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지검장과의 식사 자리에 데려갈 만큼 신뢰한 ‘똘마니’가 배신하다니. 경찰 수사를 받는 와중에 ‘범죄 정황이 담긴 통화녹음 파일 900개’가 유출돼 일이 더 꼬여버렸다. “바다에 수장해버린다”는 협박도, 건장한 ‘문신’ 청년 8명과 망치를 동원해도 꼬인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시각장애인 등에게 사기를 쳐 감옥에서 6년을 살고 나온 게 겨우 2년 전인데, 또 들어가라고? 이번 범죄는 이전 것을 훌쩍 능가하는 약 1500억 원 불법대출. 다시 수감되면 몇 년을 더 썩어야 한단 말인가.
진퇴양난에 빠진 ‘사채왕’ 김상욱(52)은 다른 전술을 고민했다. 유출된 통화녹음 파일을 회수하기 어렵다면, 그걸 쥔 사람을 ‘제거’하는 쪽으로 말이다.
청구동새마을금고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를 부른 ‘1500억 원대 불법대출’의 총지휘자는 김상욱, 공범은 김재민(32) 전 무궁화신탁 대리다.(관련기사 : <새마을금고 뱅크런의 진실, ‘사채왕 리스트’에 있다>)
김재민은 지난해 3월부터 김상욱과의 모든 통화를 녹음했다. 통화녹음 파일은 사고 혹은 실수로 유출된 게 아니다. 김재민이 의도적으로 흘렸다. 여기에는 그의 범죄가 관계돼 있다.
김재민은 무궁화신탁에 관리형토지신탁 방식으로 상가 건물을 짓던 A 시행사 대표 최태진(가명)과 가깝게 지냈다. 김재민은 이런저런 구실로 최 대표에게 금품과 술 접대를 받았다. 최 대표는 김재민의 도움을 받아 공사비 일부를 빼내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이런 와중에 김재민이 A 시행사의 공사비 약 9억 원을 횡령해 벤츠 승용차를 구입하는 등 사적으로 사용한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횡령 사건이 발각된 지난해 7월, 김재민은 최 대표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사채시장 큰손 김상욱 회장의 지시로 제가 불법대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큰 범죄여서 이제 그만 하고 싶은데, 김 회장의 협박이 두렵습니다. 김 회장의 범죄 정황이 담긴 통화녹음 파일을 모두 갖고 있는데, 저 좀 도와주십시오. 저는 이제 손을 털고 싶습니다.”
김재민은 모든 파일을 최 대표에게 건넸다. 자신의 횡령 범죄를 ‘물타기’ 하려는 시도였는지, 그가 파일을 흘린 진짜 이유는 모호하다. ‘사채왕 김상욱 파일’은 이렇게 유출됐다. 똘마니의 배신에 김상욱은 그야말로 ‘뚜껑‘이 열렸다.
불씨가 불길이 되기 전에 막아야 했다. 김상욱은 우선 김재민을 달랬다. 끝까지 함께 가야 자신도 안전했다. 김상욱은 첫 번째 작전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 말 똑바로 들어. 넌 통화녹음 파일을 넘긴 게 아니고, 최태진 대표한테 두들겨 맞고 빼앗긴 거야. 알았지? 검찰, 경찰 다 내 손아귀 안이야. 내가 다 조치할 테니까, 병원 가서 진단서 하나 끊고 최 대표 고소해. 당장!”
김재민은 지난해 8월 18일 새벽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아, “14일간의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서를 발급받았다. 김상욱은 김재민에게 변호사도 붙여줬다. 김재민이 허위로 작성한 고소장의 한 대목은 이렇다.
“최태진 대표 등이 사무실에서 복부와 목을 마구 폭행하여 14일간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혔습니다. 이어 최 대표 등은 핸드폰을 빼앗아 저장되어 있던 삼촌(김상욱은 김재민에게 자신을 삼촌이라 부르게 했다-기자 주)과의 통화내역 녹취파일, 카카오톡으로 주고받은 부동산등기부등본, 대출요청자료 등을 무단으로 가져갔습니다.”
여기까지가 ‘1차 작전’. 그런데 김재민은 이 첫 번째 고소를 곧바로 취하했다. 최태진 대표는 두 사람이 자신을 제거하려 일을 꾸미는 걸 몰랐다. 그는 “김상욱 손에서 벗어나고 싶다, 도와달라”는 김재민의 말을 그대로 믿고 말았다.
“김재민이 거짓말을 잘한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제가 순진하게 김 대리의 말을 다 믿었습니다.”(최태진 인터뷰)
최 대표는 지난해 8월 22일, 김상욱 일당이 ‘아지트’처럼 쓰는 서울 신설동 하타○○ 카페를 찾았다. 최 대표는 담판을 짓듯이 김상욱에게 말했다.
