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김재민을 벌금 500만 원에 처한다.”
김재민(32) 전 무궁화신탁 대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벌금형의 유죄 판결이 떨어졌지만 이번에도 구속은 면했다. 고개를 떨군 그는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변호사와 함께 법정 문을 나섰다. 곧장 쫓아나갔지만 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김재민에게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등의 혐의로 벌금 500만 원을 선고했다. 담보대출을 받기 위해 문서를 위조했고, 이를 공인중개사에 제출해 위조한 문서를 행사한 사실이 인정됐다.
애석하게도 그가 법정에 서는 것은 이번으로 끝나지 않을 듯하다. 1500억 원에 이르는 불법대출로 청구동새마을금고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를 불러일으킨 ‘사채왕’ 김상욱 일당. 신탁사 직원이었던 김재민은 그의 ‘손발’처럼 일하며 김상욱(52)의 범죄행각을 도왔다.
경기북부경찰청은 김상욱 불법대출 사건의 피의자 중 하나로 김재민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은 사문서위조 사건 외에도, 또 다른 위조와 횡령 등 사건으로도 경찰 수사를 받고 있다. 무고·위증 혐의로 고소도 당한 상태다.
김재민은 김상욱의 지시를 받아 ▲불법대출이 가능한 금융기관과 그곳의 담당자를 섭외하고 ▲대출에 필요한 서류를 직접 만들거나 위조하기도 했다. ▲대출 명의자를 사칭해 금융기관을 속이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 대출 명의자들을 찾기도 했다.
“칵, 진짜 니 죽여불라니까는. 야, 내가 쫓아가? 왜 보고는 안 하지, 새끼야?”(2023. 8. 1. 김상욱 통화녹음)
당시 무궁화신탁 대리로 일하던 김재민은 ‘회장님’의 전화로 하루를 시작하고, ‘회장님’께 그날 일을 ‘보고’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여기서 ‘회장님’은 무궁화신탁의 회장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사채왕’ 김상욱. 사람들은 그를 ‘회장님’이라 불렀다.
이르면 오전 5시 30분부터, 늦게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이어진 통화. 두 사람은 하루에 최대 44통이나 통화를 주고받으며 ‘은밀한’ 대화를 계속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의 성실한(?) 통화 덕분에 사채왕의 덜미가 잡혔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김상욱과 김재민 간 통화녹음 파일 900여 개를 비롯해, 모두 2000여 개의 녹음파일을 통해 김상욱 일당의 불법대출과 사기 행각을 확인했다.
김재민과의 통화 속에서 처음에는 ‘회장님’으로 불리던 김상욱은, 이후 ‘삼촌’, ‘작은아버지’로 호칭이 바뀌었다. 김재민은 이렇게 ‘식구’가 됐다.
김재민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금융기관을 섭외하는 일이었다. 김상욱 일당이 1500억 원의 불법대출을 일으킨 청구동새마을금고처럼 ‘작업’을 할 만한 금융기관을 찾아야 했다.
김상욱 : “회장님(김상욱 본인) 밑에서 청구(동새마을금고)처럼 일할 수 있는 데 한번 찾아볼랑가?”
김재민 : “그런 데가 있어요. 일단 ○○○(금융기관 이름)도 괜찮습니다. 공격적으로 PF대출도 많이 하구요. 담보 대출도 많이 합니다.”
김상욱 : “청구(동새마을금고)처럼 따라올 수 있을 만한 업체가 있으면 충청권에나 몇 군데 잡아주든지.” (2023. 4. 25. 통화녹음)
사채왕의 지시에 김재민은 움직였다. 충청권, 전라권, 경상권 할 것 없이 ‘작업’에 나설 금융기관을 전국적으로 물색했다.
“내가 (금융기관 직원에게) 줄게. 한 3000만 원 줘보고.”(2023. 7. 25. 김상욱 통화녹음)
마땅한 금융기관을 찾으면 두 사람은 “돈 좋아하는 놈”에게 챙겨줄 ‘용돈’을 책정했다. “쇼핑백에 돈 3000만 원을 담아서” 매수를 시도하기도 했다. 김재민이 금융기관 직원과 만날 때 ‘용돈’을 챙겨 가지 못하면, 김상욱은 “용돈 좀 챙겨주지” 하며 타박하기도 했다.
