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첫 만남 장소로 정한 곳은 방앗간이었다. 웬 방앗간?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하니 충북 청주시 외곽에 분명 존재했다.
‘서울 시청역에서 충북 청주시 황미방앗간까지 약 1시간 50분.’
벚꽃이 한창이던 4월 초 늦은 오후, ‘사채왕’ 김상욱에게 당한 대출사기 피해자를 만나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지체하면 퇴근시간과 겹쳐 도로가 꽉 막힐 게 뻔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허기가 점점 커졌다. 머릿속 의문도 부풀어 올랐다.
‘김상욱에게 약 7억 원이나 털린 김창숙(가명, 1960년생) 씨는 캄캄한 저녁에 왜 방앗간에서 보자는 걸까? 무슨 사연이라도 있나?’
김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방앗간 말고 식당에서 뵈면 어떨까요?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황미방앗간이 밥집이에요. 식당 이름이 그래요. 그런 것도 모르고 서울서 출발하셨어요?”
타박 아닌 타박에 말문이 막혔다. 김창숙 씨의 목소리가 그 공백을 메웠다.
“전주식당이 전주에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체인점 고래식당은 고래들이 밥 먹는 덴가요? (웃음) 아니 그 방앗간을 진짜 방앗간으로 알면 어떡해요? 아이고 웃겨라. 하하하.”
웃음 섞인 허스키한 목소리가 높은 톤으로 두서없이 이어졌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의 말 치고는 너무 허물없고 편안했다. 여러 지명과 식당 이름이 계속 튀어 나왔다. “곧 뵙겠다”는 말로 겨우 그의 이야기를 끊었다. 잠시 머리가 멍했다.
황미방앗간 주차장에 도착하자 챙이 큰 분홍색 모자를 쓰고 긴 원피스 치마를 입은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손엔 초록색 손가방을, 왼손엔 주황색 ‘루이비통’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김창숙 씨였다.
황미방앗간은 청국장 전문점이었다. 족히 100평은 될 듯한 식당의 주방 쪽엔 추가 반찬과 보리밥을 내놓은 셀프 바(self bar)가 있었다. 김 씨는 자리를 잡자마자 모자를 벗지도 않고 셀프 바 쪽으로 가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주 메뉴가 나오기 전에 눈앞의 상은 보리밥과 반찬으로 벌써 가득 찼다.
“제가 보리밥을 좋아해서….”
김 씨는 보리밥부터 비벼 먹기 시작했다. 돈가스가 서비스로 나왔는데, 이것도 금방 사라졌다. 고개 숙여 식사할 때면 분홍색 모자챙에 가려 김 씨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먼 길을 달려온 나보다 더 허기진 듯했다.
“제가 조울증이 심해요. 기분이 푹 꺼지거나 확 올라갈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말도 두서없이 나오기도 하고….”
그제야 앞의 상황이 이해됐다. 김 씨가 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무슨 행동을 했나 기억이 안 날 때도 있어요. 제가 오락가락하더라도… 이해를 해주세요.”
주문한 솥밥과 청국장이 나왔지만 김 씨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보리밥을 다 비운 뒤에야 솥밥을 보고 놀란 듯이 말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솥밥이 언제 나왔데?”
이미 상당한 양의 보리밥을 먹은 김 씨는 솥밥을 먹기 시작했다. 돈가스, 보리밥에 이어 솥밥도 다 비웠다. 그야말로 대식가였다. 식사를 마치고 바로 위층의 베이커리 카페로 이동했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주문한 김창숙 씨는 주문대 앞에 서서 내 눈치를 살폈다.
“저기… 빵도 좀 먹어도 괜찮을까요?”
김 씨는 쟁반에 빵을 담기 시작했다. 식빵부터부터 단팥빵까지, 쟁반이 금방 채워졌다. 김 씨는 한결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한 커피와 잔뜩 쌓인 빵을 앞에 두고 김 씨는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 씨의 사기피해는 그의 정신질환과 관련 있었다.
김 씨의 조울증 등 기분장애는 2015년께부터 심해졌다. 주기적으로 입원해, 길게는 수 개월간 정신병원에서 생활한 적도 있다. 꾸준히 통원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그것마저 중단됐다.
“약을 먹으면 좀 좋아지는데, 제가 몇 개월째 약을 못 먹었어요. 서울 ○○병원으로 다니는데, 차비가 좀 비싸요? 김상욱, 이○○에게 당하고 제가 더 엉망이 됐네요. 도시가스비도 못 내 끊겼는데, 어떻게 서울을 갈 수 있겠어요?”
