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햇볕은 아침부터 뜨거웠다. 기자는 지난 18일,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용산어린이정원을 방문했다.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로, 저 멀리 노란색 ‘외딴 섬’이 보였다. 잔디마당 위에 덩그러니 설치돼 있는 노란색 구조물은 대통령실이 지난해 주최한 ‘특별전시장’. 윤 대통령 부부 모습이 담긴 색칠놀이 도안을 어린이들에게 제공한 사실이 알려져 ‘대통령 우상화 교육’ 논란을 만들었던 그곳이다.
대통령 부부 도안의 색칠놀이 정도는 일회성 비판에 그칠 수 있던 사안. 하지만 그보다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대통령 부부의 색칠놀이 도안을 처음으로 SNS에 공개했던 시민단체 대표가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금지당하면서 논란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전환됐다.
대통령실이 주최한 특별전시 제목은 ‘국민과 함께 시작한 여정’.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 활동사진을 전시하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미니 탁구, 링 던지기, 색칠놀이 등의 체험형 프로그램을 진행한 곳이다.
기자가 놀란 이유는 이거다. 특별전시장이 지금까지 설치돼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용산어린이정원 측이 예정한 특별전시 기간은 지난해 6월 9일부터 9월 10일까지. 3개월간의 전시가 끝난 지 9개월이 더 지났지만, 특별전시장은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특별전시장에 가까이 다가가 봤다. “함께 만드는 길. 큰 꿈과 희망을 품은 어린이를 환영합니다”란 표어가 1년 전과 똑같이 기자를 반겼다.
노란 철제 벽면엔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국정활동 모습을 도안으로 한 5종의 그림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여기엔 우상화 교육 비판을 받았던 문제의 도안도 포함돼 있다. 그 도안에는 2022년 12월 경기 용인시 삼성화재 안내견 학교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리트리버 강아지들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담겨 있다.
뒤편에 설치된 구조물에도, 윤 대통령의 국정활동 모습이 담긴 사진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색칠놀이, 미니탁구 등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체험형 프로그램만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이전처럼 전시장을 안내하는 직원은 없었고, 전시장엔 기자 외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잔디마당을 나와, ‘어린이 환경·생태교육관'(이하 교육관)도 방문했다. 교육관은 세계 환경의 날(6월 5일)에 맞춰 얼마 전 개관했다. 개관식 날, 김건희 여사의 방문으로 최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교육관 앞마당엔 제인 구달 박사가 기념식수한 산사나무가 자리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하자(Respect all life)”
‘침팬지의 어머니’로 불리는 제인 구달 박사는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다. 제인 구달 박사는 지난해 7월 7일 방한해 용산어린이정원에서 김건희 여사를 만났다.
교육관 내부에 제인 구달 박사를 소개하는 공간도 있었다. 제인 구달 박사의 이력과 주요 저서를 소개하고, 그의 책도 전시했다. 제인 구달 박사가 등장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을 틀어놓기도 했다.
제인 구달 박사의 업적을 소개하는 이곳에, 생뚱맞게 김건희 여사도 등장했다. 침팬지를 연구하는 제인 구달 박사의 사진이 8장 전시되어 있는 가운데, 김건희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도 두 장이나 전시돼 있었다.
첫 번째 사진은 지난해 7월 김건희 여사와 제인 구달 박사가 함께 산사나무를 기념식수 하는 모습. 그리고 두 번째 사진은 정원 내 ‘용산서가’에서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 나누는 모습.
사실 제인 구달 박사가 용산어린이정원을 방문한 것 자체가 다소 의아한 일이긴 하다. 미군기지 내 토양오염 문제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곳 아닌가. 녹색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용산어린이정원 개방을 중단하고 오염물질 정화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학부모들도 지난해 5월 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즉각 개방 중단을 요구했다.
제인 구달 박사가 용산어린이정원을 왜 방문했는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당시 대통령실이 배포한 브리핑 자료에선 그 답을 찾기 어려웠다. 브리핑 자료는 김건희 여사의 발언을 전하는 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었다. 김건희 여사의 발언은 ‘따옴표’ 속에 총 10개를 직접 인용한 반면, 제인 구달 박사의 발언을 직접 인용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교육관 구경을 마치고 용산어린이정원을 걸어 나오며, 생각에 잠겼다. 해방 이후 미군기지로 활용돼 120여 년 동안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용산공원 반환부지. 대통령실은 지난해 5월 주한미군 반환부지 일부를 용산어린이정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대통령실은 “국민 속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이 지켜졌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사실상 용산어린이정원을 ‘대통령 부부 홍보관’으로 쓰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해 8월, 윤석열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프로그램을 소셜미디어에 알린 시민단체 대표와, 그와 동행한 용산 주민 5명이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거부당한 사실을 최초로 보도한 바 있다.(관련기사 : <‘윤석열 색칠놀이’ 제보자들, 용산정원 출입금지 당했다>)
이후 출입거부를 당한 시민이 최소 23명 더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들 모두 용산어린이정원 토양오염 문제 등 그동안 윤석열 정부의 국정운영을 비판해온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는 국토교통부로부터 용산어린이정원 유지 운영을 위탁받았다. LH는 지난해 7월엔 신설된 ‘출입제한’ 규정을 근거로 일부 시민들의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막았다.
용산 반환부지 임시개방구간 관람 규정 제5조(관람신청 및 입장) 6항
“관련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 예약신청 또는 현장접수를 받은 대상자의 출입을 제한할 수 있다”
‘출입제한’ 규정은 사실상 ‘블랙리스트 조항’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특정 행위 혹은 특정 물품의 반입 금지를 명시한 게 아니라, 특정 ‘인물’의 출입을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물의 출입을 막겠다는 건지 그 사유도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다. 그저 “관련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 특정 인물을 콕 집어 입맛대로 출입을 막을 수 있는 조항이다.
셜록 보도 이후, 대통령경호처는 용산어린이정원에 출입금지 조치를 요청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관련기사 : <대통령경호처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 우리가 요청했다”>)
김종철 대통령경호처 차장은 지난해 8월 국회에 출석해 “대통령경호처에서 (일부 시민을 상대로 한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금지를) 요청한 적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 대통령 부부 색칠놀이 프로그램을 비판했다는 것이 출입금지의 이유가 됐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그와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셜록이 이미 1년 전 ‘우상의 정원’ 프로젝트로 대통령실의 용산어린이정원 사유화 문제를 지적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LH 홍보실은 19일 기자에게 “특별전시를 주최한 대통령실에서 전시장을 철거하지 않고 향후에도 사용할 거라고 전달해 (특별전시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며 “(향후 진행될) 구체적인 행사나 철거 등의 내용은 모두 대통령실에서 관리하고 있어 LH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없다”고 말했다.
한편, 용산어린이정원 출입을 거부당한 시민들 중 4명은 지난해 10월, LH를 상대로 ‘출입거부 무효 확인’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용산어린이정원 출입거부 취소 소송 두 번째 변론기일은 오는 20일 오후 3시 30분에 열릴 예정이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