“김재민 대리가 이젠 불법대출 일을 그만하고 싶다고 합니다. 더는 괴롭히지 마십시오.”
김상욱은 모든 내용을 부인했다. 금세 험악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의 ‘오른팔’에게 전화를 건 김상욱의 입에서 “누구 하나 오늘 죽여야겠다”, “애들 좀 준비해놔라” 하는 말들이 나왔다. 팔다리에 문신을 한 건장한 청년 8명이 우르르 카페로 들어와 김상욱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카페 입구 쪽 테이블에는 그들이 들고 온 망치와 노끈이 있었다.(관련기사 : <‘1500억 대출사기’ 조폭 출신 사채왕의 실체를 밝힌다>)
김재민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며 계속 최 대표에게 도움을 청했다. 김재민은 무궁화신탁 팀장에게 처지를 설명하고 급히 휴가를 냈다. 그는 최 대표와 지난해 8월 24일부터 모텔에서 피신생활을 하며 ‘김상욱 파일’을 분석했다. 최 대표 지인 두 명도 여기에 합류했다. 조직폭력배 출신 김상욱의 ‘습격’을 대비한 일이었다.
엿새 뒤인 8월 30일 새벽, 김재민이 갑자기 사라졌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모텔을 빠져 나가는 장면이 CCTV에 모두 찍혔다. 마치 급박한 상황인 것처럼 말이다. 이 상황은 김재민의 연기였다. 최 대표에겐 비밀이었지만, 김재민은 이미 전날 최 대표 지인 B 씨에게 “떠나겠다”고 말했다.
B 씨가 지난해 10월 6일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을 보자.
“8월 29일 김재민과 C 씨(최 대표의 또 다른 지인)와 셋이 방에 같이 있을 당시, (김재민이) 나가겠다는 의사를 얘기했고, 저희는 나가더라도 차량과 짐을 모두 챙겨서 나가라고 얘기해주었습니다.”
김재민은 그럼에도 굳이 맨발로 모텔을 떠났다. 이렇게 최 대표를 제거하려는 ‘2차 작전’은 무르익어갔다. 최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재민 대리가 김상욱 회장에게 연락을 받고 다시 포섭됐다고 판단했습니다. 김 대리가 자기 차도 두고 갔기에 제 지인이 무궁화신탁 김○○ 팀장에게 연락해 (차를) 가져가라는 말도 했습니다.”
김재민은 약 일주일 뒤인 9월 6일 하남경찰서에 최태진 대표를 공동감금, 특수강도 혐의 등으로 고소했다. 김재민은 같은 달 11일 이런 취지로 고소인 진술을 했다.
“최 대표가 저를 감금한 채 김상욱 회장의 비리를 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최 대표가 김상욱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 그걸로 함께 횡령한 금액을 메우자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 대표는 다른 사람을 협박할 만한 단서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제 차와 컴퓨터도 가져갔습니다.”
경찰은 11일 뒤인 9월 22일, 최태진 대표를 그의 집에서 체포했다. 최 대표는 경찰이 수갑을 채우려 할 때 이렇게 항의했다.
“제가 김재민을 감금하고, 특수강도를 저질렀다구요? 제가 김재민을 김상욱 회장으로부터 보호했던 겁니다! 제 휴대폰 확인해보세요. 녹음파일 들어보면 김재민과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잘 알 겁니다.”
그는 조사 과정에서, 휴대전화 속 녹음파일을 확인해보라는 얘기를 “수십 번도 더” 반복했다. 그러면 금방 풀려날 거라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최 대표는 그대로 구속됐다. 김상욱 일당의 목표가 이뤄진 셈이다.
‘모텔 탈출 장면’을 완벽히 연기한 김재민은 수사기관에서 거짓 진술을 이어갔다. 이런 식이다.
“(최 대표는) 저를 협박해 공사금 45억 원을 빼돌리게 했습니다. 자금 횡령이 문제가 되자 최 대표는 8월 24일 저를 강제로 차에 태우고 모텔에 감금했습니다. 김상욱 회장에게 돈을 뜯어내 횡령금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저에게 ‘김 회장의 비리를 말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경찰·검찰은 김재민의 진술을 거의 그대로 믿었고, 이 진술은 최태진 대표 공소장에 그대로 실렸다. 최 대표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제출했지만, 수사기관은 음성파일 등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수사기록에는 포렌식을 했다거나 녹취록을 살폈다는 내용조차 담기지 않았다. 최 대표는 탄식했다.
