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최현철(가명) 씨는 단단했다. 약 2년 7개월의 기다림. 그 끝에 마주한 실망스러운 결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후(가명, 17세)는 특수학교를 졸업하면 자립하기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해요. 나중에 아이가 조금 더 커서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다면, ‘아빠가 너와 함께 살기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했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2024. 7. 8. 최현철 전화 인터뷰)
최 씨는 첫 번째 ‘최초’를 만들었다. 삼성전자 LCD(현 삼성디스플레이) 노동자 출신인 그는 2021년 12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아버지의 업무환경 탓에 선천성 희소질환을 앓는 아이가 출생했으니 ‘태아산재’를 인정해달라는 것. 국내 최초의 일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최초’는 만들지 못했다. 최 씨는 ‘아버지의 업무환경에 의한’ 태아산재를 결국 인정받지 못했다.
지난 3일 근로복지공단은 “최 씨의 업무와 자녀의 선천성 건강손상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지만, 산재보험법상 남성노동자의 업무 환경에 의한 태아산재를 보장하는 내용이 없다는 이유로 불승인을 통보했다. 현행법상 엄마가 아닌 아빠의 ‘태아산재’는 보상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다.
2008년에 태어난 최 씨의 아들 지후 군은 차지증후군(CHARGE Syndrome)을 앓고 있다. 이 병은 시신경 이상, 난청, 심장질환, 생식기 이상, 발달장애 등 여러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1만 명당 1명꼴로 앓는 선천성 희소질환이다.
최 씨는 2004년 삼성 LCD 사업부에 입사해 2011년까지 엔지니어로 일했다. 2019년, 그는 삼성지원보상위원회에서 자녀의 선천성 질환에 대해 이미 인정받은 적 있었다.
“내가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일했기 때문에 지후가 아프게 태어난 걸 수도 있구나… 충격을 받았죠. 아내랑 아이한테도 너무 미안하고,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더라고요.” (2021. 9. 1. 최현철 인터뷰)
지후는 특수학교를 다니고 있다. 17살이지만 입학을 2년 유예해, 학년상으로는 아직 중학교 2학년이다. 지후는 왼쪽 귀로 소리를 들을 수 없고, 오른쪽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다. 아이는 하교 후 언어 및 운동치료를 받고 있다.
“지금 심장이나 키, 눈은 더 이상 개선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통원 치료만 받고 있고요. 언어치료는 꾸준히 받고 있는데, 지원금이 있지만 본인 부담금으로 최대 월 70만 원 정도 듭니다. (귀에 이식한) 인공와우 기계가 오래되거나 파손되면 교체하는 데 한 번에 천만 원 정도 들어서… 그런 비용이 늘 걱정됩니다.” (2024. 7. 8. 최현철 전화 인터뷰)
어머니의 업무환경에 의한 태아산재 인정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근로복지공단은 지난 3월 22일 삼성 반도체 출신 여성노동자 3명이 신청한 태아산재를 업무상 재해로 인정했다. 이들이 태아산재를 인정받기까지 꼬박 1037일이 걸렸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2021년 7월부터 약 3년 동안 총 24편에 거쳐 ‘태아를 수급 주체로 인정하는 산재법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 집중 보도해왔다. 셜록이 보도를 시작한 뒤 약 5개월이 지난 2021년 12월, 여성노동자의 업무 환경에 의한 태아산재 보상을 명시한 산재보험법 개정안이 통과됐다.(관련기사 : <태아산재법, 국회 본회의 통과>)
최현철 씨가 근로복지공단에 ‘아버지의 업무환경에 의한’ 태아산재를 신청한 것도 그즈음이었다.(관련기사 : <“아버지 업무 탓에 희귀질환”.. 국내 첫 산재신청>)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역학조사에서 “자녀의 상병 ‘차지증후군’은 업무관련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반도체산업 남성근로자 자녀의 선천성기형 발병 및 사망, 사산의 위험이 일치하게 놓았으나, 근로자의 생식세포 돌연변이 또는 자녀의 염색체 질환 발생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는 찾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는 “자녀의 상병 ‘차지증후군’은 근로자의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질판위는 “여성의 경우 만들어진 난자를 체내 보관하고 있는 기간이 길어 생식세포에 유전자 영향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있지만, 남성의 경우 수개월마다 생식세포분열로 정자가 새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유전자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전자산업종사 남성의 2세에서 선천성기형 및 그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점과 근로자의 과거 근무 시기, 근무 라인을 고려하면 근로자의 독성물질 노출이 현재 역학조사의 기준보다는 더 높았을 걸로 판단되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였을 때, 자녀의 상병 ‘차지증후군’은 근로자의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것이 심의 회의에 참석한 위원들의 다수 의견이다.”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기다려온 2년 7개월의 시간. 하지만 반전. 근로복지공단은 최 씨의 태아산재 신청을 ‘불승인’했다.
