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과 함께 보디빌딩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를 담은 기사 <제자들과 한 100일의 약속… 공고 교사의 ‘목마른’ 변신>이 나간 이후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대구MBC ‘여론현장’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입니다. ‘몸짱’ 기사 잘 봤습니다. 설 특집으로 학생과 함께 출연하실 수 있을까요?”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를 연재하면서 다양한 피드백이 있었지만, 방송 출연 요청은 처음이었다. 실습 현장에서 죽거나 다치는 이야기가 아닌 걸로 공업고등학교 학생이 방송에 나오는 건 흔치 않은 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2023년에 진행한 ‘자기성장 프로젝트’도 홍보할 수 있으니 학교와 대구교육청도 좋아할 듯했다. “오케이!”를 외치려는 순간, 걱정이 올라왔다.
‘요즘 대세는 보이는 라디오인데, 혹시 방송에서 벗어야 하나?’
공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나는 작년에 이어 올해 ‘헬스부 2기’를 모집해 학생들을 지도할 예정이다. 두 가지를 결심했다. 하나는 생활스포츠지도사 2급(보디빌딩) 자격증 취득. 다른 하나는 90kg까지 살찌우기이다.
자격증은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필요하고, 살찌우기는 더 멋진 몸을 위한 새로운 도전 일명 ‘벌크업’이다. 작년 첫 보디빌딩 대회는 68kg에 도전했다. 몸집을 키우는 지금 몸무게는 80kg, 그 탓에 복근이 희미해졌다. 자랑하고 싶어도 내세울 복근이 별로 없다. 그래도 벗으라면 벗겠다고 결심했는데, 작가님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순간 민망했다.
동연이(가명)에게 연락해 방송 출연 의향을 물었다. 아무리 좋은 일이어도 주인공인 학생이 반대하면 안 하는 게 맞다. 동연이는 작년 WNC(World Natural Championship) 보디빌딩 부산대회에서 고등부 1등을 했다.
“샘! 대박! 진짜요? 방송국에서는 왜 우리를 보고 싶어 해요?”
“우리가 신기한가 보지 뭐.”
“샘! 가요, 가요! 제가 언제 또 방송에 출연하겠어요?”
자신감인지 순수함인지, 동연이는 긴장 없이 기뻐했다. 라디오 출연은 총 25분. 우리 학교 학생들, 동료 교사들, 교육청 관계자들까지 다 들을 텐데, 두서없이 버벅대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작가님에게 받은 예상 질문지를 동연이에게 전달했다. 자신감 넘치던 동연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질문이 이렇게 많아요? 그냥 말해도 힘들 것 같은데, 방송에서 이렇게 많은 걸 어떻게 다 말해요?”
질문은 20개가 넘었다. 발표를 많이 해보지 않은 공고 1학년 학생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연이는 질문지를 받고서야 방송 출연의 무게를 느끼는 듯했다. 길은 준비와 연습뿐이었다.
공고에서 국어교사에게 배정되는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학생들의 취업 면접 준비다. 기업 면접관이 할 법한 예상 질문을 뽑아 학생과 답변을 작성하고, 반복 연습을 통해 자연스러운 발표를 완성하는 것.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20대 중후반에 하는 그 일을, 나는 십대 후반의 제자들과 수백 번을 했다. 예행연습은 우리에게 공기처럼 익숙했다.
“동연아, 샘이 먼저 질문에 대한 답을 작성해서 보낼게. 너도 전체 흐름을 보면서 대답을 적어봐. 글을 쓴다는 느낌보다는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가는 게 좋아.“
동연이 대답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이 없었다. 열심히 운동해 몸을 만들고, 무대 위에 올라 많은 사람 앞에서 포즈를 잡던 그 당당함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 상황, 기분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게 녀석에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방송국에서도 당당하게 말하는 경험과 자신감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역시 길은 꼼꼼한 준비와 연습뿐이었다.
10개의 질문에 답변을 작성하는 데 약 2시간 걸렸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말을 다듬었다. 동연이도 오랜 시간을 들여 답변을 써왔다.
나는 헬스부 교사이기도 하지만, 1년간 주 3회 이상 동연이를 가르친 국어교사다. ‘참신한 글쓰기, 한 학기 책 한 권 읽기, 매력적인 사람 되기 프로젝트’ 등은 국어 수업의 핵심 과정 중 하나였다. 동연이가 써온 답변지를 보니, 지난 1년의 국어 수업으로 성장한 게 보여 뿌듯했다.
스스로 썩 괜찮은 국어교사라는 우쭐한 생각에 빠져 동연이가 작성한 답변지를 쭈욱 읽는데, 아래로 갈수록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질문 : 헬스부를 소개해주세요.
답변 : 휴대폰 중심의 현대사회 일상에서 건강한 취미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우리 헬스부는…
그동안 글쓰기 과제를 하면서, 동연이는 이런 식으로 글을 쓴 적이 없다. 주로 구어체로, 줄임말을 빈번하게 사용했다. 무엇보다 ‘현대사회’, ‘건강한 취미’ 같은 어휘를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슬쩍 떠봤다.
“동연아, 아래로 내려갈수록 글에서 너 말고 다른 존재가 자꾸 보이네. 누굴까?”
“사실은… 챗GPT에게 도움을 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어떻게든 답변지를 완성하겠다는 녀석의 의지로 받아들이고 크게 한 번 웃고 넘어갔다. 여러 번 수정을 거쳐 답변을 완성한 우리는 고시생처럼 달달 외웠다.
