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인권적 관점에서 걱정되는 바가 있습니다. (…) 밝혀지는 대로 착착 진행하겠습니다.”
송두환 국가인권위원장의 약속은 어디로 갔나. 지난해 8월 30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거부 관련 인권침해 진정을 두고 한 약속 말이다.
하지만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거부는 인권침해 여부도 판단받지 못한 채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지난 2일,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거부 관련 인권침해 진정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렸다. 전체 피해자 중 일부가 같은 취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는 게 결정의 이유.
인권위가 해당 진정을 조사한 기간은 약 6개월. 이 기간 동안 두 차례나 사건처리 지연을 통보했다. 그러면서도 인권위는 출입거부를 당한 시민들을 한 차례도 직접 조사하지 않았고, 피진정기관에 대한 조사만 진행했다. 진정에 참여한 시민들이 “인권위도 엉망진창”이라며 분노를 숨기지 못하는 이유다.
문제의 시작은 지난해 7월이었다. 김은희 ‘온전한생태평화공원조성을 위한 용산시민회의(이하 용산시민회의)’ 대표는 개인 SNS에 윤석열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사진을 게재하며, 대통령실이 주최한 ‘특별전시’를 비판했다. 많은 언론사가 해당 사진을 인용해 보도하자, ‘용산어린이정원에서 아동을 상대로 우상화 교육을 하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크게 일었다.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논란은 ‘블랙리스트’ 논란으로 이어졌다. 김은희 대표는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돌연 거부당했다. 김은희 대표와, 그와 함께 동행한 용산 주민 5명이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거부당한 사실은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관련기사 : <‘윤석열 색칠놀이’ 제보자들, 용산정원 출입금지 당했다>)
셜록의 취재를 통해, 약 30명의 시민들이 용산어린이정원에 출입을 거부당한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여기에는 용산 주민 5명과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진연) 소속 대학생 20여 명 등이 포함된다.
국토교통부로부터 용산어린이정원을 위탁관리 하고 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지난해 7월 신설한 ‘출입제한’ 규정을 근거로 시민들의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막았다.
용산어린이정원 측에 일부 시민들의 출입을 막아달라고 요청한 장본인은 바로 대통령경호처였다. 셜록 보도 이후 대통령경호처는, 용산어린이정원에 이들에 대한 출입거부 조치를 요청한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관련기사 : <대통령경호처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 우리가 요청했다”>)
김은희 용산시민회의 대표와 김수형 대진연 환경동아리 ‘푸름’ 대표 등 시민 24명은 지난해 8월 25일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거부 조치로 인해 인권을 침해당했다며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특정 시민들을 ‘콕 집어’ 출입을 제한하는 조치가 차별이자 인권침해 행위라는 걸 인정받기 위한 취지. 셜록이 이들을 대리해 진정인으로 나섰다.
이들이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당사자에게 출입거부 사유를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 용산어린이정원 측은 출입거부를 당한 당사자 모두에게 ▲출입거부를 요청한 관련기관이 어디인지 ▲출입거부 요청 사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두 번째, 특정인의 출입을 막는 행위는 차별행위라는 점. ‘출입 제한 조항’은 그 자체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정 행위나 물품 반입을 금지하는 것이 아닌 특정 ‘인물’의 출입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
심지어 규정상 출입 제한의 대상이 되는 ‘인물’의 조건과 사유도 밝히고 있지 않다. 특정 기관의 요청에 따라 언제든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의 출입을 막을 수 있는 ‘블랙리스트’ 조항인 셈이다.
하지만 인권위는 지난 2일, 이들이 제기한 진정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렸다. 처리결과는 지난 13일 통지됐다.
인권위 침해구제2위원회(이충상 위원장)는 전체 피해자들 중 일부가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거부 무효 확인 행정소송을 제기했다는 점을 각하 사유로 들었다. 이미 “법률에 따른 권리구제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국가인권위원회법 제32조 제1항 제5호)고 간주한 것.
지난해 10월, 인권위 진정에 참여한 시민 24명 중 4명이 LH를 상대로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거부 무효 확인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김은희 대표와 용산 주민 2명, 김수형 대표가 소송에 참여했다.
인권위의 각하 결정에 진정인들은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인권위가 이번 진정을 조사한 기간은 약 6개월. 이 기간 동안 두 차례나 사건처리 지연 통보를 하며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출입거부를 당한 시민들은 한 번도 직접 조사하지 않았다.
반면, 피진정기관에 대한 조사는 이뤄졌다. 그리고 인권침해 여부에 대해서는 판단도 하지 않고, 행정소송을 이유로 ‘각하’ 결정을 한 것. 6개월을 기다린 것 치고는 너무나 허무한 결과였다.
김은희 대표는 지난 23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난 6개월 동안 인권위 연락을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면서 “인권위 진정에 기대가 컸는데, 6개월 만에 받아든 결과가 결국 각하인 걸 보니 인권위도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현재까지도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거부당하고 있다.
행정소송을 이유로 각하를 결정한 인권위를 비판하는 이유는 또 있다. 같은 사건일지라도, 법적 판단과 인권적 해석은 다를 수 있기 때문. 이는 인권위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인권위는 진정과 동시에 법적 구제절차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서 ‘모든 경우에’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실제로 셜록은 몇 년 ‘검찰과 법원의 법조기자단 외 언론사에 대한 취재권 침해’ 관련 인권위 진정인으로 나선 경험이 있다.
당시에도 인권위 진정과 함께, 서울고등검찰청과 서울고등법원을 상대로 ‘기자실 사용 및 출입증 신청 거부 취소’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인권위는 셜록의 진정을 각하했지만, 동시에 각 기관을 상대로 ‘의견표명’을 진행했다. 기자실 사용 및 출입증 발급 등에서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대우를 하지 않도록 관행이나 제도를 개선하라는 의견이었다.(관련기사 : <“비출입기자단 차별 말아야“.. 인권위, 고법·고검에 의견 표명>)
결국 의지 문제다. 비록 각하 사유에 해당할지라도, 인권위의 의지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 인권위는 6개월 동안 피해자들을 조사조차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다가, ‘행정소송 중’이라는 이유 하나를 내세워 국가 인권기구로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인권위 담당자는 지난 23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피해자 조사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피해자가 (용산어린이정원으로부터) ‘출입거부’ 안내 문자를 받은 주장은 사실이기 때문에 따로 피해자 조사를 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셜록의 법조기자단 관련 진정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그 경우가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라고 해명했다.
다만, 인권위는 용산어린이정원 출입 시 시민들을 상대로 소지품 검사를 진행한 행위에 대해서는 “별건의 진정으로 보고 아직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거부당하고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시민들은 인권위에서도 ‘퇴짜’를 맞았다. 심지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헌법재판소도 지난 1월 11일, 시민들이 제기한 헌법소원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렸다.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거부당한 시민들은 지난해 10월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헌재 역시 행정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각하를 결정했다. “다른 법률에 따른 구제 절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절차를 모두 거치지 않았다”면서, 청구 요건에 충족하지 않았다고 본 것.(관련기사 : <용산어린이정원 출입 거부당한 시민들, 헌법소원도 ‘각하’>)
헌재도, 인권위도 행정소송을 이유로 각하를 결정한 상황. 이로써 시민들이 제기한 행정소송의 의미는 더욱 커졌다.
“(윤석열 정부는) 국민이 모두에게 개방된 공간인 공원에 들어가는 것을 막은 정부입니다.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는 이번 정부가 얼마나 사적 차원으로 정권을 운영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김은희 대표)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거부 무효 확인 행정소송 첫 재판은 3월 7일 오후 2시 40분 서울행정법원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