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탐사그룹 셜록이 보도한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최진경 씨의 이야기가 국정감사에서도 언급됐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산재 역학조사가 지연되는 문제를 살펴보겠다며, 특히 최 씨의 사안을 “샘플”로 꼼꼼하게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에 대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국정감사가 12일 진행됐다. 우원식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서울 노원구을)은 최진경 씨가 작성한 편지를 대독했다. 산재 처리 지연이 노동자에게 안겨주는 고통을 전하며, 고용노동부를 상대로 질의했다.
국정감사장에는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출석했다. 근로복지공단은 고용노동부 산하기관으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10조에 따라 고용노동부 장관의 위탁을 받아 산재 여부 판정 권한을 지니고 있다.
우 의원은 최 씨를 “대한민국 산업재해 보상시스템의 부조리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고 언급했다.(관련기사 : <반도체, 말기암, 불승인… 나는 홀로 ‘마지막’을 준비한다>)
최 씨는 삼성전자 기흥연구소 반도체·LCD 공정 과정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이때 벤젠, 산화에틸렌 등 발암물질이 다수 포함될 가능성이 있는 화학물질을 다뤘고, 방사선 장비도 사용했다. 화학물질에서 ‘빠져나온’ 지 12년이 지난 2018년, 그녀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는다.
최 씨는 2019년 3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했다. 유방암에 대해 업무상 발생한 질병으로 봐야 한다는 것. 가혹한 기다림 끝에는 더 잔인한 결과가 기다렸다. 공단은 4년 만에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렸다.
최 씨가 산재 불승인 판정을 받은 건 유방암 직업적 유해인자에 대한 노출이 적다는 이유였다. 유방암의 직업적 유해 인자 기준은 ▲산화에틸렌·폴리염화바이페닐 등 발암물질 ▲엑스선(X-선)·감마선 등 전리방사선 ▲교대근무 및 야간근무 여부다.
우 의원은 최 씨에 대해 실시된 역학조사가 “올해 초 본 위원이 지적하니 2개월 만에 진행된 ‘졸속조사’”라고 비판했다. 특히 “최진경 씨가 퇴사하기 전 사라진 라인을 조사한다고 4년이라는 시간을 끈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역학조사는 근로자의 질병과 작업장의 유해요인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조사다. 이는 안전보건공단의 산업안전보건연구원 혹은 근로복지공단의 직업환경연구원이 수행한다.
우 의원은 “(역학조사) 처리 기간을 보니 더 가관”이라며, “지난 8월 기준, 올해 (역학조사 처리 기간이)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평균적으로 1072일, 직업환경연구원은 평균 581.5일이 걸린다”고 지적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운영 규정에는 ‘역학조사를 180일 이내 조사를 마무리한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이는 강제 사항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효성이 부족하다. 근로복지공단 자료에 따르면, 질병으로 산재를 신청한 뒤 결과를 받기 전 사망한 노동자는 최근 5년간 111명에 달한다.
“대기 중 사망한 111명 대부분이 다 암 환자였어요. 최진경 씨가 바로 이런 경우죠. (공단이) 시간만 때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정말 강력한 의심이 드는데, 실제 최진경 씨는 시간만 때웠어요, 4년 동안. 암에 걸린 사람은 조사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아니냐, 정부가. (…) 이거는 정상적인 국가제도라고 볼 수가 없고요.”
역학조사 처리 지연 문제에 대해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패스트트랙(역학조사를 생략하는 것)을 도입하고 신속한 재조사를 하고 있지만, 인력 부족을 비롯한 인프라 노후화 등 여러 요소가 작용했다”고 해명했다.
다만 역학조사 기간이 과도하게 장기화된 점에 대해서는 “(우 의원) 말씀의 취지를 최대한 공감”한다고 말했다. 이어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부분(최진경 씨 사례)을 대표적인 샘플로 한번 꼼꼼히 살펴보겠다”고 밝혔다.
덧붙여 이 장관은 역학조사 기간 단축을 위한 대안으로 “역학조사 집중 처리 기간 운영, 민간 위탁 사업 추진 등을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우 의원은 역학조사 장기화 문제 해결책으로 ‘산재국가책임제 도입’을 제시했다. 산재국가책임제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으로 지난달 27일 발의됐다. 이는 노동자의 산재 입증 책임을 완화하고 국가가 산재 규명 책임을 지는 법안으로,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하면 국가가 우선 보상하여 노동자를 보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관련기사 :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의 편지 “더는 억울한 사람 없게…”>)
하지만 이 장관은 “국가가 선보상 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그 취지를 이해하지만,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우 의원은 26일 있을 종감(종합감사)에서 “오늘 제기한 문제들(역학조사 처리 지연 문제 및 산재국가책임제 도입)에 대한 노동부의 입장을 정리해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국정감사장에서 읽어내린 최진경 씨의 편지는 또 다른 파장을 일으켰다.
임이자 국회의원(국민의힘, 경북 상주시문경시)의 마음의 문을 두드린 것. 임 의원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건 일하다 죽거나 몸에 질병이 생겨 거동이 불편해지는 것”이라며 최 씨의 사례에 공감했다.
이어 다가오는 11월에 “여야 간사, 고용노동부, 환경노동위원회(이하 환노위) 위원장 등이 모여 공청회나 토론회를 추진할 것”을 박정 환노위 위원장에게 요청했다. 이에 박 위원장은 “고려해 보겠다”고 답했다.
산재 처리 지연으로 “악몽 같은” 시간을 살아내는 직업병 피해자들. 다가오는 11월, 국회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까.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