우리가 출연할 라디오 프로그램 ‘다시듣기’를 통해 인트로 음악이 끝나는 순간 재생을 멈춘 뒤, 마치 실제 방송국에 온 것처럼 연습을 하기도 했다. 서로 아나운서와 답변자 역할을 교대로 바꿔가면서 말이다. 연습이 거듭될수록 동연이는 점점 편안하게 자신의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드디어 찾아온 방송 녹음일. 스튜디오에 앉아마자 진행자 김혜숙 아나운서가 물었다.
“자기소개를 해주실까요?”
“저는 대구 ○○공업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 지한구입니다.”
“추가적으로 더 설명해주실까요?”
마이크 음량 확인을 위한 요청일 뿐이었는데, 머리가 하얘졌다. 우리는 철저히 질문지 순서에 맞춰 답변을 준비했다. 질문이라는 버튼만 누르면 답변이 술술 나오는 기계처럼 거의 프로그래밍 된 상태였다.
그런데 예정에 없던 돌발질문이라니! 고장 난 기계처럼 머릿속이 뒤엉켰다. 제자 동연이가 당황해 하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사전 녹음이어서 다행이었다.
김혜숙 아나운서가 “편안하게 말씀하시다가 뭔가 떠오르면 그냥 말해도 되고, 인터뷰가 끝났어도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라”고 위로해줬다. 동연이가 뭔가 결심한 듯 말했다.
“샘, 우리 그냥 답변지 없이 말해요. 괜히 종이를 참고하다가 더 말이 꼬일 것 같아요.”
교사로 일하다 보면 학생에게 배울 때가 많은데, 이 순간도 그랬다. 동연이는 나보다 확신에 차 있고 담대해 보였다. 오히려 녀석이 나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듯했다.
“그래, 그렇게 할까?“
동연이는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꼬리를 내렸다.
“아니야. 샘은 너무 불안하다. 그냥 답변지 펴놓고 해볼게.“
나는 답변지 네 장을 책상 위에 병풍처럼 펼쳤다. 언제든지 참고할 수 있도록 눈으로 순서를 익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미 엉켜버린 회로가 영영 회복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음악과 함께 프로그램 시작을 알리는 진행자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교육현장이 달라질 수도 있음을 이분들을 통해서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동반성장을 이루어낸 ○○공고 헬스부 주인공들을 잠시 후 스튜디오로 모시겠습니다. 설 선물 보따리처럼 마음에 묵직한 울림을 안겨드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방송이 시작됐고, 순식간에 30분이 흘렀다. 동연이의 예상대로 답변지에 적힌 것은 한 글자도 보지 못했다. 능숙한 진행자에 이끌려 지난 일을 천천히 소개하다 보니 이미 녹음이 끝났다.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동연이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 스튜디오에서 동연이는 나보다 차분하게 진행자와 말을 주고받았다. 녀석은 확신에 찬 눈빛으로 지난 일들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방송국에서 덜덜 떤 모습을 보여 제자에게 보여 부끄러운 건 아니다. 이전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아이들이 스스로 입증할 때, 오히려 교사는 안도와 행복을 느낀다.
김혜숙 아나운서가 “헬스부 활동으로 삶의 어떤 점이 크게 달라졌느냐”고 물었을 때 동연이는 이렇게 말했다.
“중학교 시절엔 발표도 못하고, (학교에서) 잠만 잤는데 지금은 그때와 달라졌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전 국민 앞에서도 말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생겼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중학생처럼 보인 아이였는데, 동연이는 그새 몸도 마음도 훌쩍 자라 있었다. 같은 질문이 나에게도 떨어졌다.
“교사로서 어떻게 아이들에게 다가갈까 늘 고민을 합니다. 헬스부가 보디빌딩 대회에 나갔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 달간 매일 학생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저에게는 학생에게 연결되는 마법의 통로가 하나 생긴 느낌입니다.”
‘라디오 방송 하나로 왜 이리 호들갑이냐’ 싶은 독자도 있을 듯하다. 25분 출연을 앞두고 고시생처럼 답변지를 외우고 예행연습을 거듭했다는 대목에선 웃음이 나왔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좋다. 누가 뭐래도 우리에겐 소중한 경험이었고, 뭔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했다.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연재 첫 번째 기사에서 밝혔듯이, 어떤 모임에서건 “공고에서 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면 사람들의 눈빛은 다소 차가워진다. 학력을 중심으로 위계와 서열이 촘촘한 한국 사회. 교사도 이런 취급을 받는데, 공고 아이들의 일상이 어떨지를 상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든 교육 문제가 입시, 학력으로만 다뤄지는 세상에서 공고 아이들은 언제나 논외다. 이들에게 말을 걸거나 관심을 보이는 어른은 별로 없다. 말을 거는 사람이 없어, 발언할 기회조차 없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변방의 외부인’로 여기며 살아간다.
나는 내가 가르치는 공고 아이들에게 계속 말을 걸고, 마이크 쥘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다. 누구든 스스로를 표현할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방송에서 김혜숙 아나운서는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내게 했다.
“우리 교육이 대학입시 중심으로 흐르다보니, 상대적으로 비인문계 학생들은 소외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현직 교사로서,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아요.”
일종의 다짐과 약속 차원에서 나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일반고와 직업계고로 나눈 것은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이잖아요. 아이들은 아이들일 뿐이거든요. 순수하고 착하고 꿈 많고 열정적이에요. 이 아이들이 제 길을 잘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우리 교사들의 역할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살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많은 선생님들이 애를 쓰시고, 우리 학생들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이 친구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한구 교사 longlong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