김재민은 대출 명의자를 사칭해 금융기관을 속이기도 했다.
김상욱 : “○○(금융기관 이름)에도 니가 안○○(명의자 이름)이라고 전화하고.”
김재민 : “○○○○(금융기관 이름)은 제가 직접 전화했습니다. 안○○(명의자 이름) 대표인 척하고. 신탁(대출) 잘 몰라서 전화했다고 전화했거든요.” (2023. 8. 2. 통화녹음)
김재민은 대출 명의자 행세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접 모집책이 되기도 했다. 서울 이태원동에 있는 고급빌라 ‘○○하우스’의 대출 명의자들을 찾으라는 김상욱의 지시.
김상욱 : “누구 두 사람만 더 하면 되겠다.”
김재민 : “두 사람이요? 제가 찾아볼게요.”
김상욱 : “조용히 (진행)해야 돼. 이거 소문나버리면 안 되니까.” (2023. 7. 12. 통화녹음)
대출에 필요한 서류들을 갖추거나, 때로는 ‘위조’하는 일도 김재민의 몫이었다. 금융기관에서 대출심사에 필요한 사업계획서 등 자료를 요구하자, 김재민은 없는 자료를 직접 만들어내기도 했다.
김상욱 : “우리가 뭐 한다고 하면 있잖아. 그래프로… 재민이 니가 만들면 안 되냐?”
김재민 : “그냥 개요만 좀 써주면 그냥 뭐 제가 억지로 그냥 짜깁기해서 만들 수는 있거든요.” (2023. 7. 28. 통화녹음)
김재민이 가지고 있던 서울 이태원 고급빌라 ○○하우스 관련 자료 중에는, 당사자들 모르게 작성된 것으로 의심되는 부동산매매계약서도 있었다. 셜록이 계약서상 명의자들에게 직접 연락한 결과, 11명 중 4명에게서 “○○하우스 매매계약서를 직접 작성한 적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관련기사 : <150억 대출금이 사채왕 처제에게… 이태원 고급빌라 ‘텅텅’>)
김재민은 김상욱 일당이 경남 창원시 양덕동 ‘KC월드카프라자(이하 KC월드카)’에서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모두 알고 있었다. 김상욱 일당 최고의 ‘성공작’인 KC월드카. 그들은 이 한 곳에서만 약 800억 원의 불법대출을 일으켰다.
김재민은 KC월드카 ‘문제 물건’ 80여 건을 따로 정리해뒀다. 이른바 ‘양덕동 리스트’. 셜록이 신탁원부 등 관련 서류와 현장 취재를 통해 확인한 결과, 김재민의 ‘양덕동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상가들은 정말 압류나 공실 등으로 정상 운영되지 못하고 있었다.(관련기사 : <새마을금고 뱅크런의 진실, ‘사채왕 리스트’에 있다>)
“니(김재민 지칭) 작은아버지(김상욱 본인)랑 있으면 돈 벌어, 이 자식아.”(2023. 7. 25. 김상욱 통화녹음)
“그러면 (김재민을) 팀장이 아니고 본부장을 시켜야 되겠다.”(2023. 6. 19. 김상욱 통화녹음)
김상욱은 본인에게 충성한 인물들은 “끈이 떨어져도” 잘 챙겨준다며 재력과 권력을 과시했다. 3억 원짜리 에르메스 가방을 아내에게 줄 수 있는 사람, 신탁사의 인사에 관여할 만큼 ‘파워’를 가졌고, 국회의원 비서관으로 김재민의 여자친구를 ‘꽂아주는’ 것 역시 대수롭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 그게 김상욱의 자기소개였다.
“니(김재민 지칭) 자식아, 회장님(김상욱 본인)이 이렇게 해주면 니는 어떻게 해야 되겠냐?”(2023. 6. 21. 김상욱 통화녹음)
김상욱의 ‘식구’ 챙기기는 곧, 의리를 다해 ‘작업’을 이어가라는 압박이었다. 신뢰를 저버린 자에게는 혹독한 응징이 뒤따랐다. ‘배신자’를 “매달고 혼내니 오줌 질질 싸고 똥까지 쌌다”는 이야기는, 그가 “목포오거리파” 출신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내(김상욱 본인)가 니(김재민 지칭)를 조카로 생각하니까 이렇게 하고 있는 거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매달아버렸다, 재민아. 삼촌 진짜 무서운 사람이야.”(2023. 8. 17. 김상욱 통화녹음)
달콤한 제안과 살벌한 협박 속에서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던 두 사람. 하지만 김상욱은 몰랐다. 늙은 사기꾼 밑에서 자란 젊은 사기꾼이 ‘딴마음’을 품었다는 걸. 김재민은 2023년 봄부터 김상욱과 한 모든 통화를 녹음하고, 불법대출의 증거가 될 자료를 백업해두고 있었다.
