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에서 A4용지 한 장을 꺼냈다. 종이는 손바닥 크기로 고이 접혀 있었다. 천 일을 넘게 기다린 김혜주(가명) 씨가 이날을 위해 준비해온 답변서.
그는 첫 문장부터 차근차근 속으로 읽어내렸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자꾸만 마른 침을 삼켰다. 지난 15일, 근로복지공단 소속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 심의에 출석하기 1시간 전 모습이다.
김혜주 씨는 삼성 반도체 노동자였다. 김 씨는 2021년 5월 20일, 삼성 반도체 출신 노동자 2명과 함께 근로복지공단에 ‘태아산재’를 신청했다. 아이의 선천적 질병이 엄마 탓이 아닌, 업무에서 비롯된 산업재해라는 걸 인정받기 위해서다.(관련기사 : <‘임신 8개월’ 반도체공장 근무, 아이 신장 하나 사라졌다>)
김 씨는 1995년 만 17세에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했다. 당시 그는 ‘마스크’(전자회로를 그려놓은 유리판)를 생산하는 라인에 배치됐다. 화학물질이 담긴 30cm짜리 플라스틱 통을 들어 직접 기계에 붓는 일도 김 씨의 업무였다.
김 씨는 이런 일을 임신 8개월 때까지 했다. 그리고 출산 45일 만에 업무에 복귀했다.
김 씨는 2004년 9월 아들 김민준(가명)을 낳았다. 김 군은 왼쪽 신장이 없는 채로 태어났다. 10살에는 ‘IgA신증’을 진단받았다. 이 병은 사구체(모세혈관 다발)에서 단백질과 적혈구가 빠져나가 단백뇨와 혈뇨가 발생하는 염증성 신장 질환이다. 현재 김 군의 오른쪽 신장은 제 기능을 10%밖에 하지 못한다.
“민준이만 보면, 뭐든 ‘안 돼!‘부터 말하니까 속상해요. 신장이 안 좋으니 짠 걸 먹으면 안 되거든요. 애가 운동도 좋아하는데, 몸에 무리가 가면 또 혈뇨를 볼 수 있으니까 자제하라고 자주 말하죠. 민준이한테 늘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2021. 7. 13. 인터뷰 중)
지난 15일, 서울 영등포동에 있는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지사 앞 카페에서 김 씨를 만났다. 기자는 답변서 낭독을 연습하는 김 씨를 향해, 어떤 내용을 가장 강조하고 싶은지 물었다. 김 씨는 손가락으로 한 대목을 가키며 명료하게 답했다.
“다른 거 있나요. ‘산재가 통과되기를 바랍니다’죠.”
그날 오후 1시 30분, 김 씨는 근로복지공단으로 향했다. 근로복지공단 앞에는 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들이 이미 나와 있었다. 활동가들은 그 앞에서 1인시위를 진행했다.
“반도체 아이들의 아픔, 태아산재 인정하라”
“3년이나 기다렸다. 반도체 2세 산재 인정하라”
김 씨는 반올림 활동가들의 응원을 받으며, 공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함께 태아산재를 신청한 삼성 반도체 출신 노동자 김은숙 씨도 도착했다.
“마지막이라고 해서 (왔습니다). 오랜만이에요.”
김 씨의 아들은 ‘선천성 거대결장증‘을 앓았다. 거대결장증은 대장에 신경이 발달하지 않아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장애를 말한다. 아이는 돌이 갓 지난 무렵,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대장을 잘라내고 소장과 직장을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다. (관련기사 : <‘반도체 아이들’ 희망 위해… 시민 800명 힘 모았다>)
김은숙 씨는 반올림 소속 조승규, 이종란 노무사와 함께 근로복지공단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22일, 삼성 반도체 출신 노동자 3명이 신청한 태아산재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태아산재 승인을 신청한 지 1037일 되는 날이었다.
“생식독성은 표준 노출 기준에서 그동안 간과해온 질병 영역으로 태아의 노출기준 등은 설정되어 있지 않아 근로자의 노출기준으로만 비교하여 낮은 수준으로 노출되었다고 단정짓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 선천성 기형이 있는 경우 출산 전에 유산으로 종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반도체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 근로자에서 자녀의 선청성 기형 위험이 증가한다는 간접적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반도체 직무에서 태아산재를 인정받은 첫 번째 사례다. 일명 ‘태아산재법’이 통과된 날(2021년 12월)로부터 약 2년 3개월 만이다.
‘태아산재법’은 여성노동자의 임신 중 업무상 유해환경에 의해 태어난 자녀에게 발생한 선천성 건강질환에 대한 산재보상을 해주는 법으로, 지난해 1월 12일부터 시행됐다. 다만, 남성 노동자의 업무상 유해환경에 의해 태어난 자녀의 선천성 질환에 대해서는 아직 법적으로 보장하지 않고 있다.
반올림은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판정은) 별다른 이름 없이 반복되는 반도체 노동자들의 생식독성 피해에 대해 업무상 재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반도체뿐만 아니라 건설업, 보건업 등 다양한 산업에서 생식독성으로 인한 건강손상 위험이 있다는 점,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근무한 경우에도 위험이 높아졌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김혜주 씨도 태아산재 인정 소감을 밝혔다.
“저희 아이처럼 아픈 가족들의 존재가 더 가려지지 않고 드러나서 더 많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산재가 인정되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우리 아이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2021년 7월부터 약 3년 동안 총 23편에 거쳐 ‘태아를 수급 주체로 인정하는 산재법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집중 보도해왔다. 셜록의 보도 이후 같은 해 12월, 태아산재법이 통과됐다. (관련기사 : <태아산재법, 국회 본회의 통과>)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2022년 10월, ‘태아산재’에 고려되는 유해요인을 좁게 인정하는 시행령을 추진했다. 셜록은 법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시행령 제정을 요구하고자, 시민 803명과 함께 ‘태아산재법 입법예고 의견제출’을 진행했다. 이에 고용노동부는 “건강손상자녀 관련 지침 등을 마련하겠다”고 응답했다.
한편, 삼성전자 LCD(현 삼성디스플레이) 출신 남성 노동자가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한 태아산재 사례는 아직 조사 중이다. 아버지의 업무 환경으로 인해 태아산재를 신청한 국내 최초 사례다.
현재 고용노동부 산하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아이의 선천성 질병이 아버지의 업무에서 기인한 게 맞는지 심의하기 위해서다.
반올림은 “연구를 통해 (태아산재에 있어서) 아버지 업무의 영향이 확인된 만큼 산재보험법이 속히 개정돼야 한다”면서, “위 사례의 역학조사가 끝나기 전에 산재보험법 개정돼서, 아버지의 업무에서 기인한 태아산재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