문제는 ‘법’이었다. 현행 산재보험법은 “임신 중인 근로자”, 즉 여성노동자의 업무환경 탓에 비롯된 태아산재만 인정한다. 결국 지후의 선천성 희소질환 발생이 최 씨의 일 때문이라는 게 인정됐지만, 산재보험법상 ‘남성노동자’의 업무환경에 의한 태아산재를 인정한다는 내용이 없어 산업재해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온 거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91조의12(건강손상자녀에 대한 업무상의 재해의 인정기준)
임신 중인 근로자가 업무수행 과정에서 제37조제1항제1호ㆍ제3호 또는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유해인자의 취급이나 노출로 인하여, 출산한 자녀에게 부상, 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그 자녀가 사망한 경우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
근로복지공단의 이번 결정은 약 15년 전 ‘제주의료원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2009년부터 2010년 사이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은 선천성심장 질환아를 출생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자녀에 대한 산업재해를 공단에 신청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자녀의 질환은 엄마 ‘본인의 재해’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엄마들은 약 10년간 이어진 행정소송 끝에 ‘아이의 치료비를 근로자인 엄마가 보상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판결문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산재보험법의 해석상 모체와 태아는 ‘한 몸‘, 즉 ‘본성상 단일체‘로 취급된다. 태아는 모체 없이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으며, 태아는 모체의 일부로 모와 함께 근로현장에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사고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유의미한 판결이 나왔지만, 문제가 바로 해결되진 못했다. 당시 산재보험법에는 임신 중 업무상 재해로 인한 태아의 선천적 질병을 보상하는 규정이 없었기 때문. 현재 최 씨의 상황과 꼭 닮아 있다. 자녀의 선천성 질환과 부모의 일 사이 관련성은 인정받았지만, 법이 없어서 보상받지 못했던 점이 15년 전 제주의료원 사례와 같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이 ‘투쟁’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나서야 여성노동자의 업무 환경에 의한 태아산재를 인정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제, ‘남성노동자’의 업무환경에 의한 태아산재까지 포함되도록 산재보험법을 개정하는 관문이 남아 있다.
이미 21대 국회에서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우원식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서울 노원구을)은 2022년 9월 당시 ‘아버지의 유해요인 노출’로 인한 태아산재도 보호될 수 있도록 “임신 중인 근로자”를 “근로자”로 명시하는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하지만 법안은 21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태아산재 인정을 못 받았지만, 그래도 이번 소식을 듣고 먼저 연락을 준 국회의원실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업무상 환경에 의한 태아산재 인정 법안을 꼭 발의해주겠다고요. 먼저 나서서 말씀을 주시니까, 정말 고맙더라고요.” (2024. 7. 8. 최현철 전화 인터뷰)
최 씨가 말한 국회의원은 장철민 의원(더불어민주당, 대전 동구)이다. 장 의원은 9일, 남성노동자의 업무상 환경에 의한 태아산재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임신 중인 근로자”를 “근로자”로, “출산한 자녀”를 “해당 근로자의 출생 자녀”로 명시해, 아버지를 위한 태아산재 보장 근거를 마련했다.
장 의원은 21대 국회에서도 ‘여성노동자의 업무상 환경으로 인해 발생한 태아의 건강손상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자’는 내용의 산재보험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바 있다.
최 씨는 기자와 전화 인터뷰를 마치기 전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했다.
“(태아산재 불승인 이후) 인터뷰 요청 오면, 거절하지 않고 다 받고 있습니다.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선천성 희소질환을 앓고 태어난 아이의 태아산재 승인을 위해 애써온 최 씨는, 2년 7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의 간절함 덕분에 “아버지의 업무상 유해환경과 자녀의 선천성 질환의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받는 결과까지 도달했는지 모른다.
법이 없음에도 굴하지 않고 태아산재를 신청한 남성노동자,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결정에도 꺾이지 않고 나아가는 단단한 아버지. 그가 또 한 번 ‘최초’의 주인공이 되길 기대한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