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속에서 열 달을 자라 세상에 나온 아들이 실수 혹은 범죄의 결과물이라니. 아버지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아들의 출생에 얽힌 수수께끼만 생각하면 엄마는 속이 뒤집어진다.
실수 혹은 ‘범죄’. 후자라면 최악이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가 자기 유전자를 내 몸에 의도적으로 넣은 거니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엄마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시험관 시술에 남편이 아닌 타인의 정자가 이용됐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후 피해자 김연희(가명) 씨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약을 먹으며 일상을 버티고 있다. 진실을 알 법한 중앙대병원의 외면과 이상훈 전 산부인과 교수의 잠적이 김 씨를 더 괴롭게 한다.
가장 큰 피해자는 아들 장도윤(가명, 27세)이다.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여동생과는 졸지에 이부(異父) 남매가 됐으니까. 모든 게 깨지고 달라졌음에도 “나는 괜찮다”며 묵묵히 살아가는 아들의 내면은 또 어떨지…. 엄마의 마음은 오늘도 소금밭이다.
김연희 씨에게 닥친 문제를 취재하는 진실탐사그룹 셜록도 장도윤 씨의 처지를 깊이 고려했다. 진실을 파헤치는 건 그의 정체성을 흔드는 일이기도 하니까. 셜록은 지난해 7월 26일 장 씨를 처음 만났다. 인공수정, 시험관 시술 관련 해외 의사들의 범죄 사례를 이미 알고 있던 장 씨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런 말에 담았다.
“저는 (의료진 누군가의 범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밝히되, 저는 그 결과를 알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건(범죄) 가장 아니길 바라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악의적 행동의 결과로 태어난 거면 어쩌나, 항상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진실이 밝혀지길 바랍니다. 저는 괜찮으니, 이 문제를 끝까지 취재해주십시오.” (지난 1월 15일 인터뷰에서)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는 아들. 곁에 있던 엄마는 괴로운지 휴지로 눈을 닦았다. 모든 가족은 셜록의 취재에 동의했다.
중앙대병원은 1996년 시험관 시술 사고에 대해, 침묵과 은폐로 일관했다. 시술 책임자였던 이상훈 전 교수는 지난해 7월 당시를 기준으로, 2년째 잠적 상태였다. 셜록은 진실을 가장 많이 알고 있을 이상훈 전 교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여러 언론은 이상훈 전 교수를 ‘기부천사’, ‘사랑의 마라토너’ 등으로 보도했다. 그는 기독교 신자로서 의료선교봉사 단체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국내외에서 한 자신의 의료봉사를 숨기지 않고 언론에 홍보해왔다. 그랬던 그는 김연희 씨가 ‘시험관 시술 사고’를 인지한 2021년 8월부터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렸다.
셜록은 중앙대학교와 병원 관계자, 산부인과 의사 등을 6개월간 취재해 그의 소재를 파악했다. 병원 측은 “도무지 연락이 안 된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2018년 정년 퇴직한 이 전 교수는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살고 있었다.
이상훈 전 교수는 잠적생활 중에도 건강관리에 철저했다. 셜록이 그의 동네를 찾을 때면, 그는 언제나 운동 중이었다. 그는 모르는 전화번호를 모두 차단했고, 그의 집은 초인종을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시험관 시술 사고에 대한 반론이나 해명을 들으려면 그를 직접 만나야 했다. ‘부자 간 유전자 불일치’를 안 이후부터 김연희 씨 가족은 완전히 몰락했다. 이들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진상규명을 원했다. “다른 피해자가 있을 수 있고, 앞으로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견해도 밝혔다.
지금까지 나온 가능성은 세 가지다. ▲시술 중 타인의 정자와 바뀐 실수 ▲의료진 포함 타인에 의한 의도적 범죄 ▲중앙대병원이 제기한 김연희 씨의 자연임신(외도). 이 모든 걸 책임 시술자 이상훈 전 교수에게 묻는 건 당연했다.
그는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날인 지난달 28일 오전 9시께 집 밖으로 나왔다. 셜록은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취재진 카메라를 손으로 가리는 등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 김연희 씨가 ‘아버지와 아들 유전자 불일치’를 알린 이후부터 연락이 안 된다고 하는데.
“내가 외국에 자주 나가서 생활한다.”
— 지금도 연락이 안 된다고 하는데.
“한국에 들어온 지 며칠 안 됐다. 다음주에 또 나갈 예정이다.”
— 김연희 씨에게 시험관 시술 한 건 기억하고 있는지.
“(중앙대)병원에 가서 의무기록을 봤다. 시험관 시술 했다는 건 내가 알고 있다.”
그동안 중앙대병원은 “의무기록이 없어 김연희 씨가 우리 병원에서 시험관 시술을 했는지 여부도 확인이 안 된다”고 밝혔다. 거짓말이었다. 이 전 교수는 병원 측과 소통하면서 의무기록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 전 교수는 시험관 시술에서 문제점을 찾아냈을까?
— (부자 간 유전자 불일치인데) 정자가 바뀐 건지.
“글쎄, 너무 오래돼서 잘 모르겠다. 시험관 시술 외 다른 기록이 없으니까 전혀 모르겠더라.”
— 어쨌든 유전자 불일치가 나왔다.
“글쎄, 그게 뭔 얘기인지 잘 모르겠더라.”
— 김연희 씨 가족은 답답하고 힘들어 한다. 유전자 불일치가 떴으니까.
“그 내용을 내가 찾아볼 길이 없어 뭐라 이야기할 게 없다.”