김 씨의 상당한 식사량은 정신질환 탓만이 아니었다. 그는 “밥다운 밥을 오랜만에 먹었다”고 했다. 정말로 배가 고팠던 것이다. 질병과 싸우며 끼니를 걱정하는 김 씨는 감당하기 어려운 빚에도 짓눌려 있다. 방만하게 산 것도, 무리한 사업을 한 것도 아니다.
1500억 원 불법대출로 청구동새마을금고를 문 닫게 한 ‘사채왕’ 김상욱과 그의 오른팔 이○○, 청주를 담당하는 브로커 최○○가 김창숙 씨를 무너뜨렸다.(관련기사 : <새마을금고 뱅크런의 진실, ‘사채왕 리스트’에 있다>)
김창숙 씨는 중산층으로 꽤 안정적으로 살았다. 정신질환으로 “기분이 출렁이고, 종종 기억이 끊기는” 김 씨를 남편과 자녀들이 돌봤다. 정신병원 입원도 돌봄과 치료의 일환이었지, 원치 않는 감금이 아니었다. 2022년 가을, 지인들 사이에서 이상한 말이 돌았다.
“서울에서 사업하는 김상욱 회장에게 명의만 빌려주면 바로 2000만 원을 줍니다. 3개월이면 문제없이 모든 게 정리되고, 벌써 쉽게 돈 번 사람이 많아요!”
김 씨는 돈이 급하지 않아 관심이 없었다. 조울증 등 정신질환이 심할 때여서 지인들의 말이 이해되지도 않았다. 우연인지 일부러 그때를 노린 건지, 한 지인이 김 씨를 꼬드겼다.
“다들 앉아서 2000만 원 버는데, 그거 안 하면 바봅니다, 바보!”
‘바보’는 김 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었다. 김 씨는 “나도 그 판에 끼겠다”고 덜컥 결심했다. 김 씨는 2022년 12월, 지인들과 차를 타고 서울 신설동에 있는 카페 하타○○로 향했다. 그냥 보기엔 평범한 카페지만, 실제로는 ‘사채왕’ 일당의 아지트로 쓰이던 그곳. 김상욱과 전종남 당시 청구동새마을금고 상무 등을 거기서 처음 만났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김 씨는 이 서류 저 서류에 사인을 하고 도장을 찍었다. 김상욱과 전종남은 김 씨 앞에서 기분 좋게 떠들었다. 김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두 사람이 사람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떠들더라구요. 조용해져서 정신을 좀 차려보니까, 제가 집으로 내려가는 차에 타고 있더라구요.”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다고 자책하기엔 이미 늦었다. 김 씨가 사인하고 도장 찍은 건, 경기 평택시에 있는 신축 빌라 두 채를 담보로 해서 김 씨가 약 7억 원을 대출받겠다는 서류였다. 브로커 최○○는 대출한도를 높이기 위해 김창숙 씨 명의로 ‘페이퍼컴퍼니’도 만들었다.
김 씨는 이 모든 일을 금방 잊었다. 대출 구조와 이자율, 김상욱 일당의 변제 계획을 누군가 설명해도 어차피 김 씨는 이해할 수 없는 처지였다.
김상욱 일당은 명의 대여의 대가로 약속한 돈 2000만 원을 김 씨 지인의 계좌로 보냈다. 김 씨가 이 돈을 온전히 다 가진 것도 아니다. 서울의 김상욱 일당에 이어, 지인들이 “정신이 하나도 없는” 김 씨의 돈을 소개비 명목으로 야금야금 받아갔다. 김 씨는 “900만 원 정도 손에 쥐었다”.
2023년 봄부터 이자 납부를 독촉하는 문자메시지와 우편물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김창숙 씨가 거대한 사기사건의 피해자가 됐다는 걸 남편과 아들이 알아차렸다. 김상욱 일당은 대출금 약 7억 원이 김 씨 계좌에 들어온 날, 3개월 치 이자를 제외하고 약 6억 9000만 원을 김 씨 몰래 현금으로 빼갔다. 김창숙 씨에겐 7억 원의 ‘빚’만 그대로 남았다.
김 씨에게 공기처럼 익숙한 모든 것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들이 정신질환을 앓는 저를 오랫동안 돌봤거든요. 병원비도 많이 쓰고. 그렇게 착한 사람들이 없어요. 근데, 7억 원이란 빚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모든 가족이 저 때문에 지치고 실망하고, 괴로워했죠.”
김 씨는 2023년 7월, 평생을 함께한 남편과 이혼했다. 김 씨는 “이혼해줬다”고 표현했다. 그게 남편을 빚으로부터 보호하는 길이기도 했다. 아들과도 멀어졌다. 김 씨는 “그게 아들 삶을 지키는 엄마의 도리”라고 말했다.
