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거기 그만둘까봐.”
하루는 여름 휴가라고 고향집에 내려온 아들이 이런 말을 꺼냈다. 취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직장 생활을 더는 못 견디겠다고, 차라리 회사를 나와 택배를 나르고, 택시를 몰겠다고 말이다. 김정혜(가명, 71) 씨는 타향살이에 지친 아들의 응석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참을성이 강한 녀석이니까 이번에도 잘해낼 거라고 믿었다.
‘개천에서 난 용’. 정혜 씨에게 아들 신호영(가명, 47) 씨는 그런 존재였다. 충남 보령에서 자란 아들은 서울로 올라가 취업까지 거뜬히 해냈다. 그런 아들을 보면, 정혜 씨가 공장에서 악착같이 버틴 20년 세월이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들 호영 씨는 2002년 3월부터 2년간 LED 제품 생산 라인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그는 100~150℃의 고온에서 하루 11시간씩 제품 열 테스트를 수행하거나, 화학물질이 가득한 용액에 웨이퍼를 넣었다 빼는 작업 등을 했다. 하루 11시간에서 13시간을 일하며, 주말도 없이 주로 야간조로 투입됐다.
작업장에선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열을 식히는 장치나 국소배기장치를 가동할 여유가 없었다. 호영 씨에게 주어진 건 오직 방진복과 얇은 마스크 한 장뿐이었다.
“그때 내가 회사 못 나오게 했어. 끝내 다니다가 이 병을 얻은 거잖아. 그게 참…… 너무 후회가 되더라고.”
정혜 씨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사람의 운명이라는 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아요.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될 거라고, 들어보지도 못했던 병 때문에 내 새끼가 장애인으로 살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어.”
김정혜 씨는 습관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늘 아들 신호영 씨가 있었다. 마스크를 쓴 채 짙은 남색 소파에 몸을 기댄 남자. 인터뷰 도중이었지만 신 씨는 어느새 잠에 빠져 있었다. 호영 씨는 2009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투병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호영 씨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온 건 2007년 6월이었다. 물을 마시려고 물병을 잡은 신 씨의 왼쪽 팔이 덜덜 떨렸다. 머지않아 왼쪽 다리까지 절뚝였다. 이듬해에는 왼손, 그리고 그 다음 해에는 오른손에 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처음엔 허리디스크 때문에 생긴 문제라고만 여겼다. 증상이 정상적인 일상을 침범할 정도로 심해지자 결국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뜻밖의 진단을 했다.
“양측 선조체의 도파민 뇌세포가 심하게 소실되었습니다. 파킨슨병입니다.”
난생 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50대 전후로 발병한다는 병. 치료약이 없는 완치 불가능한 병. 서서히 동작이 둔해지다가 걷는 것도 힘들어진다는 그 병이 2009년 호영 씨에게서 발견됐다. 당시 나이 33살이었다.
“한번은 여름 휴가 때 대천 집(고향)에 내려왔는데, 얘가 다리를 질질 끌어. 그래서 내가 ‘왜 다리를 그렇게 끄니?’ 그러니까 ‘(허리)디스크야’ 그려. 그래서 난 그냥 디스크인 줄만 알았지. 근데 나중에 보니까 그 병(파킨슨병)이 진행되고 있었던 거야. 근데 (내가) 충격받을까봐 나한테는 차마 말도 못 하고 있었던 거지. 그렇게 2~3년을 혼자 앓고 그러더라고.”
정혜 씨 생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려보낸 밤. 타지에서 홀로 속앓이하고, 견뎠을 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호영 씨가 아프지 않았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병. 끝내 누워서 숨 쉬는 것 외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그런 병. 김 씨는 아들 곁에 머무르기 위해 서울로 왔다.
“대한민국 인구가 5000만 명인데, 왜 그 5000만 명 중에 너냐, 그 많은 사람 중에 왜, 왜 하필 너냐, 이런 생각을 한 2~3년은 맨날 그 생각만 했어.”
아들을 지키려면 강한 엄마가 돼야 했다. 정혜 씨는 예순을 넘은 나이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다만, 그런 정혜 씨의 노력도 병의 진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호영 씨의 상태는 어느새 부축을 받아도 일어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정혜 씨는 담담하게 호영 씨를 안아들고, 수저로 밥을 먹였다. 어린아이가 된 아들과 함께 절실한 마음으로 버텨내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 씨가 눈을 반짝이던 날이 있었다. 때는 2017년. 텔레비전 뉴스에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과 건강지킴이 반올림’의 활동 모습이 보였다. 호영 씨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도 직업병이 아닐까.’
반올림과 만난 호영 씨는 그해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 신청서를 넣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19년. 집으로 통지서 하나가 날아왔다. 그 안에 산재 승인 판정이 적힌 문서가 있을 터였다. 지난 2년간 언제 끝날지 모를 기다림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에게는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호영 씨가 근무한 LED 공정이 반도체 공정과 비슷하기 때문에 ‘산재 승인’이란 결과가 나올 거라는 믿음이었다.