“김재민이 연기를 잘한 건지, 경찰·검찰이 진실을 알면서도 속아준 건지,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최 대표의 말대로, 사건기록을 살펴보면 의아한 점이 눈에 띈다. 당시 김상욱은 불법대출 혐의로 이미 경기북부경찰청의 수사대상에 오른 상태였다. 최 대표는 관련 내용을 경찰·검찰에서 수차례 진술했다.
하남경찰서와 수원지검 성남지청이 경기북부경찰청에 사실확인만 했다면, 이 사건의 배경을 파악하는 건 가능했다. 하지만 수사기록 어디에도 관련 내용은 없다.
김재민의 오락가락 진술도 문제였다. 경찰 조사에선 “김상욱의 불법대출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했지만, 지난해 10월 13일 검찰에서 진술할 땐 말을 바꿨다.
“김상욱의 불법대출과 관련하여 (제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불법대출 사건 피의자라는 김재민의 고백. 뿐만 아니라 검찰은 김상욱 일당의 ‘1차 작전’, 즉 최태진 대표를 폭행 혐의 등으로 고소한 것이 허위라는 것도 확인했다. 이쯤 되면 ‘2차 고소’, 즉 김재민의 두 번째 고소를 의심할 법도 한데 검찰은 계속 김재민을 신뢰했다.
경찰·검찰의 부실수사는 재판 과정에서 바로잡혔다. 최 대표는 변호인을 통해 휴대전화에 담긴 통화녹취록 등을 증거로 제출했다.
김재민은 최 대표에 의해 모텔에 감금됐다고 주장했지만, 그 기간에 혼자 모텔을 벗어나거나 자유롭게 전화 통화를 한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그럼에도 검찰은 최 대표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제1형사부(재판장 강동원)는 지난 2월 1일 최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피해자(김재민)는 공소사실에 감금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는 2023. 8. 24부터 2023. 8. 30까지 혼자 모텔 주변 편의점에 가거나 혼자 차를 타고 나가 부모님이나 여자친구를 만나는 등 자유롭게 모텔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혼자 외출한 후 피고인 ○, ○(최태진 대표 지인들)가 있는 홀덤에 스스로 찾아가기도 하였으며, 휴대전화 역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재판부는 특수강도 혐의에 대해서도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들(최태진 대표와 지인들)이 피해자(김재민)로부터 물건들을 강취했다고 단정하기 부족하고, 이를 인정할 증거도 없다”고 판단했다.
검찰의 공소사실 중 재판부가 인정한 건 하나도 없다. 그야말로 수사기관의 완패. 재판부의 지적대로, 경찰과 검찰은 약 2개월간 수사를 했으면서 최 대표의 혐의를 단정하거나 입증할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물론 경찰과 검찰의 판단에는 최 대표의 폭행 전과와 회사 자금 횡령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부실수사라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형사사건 수사의 최종 목표는 ‘실체적 진실 규명’인데, 경찰·검찰은 이런 목표에서 크게 벗어났다.
최태진 대표는 무죄 판결과 함께 약 130일 만에 석방됐다. 검찰은 곧바로 항소했다.
“수감돼 있는 130일 동안 제 인생은 다 망가졌죠. 회사도 망가지고, 가정도 망가지고…. 제일 큰 건, 저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이 돼 있더라고요. 누군가를 납치하고 강도질을 한 사람으로….”(최태진 인터뷰)
한편, 김상욱은 지난달 23일 구속됐다. 경기북부경찰청은 최태진 대표가 주장한 바와 같이 ‘김상욱 일당의 불법대출’ 정황을 확인했다.(관련기사 : <[해결] 셜록 보도 6일 만에 ‘사채왕’ 김상욱 전격 구속>) 김재민 역시 같은 사건으로 불구속 입건돼 검찰 송치를 앞두고 있고, 횡령과 사문서위조 등 별개의 사건으로도 수사를 받고 있다. 최근 최 대표는 김재민을 무고위증 혐의로 고소했다.
김상욱은 지난달 16일 셜록과 한 전화 통화에서 “나도 피해자다, 불법대출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러 번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후 문자메시지로 재차 취재 협조를 요청하자 김상욱은 “관련자들의 허위주장과 모함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취재를 거부했다. 그리고 만약 취재진이 자신을 찾아온다면 “건조물 침입 등으로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입장을 보내온 바 있다.
김재민 전 무궁화신탁 대리는 셜록의 취재 연락을 받지 않다가, 보도가 시작된 후 ‘현재 수사 중인 사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 의견을 밝히기 어렵다’고 입장을 밝혀왔다. 이후 기자가 그를 찾아갔을 때도 “김상욱을 잘 모른다”며 “수사 중인 사건이라 말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