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 30분이 가까워지자, 우산을 쓴 사람들이 하나둘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앞으로 모여들었다. 서로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나눴지만, 무거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입으론 “큰 기대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도, 반짝이는 눈망울에는 미처 다 숨기지 못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모두 우산 아래 선 채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핸드폰에 전해진 소식을 확인한 사람들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조용히 눈가를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바짓단이 다 젖어가는 것도 모른 채 저마다 울음을 삼켰다.
26일 헌재는 국가보안법 2조(정의)와 7조(찬양·고무 등)의 위헌 여부에 대해 판단을 내렸다. 심판대에 오른 조항은 ▲제2조1항(반국가단체 정의) ▲제7조1항(찬양·고무) ▲제7조3항(이적단체 가입) ▲제7조5항(이적표현물 소지·유포). 이날 헌법재판소는 2017년 이후 접수된 11건의 위헌소원 사건, 위헌법률심판제청 사건을 병합해 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결정은 ‘합헌’. 제7조1항(찬양·고무)과 5항(이적표현물 소지·유포)에 대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제2조1항(반국가단체 정의)과 제7조 3항(이적단체 가입)에 대한 신청은 각하했다.
국가보안법 제7조1항(찬양·고무)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선동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규정이다. 헌법재판관들의 의견은 합헌 6 : 위헌 3.
제7조5항(이적표현물 소지·유포)은 “제1항·제3항 또는 제4항의 행위를 할 목적으로 문서·도화 기타의 표현물을 제작·수입·복사·소지·운반·반포·판매 또는 취득한 자는 그 각항에 정한 형에 처한다”는 내용. 이 조항은 ▲제작·운반·반포와 ▲소지·취득에 관한 부분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헌법재판관들은 ▲제작·운반·반포에 관한 부분은 합헌 6 : 위헌 3, ▲소지·취득에 관한 부분은 합헌 4 : 위헌 5로 판단했다. 위헌 결정이 나오기 위해서는 재판관 9명 중 6명 이상이 위헌 의견을 내야 한다.
헌법재판관들의 의견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합헌’ 의견은 ‘남북 대립 속에서 대한민국 체제가 위협받는 점을 고려하면 전통적인 국가보안법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입장. 반면 ‘위헌’ 의견은 ‘찬양·고무·선전·동조 등은 어떠한 대상에 대한 지지의 태도일 뿐 국가의 존립·안전을 해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전복하려는 행위가 아니며, 결국 각 조항이 개인의 자유를 해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일부 조항 위헌’ 의견은 ‘단순히 이적표현물을 소지하는 것이 어떠한 목적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과도한 규제’라고 판단했다.
▲‘합헌’ 의견 :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보아 온 국가보안법의 전통적 입장을 변경해야 할 만큼 국제정세나 북한과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변화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 따라서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한 선례의 입장은 지금도 타당합니다.”
▲‘위헌’ 의견 : “위험이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을 뿐이고, 구체적인 위험이 임박하였다고 볼 수 없는 경우에도 행위자가 처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7조1항은 표현의 자유 및 양심의 자유 내지 사상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일부 위헌’ 의견 : “제작·운반·반포한 자에 관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적표현물의 소지·취득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행위자의 내심의 사상을 문제 삼아 처벌하는 것으로, 양심의 자유 내지 사상의 자유를 중대하게 침해합니다.”
국가보안법 7조는 법안 일부가 개정된 1991년 5월 31일 이후 여덟 번째 헌재의 심판대에 올랐다. 하지만 헌재는 이날도 ‘합헌’이라 답했다.