“결과 나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통지서가 집으로 딱 왔더라고. ‘이제 고생 다 했다. 우리 힘든 시간은 다 지나갔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 수 있을까.’ 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딱 보니까 불승인이야. 참… 기가 막히데.”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암만 생각해도 뭐가 없어. 거기서 일한 건 사실이고,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 것도 사실인데. 2000년대는 안전시설 같은 것도 잘 없을 때인데, 인정이 안 될 이유가 없단 말이지. 근무한 기간이 짧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밤낮으로 일한 것이 거의 3년 가까이 돼. 주야간으로 따져봐. 오죽하면 의사가 그걸 다 따지고 했을 때 5년 8개월 정도 일한 걸로 나온다는 의뢰서를 써준 것도 있거든.”
두 사람은 근로복지공단이 아닌 다른 곳에 다시 한 번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이번에는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
1심 판결은 올해 6월이 돼서야 나왔다. 호영 씨가 이겼다. 법원은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법원 판결이 나오자 사건을 담당한 문은영 변호사는 호영 씨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근로복지공단이 항소를 안 할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좀 지켜봐야 한다”고. 기한은 6월 28일. 그때까지 공단 측에서 항소장을 제출하지 않으면 사건은 이대로 종결. 하지만 공단 측에서 항소장을 제출한다면 재판은 또 2심으로 넘어가는 거였다.
호영 씨는 그 때문에 매일 가슴을 졸였다. 공단 측이 항소장을 제출했는지 매일 컴퓨터로 확인했다. 다시 이전처럼 기약 없는 기다림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하루하루 항소 기한은 가까워졌다. 심지어 6월 28일 당일 오후에도 항소장은 제출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호영 씨는 안도했다. 그렇게 6년간의 긴 산재 인정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의 생각은 신 씨와 달랐다. 6월 28일 늦은 저녁, 다시 한번 컴퓨터로 확인을 해봤다. 그런데, 공단 측에서 항소했다는 내용이 추가돼 있었다. 산재 신청 → 공단의 불승인 결정 → 행정소송 제기 → 1심 승소, 파킨슨병과 싸우면서 여기까지 오는 데만 6년이 걸렸는데, 공단은 아직도 이 싸움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항소도 마감 날짜에, 마감 시간에 딱 맞춰가지고 했더라고. 얼마나 잔인한 거야, 그게. 얘(신호영 씨)를 비롯해서 산재 환자들은 최약자야. (공단이) 왜 항소를 한 건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거야. 안쓰러운 사람들한테 (재판에서) 졌다고 항소한다는 건 진짜 피해자들을 죽이는 일이지. (이름이 근로’복지’공단이라면서) 무슨 이런 ‘복지’가 있어요? 말이 되는 얘기냐고요.”
이제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희망은 다시 한번 꺾이고 만다. 호영 씨의 세상은 다시 한번 무너져내렸다.
“내년 2월에 (2심 재판) 첫 변론이 잡혀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4개월 남은 거잖아요. 4개월이면 1년의 3분의 1인데. 또, 그때 가서 바로 마무리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너무 늘어져요. 그러니까 너무 답답한 거지. 죽어야 끝날 일인가, 이런 생각도 한다니까요.”(김정혜 씨)
“기한 없이 무제한 기다리는 거, 그게 진짜 사람 피 말리는 일이에요.”(신호영 씨)
근로복지공단은 6월 28일에 항소했다. 그러나 공단은 이달 18일 현재까지도 항소이유서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민사 항소심에서는 항소이유서를 제출해야 하는 기간이 따로 없기 때문.
재판장은 한 차례 피고(근로복지공단)에게 항소이유서 제출을 명하는 ‘석명준비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자 공단은 지난 9월 항소이유서 대신 ‘석명준비명령제출기한연장신청서’를 제출한다. “사건을 담당하는 변호사가 변경되고, 항소 이유를 정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항소이유서 제출 기한을 미룬 것. 여전히 이를 언제 제출할지는 알 수 없다.
“공단이 항소이유서를 아직도 제출하지 않고 있으니까, 변론 기일이 내년 2월로 잡혀 있긴 해도 금방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되죠. 항소한 이유를 확인해야 어떤 식으로 반박할지 준비를 하는데요, 계속 제출하지 않고 있으니까 답답한 상황이죠.”(문은영 법률사무소 문율 변호사 2023. 10. 18. 전화 인터뷰)
처음 이상 증세가 발견된 지 16년, 파킨슨 진단을 받은 지 14년, 산재 신청한 지 6년. 그리고 승소 판결까지는 또 기약 없는 시간이 필요했다. 가까워지다가도 다시 멀어지는 산재 판정에 호영 씨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할 만한 근거가 있으니까 항소를 했을 텐데, 계속 서류(항소이유서)를 제출 안 하고 있으니까 ‘공단이 무작정 항소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어요.”(신호영 씨)
이에 대해 근로복지공단 홍보부 관계자는 18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항소이유서가 아직 제출되지 않은 사유는 특별하게 확인하지 못했으나, 항소 이유에 대해서는 법무부로부터 내려온 제안 때문으로 추정된다”고 답했다. 이어 “행정소송의 최종 결정 권한을 지닌 법무부로부터 ‘의학적 판단을 다시 받아보자’며 항소를 제기해보라는 권고가 있었다”고 전했다.
