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보다 아픈 말을 하더니, 이제는 열 마디 독설보다 모욕적인 침묵이다. 급소를 골라 찌르다가 사람 속 뒤집는 고문 같은 전략을 중앙대학교병원은 어디서 배운 걸까.

‘시험관시술 정자 뒤바뀜’ 사고를 알게 된 지 3년째, 여러 언론이 피해자 고통을 보도한 지 2년째, 의료사고 발생의 진원지 중앙대학교병원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고작 내놓은 한마디는 이런 취지였다.

“당신 엄마가 시험관시술 기간에 자연임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외도 가능성도 있다는 주장. 그러곤 다시 긴 침묵. 이후 아버지는 자살을 시도했고, 우울증 걸린 엄마는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여기에 모두를 덮친 빚의 무게까지, 그야말로 집안엔 폭풍이 밀려왔다. 힘들 줄 알았지만, 대학병원에 싸움을 건 대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중앙대학교병원에서 ‘시험관시술 정자 뒤바뀜’ 사고를 겪은 피해자 김연희(가명) 씨 ⓒ셜록

장유진(가명, 24세) 씨는 2022년 8월 여름 하늘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중앙대학교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결심한 부모님은 서울의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운전대를 쥔 아버지도, 옆 자리의 엄마도 별 말이 없었다.

창밖 하늘은 쨍했지만, 장 씨의 눈앞엔 온통 먹구름뿐이었다. 수원시 집에서 출발한 차는 군포, 안양을 통과해 금방 서울에 진입했다. 장 씨는 아버지가 쥔 운전대를 돌려 집으로 유턴하고 싶었다.

“오빠 유전자가 아버지랑 일치하지 않는다고 우리 가족이 달라지는 건 없잖아. 앞으로도 엄마, 아빠 아들이고 내 오빠잖아. 병원 상대로 소송하지 말고, 우리 그냥 지금처럼 살자. 응?”

아버지 운전대를 돌리지 않았다. 엄마도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뒷좌석에 앉은 딸 장유진 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병원을 상대로 어떻게 싸우겠다는 거야! 우리만 더 힘들어질 게 뻔하잖아!”

대단한 예측이 아니다. 일반인이 의료진의 과실을 입증하는 건 어렵고, 병원 측이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할 리 없다는 건, 대학생인 장 씨도 뻔히 아는 ‘현실’이었다.

“이미 개만도 못한 대접을 받았는데, 계속 당하고 살라고? 엄마는 그러고 싶지 않다. 따질 건 따져서 사과받고, 진실도 알아야지.”

그때 더 말렸어야 했을까? 부모님은 2022년 12월 중앙대학교병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엄마는 이미 1년여 전부터 담당의사의 해명과 병원의 진실규명을 요구했다. 하지만 담당의사는 잠적했고, 병원은 아무런 조치도 안 했다. 병원의 침묵과 무대응은 엄마의 병으로 이어졌다.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유진아, 엄마가 정말 미안한데… 어디 가지 말고 엄마 곁에 계속 있어줄 수 있어?”

엄마는 자꾸만 무서운 이야기를 했다. 분하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불안해서 자꾸만 집 베란다에서 떨어지고 싶다거나, “내가 중앙대병원에 가서 죽어야 문제가 풀릴 거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곁에 있어 달라는 엄마의 부탁은 약한 마음의 증거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장유진 씨는 2023년 봄 대학을 1년간 휴학했다. 외출을 극도로 줄이고 집안에서 엄마를 보살폈다. 그렇게 딸 장유진은 엄마의 엄마가 됐다.

장 씨가 엄마의 무모한 싸움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엄마는 다낭성난소증후근 등을 앓아 임신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상훈 중앙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에게 시험관시술을 받고 오빠(1997년 생)와 장 씨(2000년 생)를 낳았다.

엄마는 오빠의 유전자가 아버지와 일치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2022년 여름에야 알았다. 고의든 실수든 명백한 중앙대학교병원의 의료사고.(관련기사 : <“엉뚱한 정자로 시술” 20년 속인 산부인과 의사 ‘잠적’>)

서울 흑석동 중앙대학교병원 ⓒ셜록

엄마의 소송은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 보상·배상은 당연하지만, 엄마는 그보단 사과와 위로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중앙대병원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병원 측은 담당의사인 이상훈 전 교수와 해외 봉사활동을 다니면서도 “정년 퇴직한 이 교수와 연락이 안 된다”며 엄마를 속였다.(관련기사 : <“잠적 의사 연락 안된다” 중앙대병원의 들통난 거짓말>)

장유진 씨는 엄마의 엄마로 1년을 살며, 엄마의 상처와 중앙대학교병원의 민낯을 봤다. 병원의 침묵은 고도로 계산된 전략으로 보였다. 장 씨는 ‘법과 시간은 병원 편’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부모님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중앙대병원은 변호인 의견서를 통해 이런 주장을 폈다.

“민법 제766조 제2항에서는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10년을 경과한 때에는 손해배상의 청구권은 시효로 인하여 소멸된다.”