김 씨는 청주시 상당구에 있는 월세 40만 원짜리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갑자기 혼자가 된 김 씨 곁엔 온통 밀리고 체납된 것들 투성이다.
월세는 2024년 4월 기준 4개월 치, 건강보험료는 셀 수 없이 밀렸다. 도시가스는 3월부터 끊겼다. 난방과 온수 사용은 물론이고 음식도 조리할 수 없다. 견디다 못한 김 씨는 주민센터를 찾아가 “춥고, 배고 고프고, 돈이 없고, 머리가 어지럽다”고 두서 없이 호소했다. 주민센터는 긴급생활지원금 70만 원을 지급했다.
“제가 평생 누구한테 돈을 구걸한 적 없는데, 그때는 정말 자존심이 상하더라구요.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나… 하는 생각도 들고. 모든 가족에게 미안하고…. 제가 정신이 없어서 뭐가 뭔지 잘 이해는 안 되는데, 미안한 사람 투성이에요.”
대화를 마치고 김 씨를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는 길. 운전석 옆에 앉은 김 씨는 두 손으로 빵 봉지를 꼭 쥐고 있었다. 카페에서 빵을 하나도 먹지 않았다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내 눈길이 신경 쓰였는지 김 씨가 울먹였다.
“빵은 내일 먹으려구요. 집에 먹을 게 없어서…. 가스가 끊겨 음식 만들기도 어렵고…. 제가 사는 게 좀 그렇습니다.”
김 씨에겐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고 버티는 게 일이었다. 대출사기 피해자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사채왕 김상욱은 수억 원짜리 최고급 세단 마이바흐를 현금으로 사고, 280만 원짜리 에르메스 티셔츠를 입고, 1인당 한 끼 식사가 25만 원이나 되는 시그니엘서울 레스토랑에서 공범들과 호화로운 삶을 즐겼다.(관련기사 : <유흥주점 텐트에서 잠드는 아이… “사채왕이 망친 삶”>)
김창숙 씨는 “사는 집을 보여주는 건 좀 그렇다“며 집과 한참 떨어진 대로에서 내렸다. 김 씨는 아까부터 들고 있던 ‘루이비통’ 로고가 새겨진 종이가방을 내게 내밀었다.
“서울에서 내려와 밥도 사주셨는데, 저는 줄 게 하나도 없어서요. 대출사기 피해자들 만나러 전국 다니실 텐데, 출출하실 때 드세요. 제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네요. 전기포트로 삶았는데, 잘 익었나 모르겠네요.”
가방에 든 건 삶은 달걀 네 개, 두유 하나, 음료수 한 병이었다. 현장을 떠나며 사이드미러로 김창숙 씨를 바라봤다. 김 씨는 내 차가 멀리 떠날 때까지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을 가린 분홍색 모자가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김 씨는 지난해 봄, 가족들의 도움으로 김상욱과 그의 오른팔 이○○, 그리고 전종남 전 청구동새마을금고 상무를 고소했다. 김상욱과 전종남은 지난달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보도가 시작된 이후에야 구속됐다.(관련기사 : <[해결] 셜록 보도 6일 만에 ‘사채왕’ 김상욱 전격 구속>)
요즘도 김 씨는 “기분이 확 좋아지면” 자주 전화를 걸어온다. 김상욱이 구속돼 너무 다행이라고 높아진 목소리로 몇 번을 반복한 뒤엔 꼭 이렇게 묻곤 한다.
“제가 떠안은 빚 7억 원은 어떻게 해결될 길이 있을까요? 제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근데, 기자님 청주에는 또 언제 오세요? 또 오시면 좋겠는데….”
이렇게 연락이라도 오면 다행이다. “기분이 푹 꺼지면” 연락 자체가 안 된다. 전화기는 아주 오랫동안 꺼져 있다.
한편, 김상욱은 지난달 16일 셜록과 한 전화 통화에서 “나도 피해자다, 불법대출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러 번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후 문자메시지로 재차 취재 협조를 요청하자 김상욱은 “관련자들의 허위주장과 모함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취재를 거부했다. 그리고 만약 취재진이 자신을 찾아온다면 “건조물 침입 등으로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입장을 보내온 바 있다.
전종남 전 청구동새마을금고 상무에게도 연락을 시도했다. 세 번째 통화 시도 만에 그와 1분가량 통화할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좀 바쁘다”, “아니다”라는 답변만 남긴 뒤 급히 전화를 끊었다. 이후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