그리고 김재민은 김상욱도 모르는 사이 ‘독자적인’ 범죄를 감행했다. 무궁화신탁이 김재민의 ‘횡령’ 사실을 알아차린 게 2023년 여름. 무궁화신탁은 곧장 감사에 착수했다.
“그거(감사) 내가 막는다니까, 씨X. 니(김재민 지칭)는 다른 걱정 하지 말고 이것(김상욱 불법대출 관련 일)만 해.”(2023. 7. 27. 김상욱 통화녹음)
김상욱은 김재민의 범죄를 ‘수습’해주겠다며 자신의 지시에만 충실히 따를 것을 강요했다.
“내가 정리할게. 당장 (감사) 멈추라고 할게. (횡령한 게) 있다고 해도 선 그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우리 일’이나 해.”(2023. 6. 29. 김상욱 통화녹음)
김상욱은 자신의 불법대출과 관련된 일을 “우리 일”이라 표현했다. 김재민은 엄연히 신탁사 직원이지만, 김상욱은 그를 마치 자신의 직원이나 ‘수하’처럼 여겼다.
김상욱과 김재민의 통화녹음에 등장하는 부동산 물건지는 전국 곳곳(▲서울 이태원 ▲평택 ▲파주 ▲안성 ▲화성 ▲양평 ▲용인 ▲대전 ▲계룡 ▲금산 ▲영암 ▲전주 ▲담양 ▲태안 ▲삼척 ▲포항 ▲부산 ▲창원 등)에 분포돼 있다. 지역마다 진행하는 사업(▲중고차 매매상가 ▲골프장 ▲모텔 ▲예식장 ▲오피스텔 ▲카트장 ▲한식당 ▲펜션 등) 역시 다양했다.
하지만 김상욱과 김재민은 “우리 일”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했다. 김재민은 지난해 8월 대기발령 처분을, 12월에는 면직 처분을 받았다. 김재민이 녹음한 통화 파일 900여 건과 불법대출 증거물들은 또 다른 제보자에 의해 셜록에게 전해져, 결국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무궁화신탁은 김재민의 횡령과 위조, 불법대출 연루 등에 대해 ‘개인의 일탈’이라고 선을 그었다. 무궁화신탁과 김상욱 일당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도 모두 부인했다.
“진짜 마음먹고 범죄 저지르는 사람 하나 잡는 게, 조직원 100명을 동원해도 못 잡습니다. (…) 서류를 도장까지 다 위조해서 올리는데, 저희가 무슨 재주로 그걸 적발해냅니까? 저희 입장에서는 개인 일탈인 거죠.”(무궁화신탁 임원급 관계자 2024. 4. 12.)
이어 “저희도 억울한 부분이 있다”며, “(김재민의 범죄를) 못 잡아낸 게 잘못은 맞지만 중대한 과실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또한 “회사에 끼친 손해에 대해 (김재민에게) 청구하고, 면직 처분을 내리는 것 외에는 관여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무궁화신탁은 현재 김재민에 대해 고발 등 법적 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김재민 대리는 셜록의 취재 연락을 받지 않다가, 보도가 시작된 후 ‘현재 수사 중인 사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 의견을 밝히기 어렵다’고 입장을 밝혀왔다. 이후 기자가 그를 찾아갔을 때도 “김상욱을 잘 모른다”며 “수사 중인 사건이라 말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김상욱은 지난달 16일 셜록과 한 전화 통화에서 “나도 피해자다, 불법대출 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여러 번 다시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후 문자메시지로 재차 취재 협조를 요청하자 김상욱은 “관련자들의 허위주장과 모함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취재를 거부했다. 그리고 만약 취재진이 자신을 찾아온다면 “건조물 침입 등으로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입장을 보내온 바 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조아영 기자 jjay@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