병원 측의 주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민법 제766조 제1항에서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의 청구권은 피해자나 그 법정대리인이 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간 이를 행사하지 아니하면 시효로 인하여 소멸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소멸시효 완성 즉,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시효가 이미 지났다는 뜻이다. 민법에 따르면 모든 시민은 ‘손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10년, 그리고 손해 사실을 인지한 날로부터 3년’ 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배상청구권이 인정된다는 뜻이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사람까지 다 보호할 수 없다는 법적 안정성을 위한 규정이다. 존중받아야 하는 원칙이지만, 인간 사회에서 보호돼야 마땅한 예외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

중앙대병원 베트남 의료봉사 기념사진. 붉은색 원 표시 인물이 이상훈 전 교수다. 지난 3년간 병원 측은 ‘이 전 교수와 연락이 안 된다’고 말해왔지만, 최근까지도 병원의 해외 의료봉사 행사에 이 교수가 동행해왔음이 밝혀졌다. ⓒ중앙대병원

“고도의 전문성이 있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의료사고 분야에서 소멸시효 규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게 타당할까요?”

장유진 씨의 의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시험관시술 받은 여성이 자기 배 속에 원하지 않은 유전자가 들어왔다는 걸 어떻게 적시에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식의 출생의 비밀을 의심할 부부는 또 얼마나 될까요? 해외 사례를 봐도 시험관시술에서 정자가 바뀌었다는 이례적이고 충격적인 사고의 진실은 대개 먼 훗날에야 알아차리는데… ‘사고 발생 10년 내에 소송하라’는 게 이상하잖아요.”

장 씨 가족이 겪은 ‘정자 뒤바뀜’ 같은 의료사고는 훨씬 복잡하다. 과실이든 고의든, 의료진의 문제적 행위로 한 생명이 태어났고, 특히 그 존재가 의료사고 피해자들에겐 소중한 가족이란 사실 때문이다. 의료진의 행위를 마냥 비난하면 자칫 당사자의 탄생을 부정하는 꼴이니, 피해자들에겐 그야말로 딜레마에 빠지는 셈이다.

장 씨의 오빠는 “유전자 검사 결과가 우리 가족을 해체하지는 않는다, 나의 부모님은 달라지지 않는다”며 “그것과 별개로 병원과 의료진의 잘못은 명확히 밝혀져야 하고, 그들은 나와 우리 가족에게 사과하고 마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오빠도 부모님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당사자, 즉 원고로 들어가 있다. 이런 오빠에게 소멸시효 규정을 적용하면 더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우리 오빠는 분명 중앙대병원 의료사고의 피해자입니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요. 피해자인 오빠에게 ‘사고 발생 10년 내-사고 인지 3년 내’에 소송해야 한다는 민법을 적용해보세요. 오빠의 손해배상 청구 권리는 10살까지만 보호된다는 뜻이잖아요. 피해자가 권리를 행사하려면 11세가 되기 전에 결단하라는 건데, 미성년자에게 말이 되나요?”

미국에서도 유사한 사건과 논란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화이트는 1981년 인디애나주 소재 한 병원에서 인공수정 시술을 받고 이듬해 자녀를 출산했다. 익명의 기증받은 정자가 아닌, 담당의사가 자기 정자를 시술에 사용했다는 사실을 화이트 가족은 2016년이 돼서야 알았다.

35년 만에 알게 된 진실. 인디애나주는 성문법으로 “의료계약 또는 의료과실에 기초한 권리 주장은 의료행위가 있었던 날로부터 2년 이내에 의료인을 상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인디애나주 사실심 및 항소심 법원은 화이트 가족에게 소멸시효 기산점 예외를 적용했다. 의료과실로 태어난 자녀의 손해배상 청구 권리도 인정했다. 이런 취지였다.

“환자는 고도로 전문적인 의료행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적시에 인지하기 매우 어렵다. 환자가 의사의 과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면, 소멸시효의 기산점은 환자가 의료과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이다.” (이상 김민성 뉴욕주 변호사 논문 <불임치료 의료행위의 남용에 대한 민사법적 책임론> 참고)

소멸시효 예외 적용 사례는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다. 특히 국가폭력 과거사 사건에서 정부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건 권리 남용에 해당한다는 판례도 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승소 판결문에도 이런 내용이 담겼다. 피해자들이 권리 행사를 할 수 없는 객관적 상황과 사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김연희(가명) 씨의 의무기록지. 병원 측은 그동안 “너무 오래된 일이라 의무기록이 없다”고 말해왔지만, 김 씨는 지난 2021년 의무기록을 발급받아 보관해왔다. ⓒ셜록

의료행위에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탓에 환자는 의료진의 고의 혹은 과실의 피해를 제때 알아차리기가 어렵다. 특히 장 씨 가족 사례처럼 난임치료 피해자들은 객관적 진실을 알아차리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한 법조인은 “장 씨 가족 사례처럼 명백한 의료사고에서 소멸시효 규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건 병원과 의료인에게 너무 유리한 것으로 형평성에 맞지 않고,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난 2일과 3일 중앙대학교병원 홍보실에 연락해 “시험관시술 사고 관련 달라진 입장이 있느냐”, “피해 가족에게 사과나 유감 표명 같은 계획은 있느냐”고 물었다. 병원 측은 이렇게 말했다.

“달라진 건 없다. 현재 진행하는 소송 외 다른 걸 고려하는 건 없다.”

장 씨 부모는 시험관시술 과정에서 정자가 바뀐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25년을 살았다. 여느 사람들처럼 대학병원과 의사를 믿었기 때문이다. 중앙대학교병원은 그 믿음의 세월을 장 씨 가족을 무너뜨릴 무기로 쓰고 있다.

중앙대학교병원의 무기는 하나 더 있다. 병원 측은 “장 씨 엄마의 자연임신 가능성” 주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아버지와 유전자가 불일치한 아들이 태어났으니, 한마디로 외도를 했다는 의미다.

‘여자 탓’이란 아주 오래된 재래식 무기를 2024년 한국의 대학병원이 휘두르는 셈이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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