앞서 헌재는 2004년 합헌 9 : 위헌 0, 2015년 합헌 6 : 위헌 3, 2018년 합헌 4 : 위헌 5(제7조5항)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위헌 의견이 늘어난 것. 헌재의 이번 판결에 시민들의 기대가 모아진 것은 이러한 ‘경향성’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15일 국가보안법 위헌법률심판 공개변론까지 열리면서 그 기대는 더 커졌다. 과거의 경험을 볼 때 위헌 결정 가능성이 높은 사건에 대해 공개변론을 해왔다는 점에서,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위헌 결정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예측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시 한번 ‘합헌’이라는 결정을 받아들게 됐다. 다만 조영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은 “그나마 주목할 만한 지점은 7조 5항 중 ‘제작·운반·반포’ 부분에 위헌 의견을 낸 헌재 재판관이 3명이나 있었다는 점“이라며, “전향적인 의견이 나왔다는 점에서 나름 의미는 있었지만 결과는 많이 아쉽다”고 평가했다. 그는 민변 국가보안법폐지TF 단장을 역임했고, 지난해 공개변론에서 위헌 측 변론을 맡기도 했다.
헌재의 결정이 전해진 오후 3시,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헌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참가자들은 헌재 판결에 대해 비통한 심정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저희의 요청 사항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서 많은 서명 운동도 전개했었고, 오만 입법청원 운동도 7일 만에 진행이 됐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완전 폐지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헌재에서는 (변화한) 시대를 반영해서 7조의 일부라도 개정이 될 거라고(위헌 결정을 내릴 거라고) 하는 예측은 빗나갔습니다.”(최병모 변호사, 국가보안법 위헌소송 대리인단 단장)
최병모 변호사는 “기대한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와 한국 사회가 반동의 역사를 걷는 것 같다”며, “헌재도 이에 편승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묵묵하게 저희의 길을 가겠다”고 밝혔다.
신민정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은 국제기구의 권고에 반하는 이번 결정에 유감을 표했다. 신 이사장은 “(국가보안법이) 모호한 조항으로 개인을 검열하고, 자유를 위축시키고 있다”며, “국제인권 기준에 맞게 국가보안법을 근본적으로 개정하거나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영선 민변 회장은 지난 7월 진실탐사그룹 셜록과의 인터뷰에서 “현대사회와 75년 전 탄생한 국가보안법은 양립할 수 없는 게 상식”이라며, 최소한 이적표현물 소지·반포에 있어서는 위헌 결정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그동안 셜록이 만난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탄탄한 미래를 꿈꾸던 사업가. 부임한 지 3달 만에 햇병아리 교사, 교육청이 주관한 연수에 참여한 대안학교 교사, 북한 여행기를 집필하던 재미동포, 북한 영화 전문가.
[<국가보안법 ‘마지막’ 인터뷰> 기사 보기]
1화 “국가보안법 무죄!” 나는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다
2화 ‘빨갱이 교사’ 한 명을 만들기 위해, 모두 공범이 됐다
3화 382번의 단식… ‘흰옷’ 입은 학생들이 국보법을 이겼다
4화 언론이 만들어낸 마녀… ‘1788 : 12’라는 참혹한 대비
5화 유튜브에 널린 북한영화, 눌러볼 ‘용기’ 있습니까?
6화 “그 생각은 유죄야!”… 백년간 허물지 못한 ‘생각의 감옥
7화 윤석열식 국가보안법 ‘칼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광기”
이들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는 순간부터 하루아침에 평범한 일상을 빼앗기고, 전연 다른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긴 시간 법정 투쟁을 펼친 끝에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아들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게 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하루빨리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길 바란다는 것. 이들은 “국가보안법은 한국 사회의 정신적인 장벽”(김호 전 HB이노베이션 대표)이라고 이야기했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정신적인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조영선 민변 회장)이라고 낙관했다.
“이제 헌법재판소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헌법재판소가 그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제 국회의 시간입니다. 과거의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에게나, 우리 아이들에게나 악법 그 자체인 국가보안법을 폐지시키기 위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국회로 가겠습니다.”(박미자 성공회대 연구교수)
지난 3년 6개월 동안 박미자 교수는 매주 월요일마다 헌재 앞에서 1인시위를 진행했다. 또 다른 억울하고 무고한 피해자가 탄생하지 않도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헌재 앞을 지켰던 그녀가 이제 또 한번 기대를 안고 국회로 간다.
취재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사진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