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마을도서관 문을 열자 초등학생들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네다섯 명의 아이들은 손님이 온 줄도 모른 채 보드게임에 열중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바로 온 듯 책가방이 바닥에 뒹굴었다.
“얘들아, 재밌니?”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사이로 김은희 ‘온전한 생태평화공원 조성을 위한 용산시민회의'(이하 용산시민회의) 대표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김 대표는 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 대표 뒤로 보이는 책장에는 주로 어린이용 동화책과 그림책, 청소년용 문학책이 꽂혀 있었다. 도서관 근처에 있는 효창공원에 관한 역사책과 기후위기 관련 책도 있었다. 용산 주민들이 뜻을 모아 만든 ‘마을’도서관다웠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마을도서관 ‘고래이야기’. 그곳에서 지난 8월 9일 김 대표를 만났다. 그는 2015년부터 용산 미군기지의 온전한 반환과 토양오염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해왔다.
용산 주민이자 지역활동가인 김 대표는 마을도서관을 만드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용산 주민으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부모로서 해야만 하는 책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김 대표는 ‘늘 하던 대로’ 했다. 용산 주민으로서 지역 일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걸 그의 소임으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이 초래한 결과는 달랐다.
김 대표는 용산어린이정원이 어린이들에게 제공한 ‘윤석열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도안을 소셜미디어에 최초로 알렸다. 이후 김 대표는 돌연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금지당했다.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용산어린이정원 토양오염 문제가 너무 조용히 흘러갔거든요. 더 소란스럽게 해야 했나 봐요. 그런데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로 저희를 이렇게 건드려주더라고요. 그래, 더 탄압해라. 이 문제로(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 사건 의미) 윤석열 정부가 어떤 정부인지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사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후, 김 대표에게는 크고 작은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
새해 벽두부터 정부와 돈 문제로 엮였다. 김 대표는 2015년 용산 주민 33명 등과 함께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한미연합사 잔류무효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결과는 패소. ‘패소자 부담주의’에 따라, 정부 측 소송 비용까지 물어줘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국방부가 2018년 1차로 소송 비용을 청구했지만, 약 4년을 버텼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고 올해 1월, 다시 한번 청구서가 날아왔다. 액수는 약 1000만 원. 청구서에는 ‘미납 시 강제집행 조치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결국 이들은 소송 비용을 토해내야만 했다.(관련기사 : <약속 어긴 건 미군인데, ‘천만원’ 청구서는 용산 주민에게?>)
“다행히 3~4일 만에 돈을 모았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뜻이 모이는 걸 보고 엄청난 힘을 받았습니다. 결국에는 국민들이 무엇이 옳은 건지 알고 스스로 힘을 모아 증명한 겁니다.”
여름 들어서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에 소환되는 경험을 했다. 용산시민회의는 지난 7월 27일 용산어린이정원 정문 앞에서 ‘용산어린이정원 폐쇄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그동안 지역활동을 하면서 수없이 진행한 기자회견과 다를 바 없는 기자회견이었다.
경찰은 해당 기자회견을 ‘미신고 집회’로 간주해 문제 삼고, 김 대표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로 소환했다. 지난 8월 23일 경찰은 김 대표를 ‘기소’ 의견으로 서울서부지방검찰청에 송치했다.
“지난 9년 동안 용산 미군기지 앞에서 집회와 기자회견, 문화제, 1인시위 등 오랜 활동을 해왔지만, 단 한 번도 경찰 출석 요구를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용산시민회의가 그동안 주장했던 내용과 활동을 이렇게 탄압하는구나, 결국 그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점은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 조치였다. 김 대표는 지난 8월 2일 자신이 출입금지 대상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했다. 당시 김 대표는 현장 등록으로 입장을 시도했는데, 돌연 “예약신청 불가” 안내 메시지를 받았다.
“대통령 부부를 비판했다고 해서 ‘너는 안 돼’, ‘너는 오지 마’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 자체가, 공공의 장소가 아닌, 마치 사유지에 못 들어오게 하는 태도로 느껴져서 굉장히 불쾌합니다. 오로지 ‘대통령의 심기에 불편을 끼치느냐’를 기준으로 국민을 대해선 안 되지 않습니까.“
출입금지 당한 사람들은 또 있다. 김 대표 외에도 용산 주민 다섯 명이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금지당했다. 이들은 김 대표가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프로그램 사진을 찍은 날, 그와 함께 용산어린이정원을 방문한 사람들이다. 김 대표를 포함한 여섯 명 모두 출입금지 사유를 알지 못하고 있다. 용산어린이정원은 이들에게 사유조차 안내하지 않은 채 출입금지 사실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심지어 용산어린이정원은 자체 규정까지 급하게 개정했다. ‘출입제한 조항’을 새롭게 만들면서 특정 인물의 출입을 막아버린 것.
