거부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용산어린이정원 측은 이들이 대진연 소속이라는 점을 어떻게 파악한 걸까. 대진연 노래 동아리 소속 C 씨도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용산어린이정원 측에서) 신원을 조회해본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대진연 소속이라는 점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사전 예약신청을 한 학생 다수를 동시에 출입 거부할 수 있을까요?”
김은희 대표와, 또 그와 함께 용산어린이공원에 출입한 뒤로 출입금지 대상이 된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알고 출입금지 대상으로 정했는지, 시민을 상대로 개인정보를 이용해 ‘뒷조사’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것이다.
출입금지를 당한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동안 용산 미군기지 토양오염 문제를 감시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온 사람들, 그리고 이태원 참사, 양평 고속도로 문제 등 윤석열 정부의 실정을 꾸준히 지적해온 사람들이다.
용산어린이정원 측이 왜 ‘출입 제한’ 규정을 급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이 조항을 통해 무엇을 막고 싶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특정 ‘인물’을 막겠다는 거지만, 실제로는 정권에 대한 ‘비판’ 자체를 막겠다는 의도 아닐까.
셜록은 지난 8일 국민신문고를 통해 LH에 “출입 제한 규정을 개정할 의사가 있는지” 질의했다. 하지만 LH는 지난 18일 “현재 관람규정 개정 계획이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출입 제한 조항 졸속 개정부터 일부 시민들을 정해진 사유 없이 ‘입맛대로’ 제한하는 출입금지 조치, 그리고 논란만 더 키운 대통령경호처의 반쪽짜리 해명과 해결을 기대할 수 없는 후속 조치까지.
셜록은 출입금지를 당한 시민들과 함께 ‘블랙리스트’ 조항을 바로잡기 위한 행동을 시작할 계획이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