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딥페이크 성폭력’ 피해자가 된 장예진(가명) 씨. 경찰에 고소했지만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수사는 금방 중지됐다. 홀로 범인 추적에 나선 장 씨, 서울대 같은 학과 출신 여성들이 비슷한 피해를 겪은 걸 알았다. “범인을 잡을 수 있겠다”는 희망은 친구 구태우(가명)의 조력으로 커졌다. 드디어 범인의 꼬투리를 잡은 장씨. 놀랍게도 첫 번째 용의자는 구태우였다….

꽤 먼 길을 왔지 싶었는데, 그 자리 그대로다.

‘디지털성폭력으로 나와 친구들을 괴롭힌 놈이 구태우라니….’

범인을 찾았으니, 속 시원하지 않냐고? 천만에. 물리적 공격을 당한 것처럼 온몸이 아팠다. 장예진(가명) 씨는 캄캄해진 눈을 비비고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아이폰이 천근만근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내가 알아차렸다는 걸 구태우도 눈치 챈 걸까? 왜 내 메시지를 확인 안 하지?”

메시지 미확인을 뜻하는 숫자 ‘1’은 카카오톡 대화창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벌써 한 시간째다. 장 씨는 연속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바빠?”
“텔레그램 채팅 내역 전체를 나한테 보내달라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
“구태우, 답 좀 해봐.”
“야… ㅠㅠ”

아무리 물어도 구태우는 답하지 않았다. 두 시간이 흘렀다. 대화창의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 시간, 네 시간이 지나도 역시 그대로. 장씨는 답답해서 울고 싶었고, 화가 치밀어 머리가 아팠다. 썩은 음식이라도 삼킨 듯 속이 뒤틀렸다.

‘구태우는 지금 스마트폰과 노트북을 포맷하며 증거를 인멸하는 건 아닐까….’

잡은 범인은 놓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눈앞에서 그려졌다. 흥분하지 말자고 다짐할수록 내면의 불길은 기세 좋게 번졌다. 구태우의 무응답은 열 시간을 넘겼다. 불길이 지나간 가슴에 하얀 재만 남은 듯했다.

장예진 씨가 구태우를 의심하기 시작한 순간, 구태우는 갑자기 대화를 중단했다 ⓒunsplash

구태우의 마지막 답변으로부터 15시간이 흘렀다. 밤 11시, 카카오톡 대화창에서 숫자 ‘1’이 사라졌다. 구태우가 입장했다.

“미안.”

구태우가 메시지를 보냈다. 내면에 더는 탈 게 없어서인지, 차분해진 장 씨는 냉정하게 대화창을 바라봤다.

‘내가 알아차렸다는 걸 구태우가 모르게 해야 한다. 이게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정돈되니 해야 할 일이 보였다. 이젠 장 씨가 위장할 차례. 확실한 단서, 구태우를 꼼짝 못하게 할 증거를 잡아야 했다. 그래야 이 지긋지긋한 대결이 끝나니까.

“많이 바빴나 보네.”

장 씨는 메시지를 입력했다. 구태우는 태연했다.

“엉. 출근 준비하고 회사에서 상사 때문에 정신이 없었네. 지하철이나 회사에서 텔레그램 음란물을 볼 순 없잖아.”
“그랬구나. 그걸 생각 못하고 너무 재촉했네. 미안.”

구태우는 ‘텔레그램 채팅 전체 내역’을 따로 보내지 않았다. 새벽에 캡처해서 보낸 게 다라고 했다. 장예진 씨는 구태우가 오전에 보낸 사진과 대화 내용을 다시 읽어봤다.

“울학교 능욕러 몇 있음.”

그놈은 텔레그램에 ‘서울대 능욕방’이 있다고 구태우에게 말했다. 구태우가 말하고, 구태우가 답하는 게 분명했다. 그놈과 구태우는 한 몸. 장 씨에겐 그렇게 보였다. 번호가 다른 스마트폰이 하나 더 있거나 혹은 웹브라우저를 따로 띄워놓으면, 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혼자 연기할 수 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구태우는 허위 영상물과 더러운 메시지를 장예진에게 전달했다. “그놈이 보낸 것”이라면서 말이다. 돌려치기 방식으로 자기를 기만하는 듯해 장 씨는 화가 났다.

피해자의 얼굴은 하나둘 늘어났다. 모두 서울대 A학과 출신, 장 씨가 아는 얼굴이었다. 선배 언니들부터 후배들까지, 구태우는 오래전부터 A학과 여성 사진을 수집한 듯했다. 치가 떨리는 그때, 구태우가 그놈에게 물었다.