결국, 모두에게 개방된 공원의 출입을 정당한 사유도 없이 특정 인물에게만 일방적으로 금지하는 상황. 이는 ‘블랙리스트’ 논란으로 번졌다. 차별과 인권침해의 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김 대표와 함께 손을 잡았다. 용산어린이정원 ‘블랙리스트’의 심각성을 총 8편의 기사로 세상에 알렸다. 기획명은 ‘우상의 정원’.(관련기사 : <‘윤석열 색칠놀이’ 제보자들, 용산정원 출입금지 당했다>)
출입금지 조치뿐만 아니라, 과거 김 대표가 용산어린이정원을 출입할 당시 ‘압수수색’ 수준의 소지품 검사가 이뤄진 사실을 보도했고,(관련기사 : <경찰은 왜 ‘윤석열 색칠놀이’ 제보자 뒤를 쫓아갔을까>) 대학생 수십 명도 용산어린이정원을 출입금지 당한 사실을 밝혀내 추가로 보도했다.(관련기사 : <최소 23명 더 있다… 용산어린이정원 ‘블랙리스트’>) 그리고 용산어린이정원이 급조한 ‘출입제한 조항’의 위헌성 문제를 후속보도로 다뤘다.
셜록은 보도에만 그치지 않았다. 출입금지를 당한 시민들과 함께 ‘블랙리스트’ 논란을 바로잡기 위한 액션을 곧바로 준비했다.
셜록은 직접 진정인으로 나섰다.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 시민들과 함께, 지난달 25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관련기사 : <[액션] 용산정원 ‘블랙리스트’ 시민들, 인권위 진정>) 김 대표와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대학생들은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는 인권침해”라고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셜록과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행동에 국회도 응답했다. 이병훈, 황운하 더불어민주당 의원, 배진교 정의당 의원은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 조치를 “심각한 인권침해 사안”이라고 여러 차례 지적했다.
셜록의 최초 보도 이후, 대통령경호처는 용산어린이정원에 출입금지 조치를 요청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경호처가 특정 시민을, 어떤 사유로 출입금지 조치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다.
현재 셜록이 파악한 출입금지 인원은 김은희 대표를 포함해 약 30명 정도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그동안 용산 미군기지 토양오염 문제를 감시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온 사람들, 그리고 이태원 참사, 양평 고속도로 문제 등 윤석열 정부의 실정을 꾸준히 지적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면면을 고려해보면, 용산어린이정원이 왜 이들의 출입을 막고 싶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특정 ‘인물’을 막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권에 대한 ‘비판’ 자체를 막겠다는 의도 아닐까.
셜록과 김 대표의 연대에 시민사회도 반응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지난달 22일 셜록의 ‘우상의 정원’ 기획을 2023년 9월 이달의 좋은 보도상으로 선정했다.
민언련은 “대통령경호처가 민간인 사찰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특정인 출입을 추가 제한한 인권탄압 실태를 폭로하며 공공기관의 권력남용으로 인한 시민권리 침해 문제를 드러내 권력 감시 역할에 충실했다”고 수상 사유를 밝혔다.
김 대표처럼 ‘가만히 있지 않는’ 시민들의 노력 덕에 세상은 한 발짝씩 진보해왔다. 침묵하지 않는 이들 덕분에 셜록도 좋은 기사를 쓸 수 있었다.
셜록은 계속해서 용산어린이정원의 부당한 출입금지 조치를 쫓을 계획이다. 시민들과 함께 행정소송과 헌법소원을 제기하고자 한다. 인권위의 진정 결과도 끝까지 지켜볼 예정이다.
셜록의 질긴 계획처럼 김 대표도 여전히 행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 대표는 지금도 매일 아침 용산어린이정원을 찾아 1인시위를 하고 있다. 그가 가장 잘하는, ‘늘 하던 대로’ 말이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