항소이유서 제출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항소이유서가 제출되지 않았다고 해서 재판이 진행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라며, “희귀질환이다 보니 인과관계를 살펴보고, 의학적 소견을 보완하는 데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
“오죽하면 (근로복지공단에) 사정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니까요. (산재 피해자들은) 제일 불쌍한 애들 아니냐, 당신들이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힘든 애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냐, 하루라도 좀 편하게 있다가 가게 해야지 더 고통을 줘서 당신들이 얻는 이익이 뭐냐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심지어 법원에서 판단 내린 것까지 아니라고 하면 어디에서 인정받아야 기라고(맞다고) 할 거냐고 물어보고 싶어.”(김정혜 씨)
호영 씨의 시간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빠르게 흐를 뿐이다. 다른 파킨슨병 환자들보다 20년은 더 일찍 찾아온 질병. 나날이 죽어가는 뇌세포와 거동조차 어려워진 몸은 이제 눈꺼풀을 들어올리는 것마저 어렵게 한다.
“(아들이) 전에 이런 농담까지 한 적 있어요. ‘엄마, 나 산재 승인 나면 충격 받아서 (병이 다) 나을 것 같아. 가슴 덜 졸이면서 살고.’ (…) 최소한 돈에는 신경 쓰지 않고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내가 화장실 보내주고, 먹여주고 이런 거는 할 수 있지만, 돈은 안 되잖아. 그러니까 그것만이라도 신경 안 쓰고 살았으면 하는 거지.”
두 사람은 그럼에도 꿈을 놓지 않는다. 산재 승인이 되고, “경제적인 걱정 없이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꾼다.
“올해 중학교 3학년 된 아들이 있어요. 공부를 되게 좋아하고 또 욕심이 있는데, 아직 학원을 보낼 수가 없다는 게 가장으로서 마음이 아프죠. 그런데 만약 산재 인정이 된다면 아들이 하고 싶다는 공부도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게 좀 기대가 돼요.”(신호영 씨)
신호영 씨는 그 바람처럼 든든한 아버지, 아들의 꿈을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평범한 일상이 이들에게는 더 없이 간절하다.
[신호영 씨의 자필 편지 전문]
먼저 하고 싶은 얘기는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결정이 나지 않을 일인가 의문이구요. 공단은 정말 산재 피해자들을 위한 기관인지 묻고 싶구요. 산재 피해자들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제 생각은 ‘복지’공단이 아니고 ‘고통’공단이라고 해야 맞는 것 같구요. 심지어 사망한 사람까지 심판을 받으라고 하는 집단이 섬짓(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산재 피해자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는 일은 그만 끝내주시길 인간적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세상에 나와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1000분의 1이라도 공감한다면 그렇게는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항소 (기한) 마지막 날짜에 맞춰 항소하는 걸 봐도 너무나 잔인하다는 생각이구요. 제발 그런 식으로 산재 피해자들한테 고통 주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하루하루 장애인으로 사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정신 고통까지 주는 건 인간이라면 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단이 항소한다는 것은, 산재 피해자들의 고통에다가 생채기를 내어 더 고통을 주려고 하지 않고서야 항소할 수 있는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럽고 아픕니다. 엄마의 도움 없이는 나의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너무 힘듭니다.
첫째, 항소 기간 마감일에 임박해서 법원에 항소서를 제출. 사람의 감정 가지고 장난하는 느낌. 항소를 해서 승소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으면 미리미리 법원에다 제출하는 것이 인지상정.
둘째, 아직도 상소(항소)이유서 혹은 준비서면 미제출. 7월 3일에 상소하고(공단의 항소장 제출은 6월 28일, 자료가 2심 재판부로 송달된 것은 7월 3일이다. – 기자 주) 3개월 이상 지연 중.
셋째, 상소를 해서 승소할 만큼 반박 자료 가지고 있었으면 1심 때는 왜 제출하지 않았나. 승소보다도 시간 끌기가 주목적인 듯.
넷째, 시간 끌기 작전으로 재판 일정이 너무 길어짐. 멀쩡한 사람도 병이 날 지경.
마지막으로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로 인정받을래, 병이 완치될래, 라고 물으시면 주저 없이 병의 완치를 선택할 것임. 천억 원을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건강임.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