“다른 과 여자들은 없냐?”

자신을 의심하는 장 씨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는 듯이, 구태우는 장 씨의 퍼즐을 허물기 시작했다. 가해자는 분명 A학과에 있다는 전제로 범인을 추적해왔는데, 그게 아닐 수 있다고? 그놈은 신나게 허위 영상물을 구태우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이× 알아? 내가 먹었던 ×이야.”

새로운 피해 여성 등장. 장 씨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놈은 여러 여성의 허위 영상물을 보내기 시작했다. 피해자 정보도 자랑하듯이 떠벌렸다.

“서연우(가명) ×은 B학과 ○○학번 에이스야.”
“이×은 B학과 걸레. 최○○.”
“중딩, 고등도 서울대라니까 좋다고 환장해서 먹는다 ㅋ”

그동안 피해 여성들은 모두 서울대 A학과 출신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피해자 범위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pixabay

구태우가 서울대 B학과 여학생을 이렇게 많이 안다고? 장 씨의 호흡이 가빠졌다. 그놈이 언급한 여성이 정말 B학과를 다녔는지 인맥을 동원해 추적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도 뒤졌다. 같은 이름의 여성이 많게는 수십 명씩 검색됐다. 손에서 땀이 났다. 시간은 벌써 새벽, 창밖이 푸르스름했다.

그놈 말대로, 서연우는 서울대 B학과를 졸업했다. 다른 피해 여성도 마찬가지다. 장 씨는 서연우에게 인스타그램 메시지로 “혹시, A학과 구태우를 아느냐”고 물었다. 곧바로 “모르는 사람”이라는 답이 왔다.

구태우를 향한 의심이 반토막 났다. 절반의 의심은 여전했으나, 이건 분명 치명타였다. 범인을 A학과에서만 찾았는데, B학과 출신일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동안 틀림없다고 확신했던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장 씨는 친구 유정희(가명), 주진희(가명), 강소윤(가명)을 불러모았다. 장 씨와 친구들은 그동안 맞춰온 퍼즐을 미련 없이 허물었다. 기본 전제를 다시 짰다.

  • 그놈은 서울대 출신이다.
  • A학과 혹은 B학과를 다녔다.
  • 두 학과에 공범이 있을 수 있다.
  • 그놈은 A학과 장예진·유정희·주진희·강소윤, B학과 서연우 등과 카카오톡 친구다.

B학과라는 단서 하나만 추가됐는데 할 일은 장마철 강물처럼 몇 배로 불었다. 그러는 사이 그놈이 낄낄대며 조롱하는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는 더 늘어났다. C학과, 로스쿨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 강물은 이제 탁한 황톳물을 넘어 진흙탕이 됐다.

장 씨와 친구들은 그 더운 여름에 발로 뛰며 피해 여성들을 만났다. 이른바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을 추적해 범인 검거에 큰 기여를 한 ‘추적단 불꽃’의 구성원인 ‘단’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꼬일 대로 꼬여버린 사건, 이런 때일수록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구태우를 향한 의심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다. 다만, 구태우와 서연우는 카카오톡 친구가 아니어서 범인일 가능성은 절반 밑으로 떨어졌다. 퍼즐 조각을 다시 맞추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A학과·B학과에 나란히 발을 걸친 사람부터 추렸다. 복수전공, 전과 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람을 찾았다. 그런 다음 피해 여성들과 카카오톡 친구인 인물로 범위를 다시 좁혔다. 탁한 진흙탕 속에서 조금씩 한 남자의 윤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퍼즐을 맞춰 나갈수록 두 번째 용의자의 얼굴이 점점 그려졌다. 그 얼굴은 바로… 일러스트 오지원. ⓒ셜록

아직은 흐릿한 이 남자의 정보를 구태우에게 보냈다. 잠시 뒤  구태우가 한 조각의 퍼즐, 중요한 정보를 답장으로 보냈다. 진흙탕 속의 남자와는 카카오톡 친구이자, 10년 전 동아리 활동 사실까지 알 만한 사람이라는 대답.

장예진 씨는 그 정보의 조각을 비어 있던 퍼즐판에 끼워넣었다. 드디어 한 남자의 얼굴이 완성됐다. 구태우에 이어 용의자가 한 명 더 늘었다.

‘설마….’

장 씨는 애써 찾은 남자의 얼굴 앞에서 눈을 감아버렸다.

(*5화 <피해자가 잡은 ‘서울대 딥페이크’ 용의자, 경찰이 풀어줬다>로 이어집니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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