— 지금이라도 김연희 씨 부부를 만나 의견을 나눠봐야 하지 않나.
“김연희 씨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데, 법적인 조치(손해배상청구소송)를 했다니, 나도 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특별하게 기억나는 것도 없고.”
김연희 씨는 2021년 8월께부터 ‘혈액형-유전자 불일치’ 문제를 중앙대병원과 이 전 교수 측에게 문의했다. 이 전 교수는 연락을 끊었고, 병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김 씨의 법적 대응은 병원과 이 교수의 무응답에 대한 대응이었다.
— 2002년께 김 씨 부부가 아들 혈액형 문제로 찾아갔을 때, ‘시험관 시술을 하면 혈액형 돌연변이가 나올 수 있다’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너무 오래된 일이라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 관련 기록도 없다.” (관련기사 : <“엉뚱한 정자로 시술” 20년 속인 산부인과 의사 ‘잠적’>)
— ‘혈액형 돌연변이’를 말한 적 없나?
“글쎄,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유전학적인 것에 관심이 있으니까…. (혈액형 돌연변이는) 일반적인 얘기다.”
— 시험관 시술을 하면 정말 혈액형 돌연변이가 나오나?
“그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다.”
— 일반적으로 부모와 불일치하는 혈액형을 가진 자녀가 태어나나?
“공부한 지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안 난다.”
— 김 씨 부부의 시험관 시술 사고는 중앙대병원에서 벌어진 일인데, 책임을….
“기억나는 게 없다. 의무기록에 없으면 며칠 전 일도 잘 기억 안 난다.”
— 의료사고가 벌어진 건데 중앙대병원 쪽에서 사실 검증, 해명, 사과가 없다.
“그래서 (나와 병원을 대리하는) 변호사한테 해명할 수 있는 건 내가 이야기해줬다.”
김연희 씨 부부는 2022년 12월, 중앙대병원과 이상훈 전 교수를 상대로 손배해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병원과 이 전 교수 측은 재판부에 낸 의견서를 통해, 김연희 씨의 자연임신(외도) 가능성을 주장했다.
또 이 교수는 “시험관 시술에서 내가 하는 일은 난자 채취와 배아이식 과정뿐”이라며 “(난자-정자를 수정시키는) 수정실에서 이뤄지는 일은 내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그럼 자연임신 가능성도 직접 한 이야기인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 시험관 시술 후 자연임신 하는 사람도 있다.”
— 그럼 김연희 씨가 외도를 했다는 뜻인가?
“요즘에는 검사가 정확하니까, 검사하면 알겠지.”
— 의료진 중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다른 정자를 넣은 거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검사를 해보면 된다. 검사 방법이 많으니까.”
— 그럼 직접 검증에 나서면 되지 않나.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 중앙대병원에 근무하는 동안 이런 사고는 처음인가?
“처음이다. 난 경찰서 가본 적도 없다.”
이상훈 교수는 김연희 씨를 1996년부터 약 20년간 진료했다. 출산 후에도 자궁 쪽이 좋지 않던 김 씨는 이 교수에게 계속 진료를 받았다. 아들뿐 아니라 김 씨의 딸도 그가 시험관 시술로 낳게 해줬다.
이상훈 교수는 김 씨에게 참 살가운 사람이었다. 건강정보를 문자메시지로 보내주는가 하면, 해외 의료봉사 활동을 떠나면 현지 사진도 전송하곤 했다.
— 김연희 씨와 오래 소통해왔는데, 갑자기 연락을 끊은 계기가….
“내가 그분과 소통할 일이 뭐가 있나.”
— 이 문제로 중앙대병원과 소통한 적은 있나.
“작년인가 병원에 갔다가 그 얘기를 누가 해줘서 담당자를 만났다. 과거에 함께 일했던 병원 직원들과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연락을 하고 지낸다.”
중앙대병원은 2021년 8월부터 지금까지 “이상훈 교수와 연락이 안 된다”며 김연희 씨 부부를 속여왔다. 이 교수는 작년 11월, 중앙대병원 의료진과 함께 네팔로 의료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올해 1월에도 병원 의료진과 함께 베트남에 다녀왔다. (관련기사 : <시험관시술 사고 ‘외도’로 몰더니, 또 대담한 거짓말>)
이 전 교수는 셜록과의 인터뷰에서 김 씨의 시험관 시술 관련 의무기록은 중앙대병원에 있고, 김 씨의 외도 가능성을 포함해 의도적 범죄에 대해선 “검증하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교수는 여전히 검증에 나서지 않고 있다. 중앙대병원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2005년 3월에 발행된 주간동아에는 이상훈 교수를 다른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사랑 마라톤 6년 감동 레이스”. 해당 기사에는 이상훈 교수의 이런 말이 나온다.
“남을 돕는 것 자체를 내가 좋아하고, 거기서 보람을 찾을 수 있고, 또 인간적 위로를 받기 때문이죠. 남을 돕다 보면, 또 마라톤을 완주하고 나면 환자들에게 더 웃게 되고, 내 생활에 자신감도 붙죠. 요즘 저의 목표는 환자들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2024년 지금, 김연희 씨와 가족들은 웃음을 잃었다. 이상훈 전 교수의 웃음도, 90도 인사도 필요없다. 이들은 이상훈 전 교수에게 직접 해명을 듣고 싶을 뿐이다.
김 씨의 남편 장현수(가명) 씨는 20일 이상훈 전 교수 자택을 찾았다. 이번에도 초인종을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며칠째 전등이 켜지지 않고 있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