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물’ 고발 사건에 경찰의 ‘검은 제안’이 등장했다.
“사건 각하로 종결할 테니까, 저한테 다시 고발장을 주세요. 그래서 다시 (사건을) 시작하는 걸로 좀 하시면 어때요?(…) (경찰) 내부 점검에 걸려요. 제대로 정상적으로 수사가 완벽히 안 됐다고.”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서성민 변호사는 지난해 9월, 불량 상수도관 납품업체 임직원과 공무원 등 사이에 있었던 ‘검은 유착’을 밝히기 위해 형사고발에 나섰다. 사건을 담당한 수사기관은 강남경찰서.
하지만 담당 수사관은 9개월이나 지나 ‘고발 취하’를 유도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얘기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사건은 그의 말대로 각하 처리됐다. 그러나 검찰도 이 같은 처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검찰은 사건 재수사를 요청했다.
셜록과 서 변호사는 ‘고발 취하’를 유도하며 1년째 ‘사건 뭉개기’를 하고 있는 A 경위를 직무유기 혐의로 직접 고소했다.
‘검은물’ 사건의 시작은 시흥 은계지구였다. 경기 시흥시 은계 공공주택지구에서는 2018년 4월부터 수돗물에 이물질이 나온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조사 결과, 이물질의 정체는 상수도관 내부에 코팅된 플라스틱 계열의 물질(액상에폭시 등)이었다.
원희룡 당시 국토교통부 장관과 이한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장은 지난해 7월 은계지구 아파트 단지의 ‘검은물’ 사태에 대해 고개 숙여 사과했다.
문제의 상수도관을 납품한 회사는 이미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은 업체였다. 공정위는 2020년 3월, 13개의 상수도관 업체가 사전에 담합해 서로 합의된 기준에 따라 이윤을 배분한 사실을 밝혀냈다. 문제의 상수도관 업체들이 사전에 납품기관에 부정한 청탁을 한 정황도 포착됐다.(관련기사 : <식당서 만나 ‘검은 약속’… 1300억 나눠먹은 그들의 수법>)
하지만 공정위의 발표 이후로도, 담합 업체와 공공기관 등 수요기관의 임직원 및 공무원들 중 아무도 부정청탁 문제로 법적 책임을 진 사람이 없었다. 더 이상의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고, 징계나 처벌로 이어지지도 않은 상황.
이에 셜록과 서 변호사는 상수도관 업체 임직원을 사기 혐의로, 그리고 이들의 부정한 청탁을 받은 것으로 의심되는 공공기관 임직원 및 공무원들을 뇌물 혐의로 형사 고발했던 것이다.(관련기사 : <[액션] ‘검은물’에 숨은 검은 의혹… 셜록이 검찰에 고발>)
고발로부터 약 9개월이 지난 올해 6월 20일. 고발인 서성민 변호사는 강남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소속 수사관 A 경위의 전화를 받았다.
A경위는 수사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이 사건 (수사를) 계속 진행하기를 희망하냐“고 물었다. 서 변호사는 “(고발 사건을) 끝까지 가는 건 여지 없는 일이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A 경위는 “(수사가) 정상적으로 진행이 안 된다”면서, “사건을 각하로 종결할 테니 고발장을 다시 접수해줄 수 있냐“고 제안했다.
“제가 이 사건을 큰 뜻을 품고 한번 해보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해 가지고 정상적으로 진행은 안 돼요. 그래서 정확히 말씀드릴게요. 이거를 일단은 다시 저한테 고발장을 한 번 더 주세요.”
약 9개월 동안 고발인 조사가 한 차례 진행됐을 뿐, 피고발인에 대한 조사는 한 번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와서 굳이 재고발을 해달라는 ‘수상한’ 제안. A 경위는 이유를 묻는 서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수사 기일이 너무 장기화됐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경찰) 내부적으로 점검을 하거든요. (…) 변호사님, 진짜 내가 사정 좀 드릴게요. 이게 다른 생각이나 이런 건 아니고, 좀 도와주세요. 일단 도와주시고. 제가 오죽하면 이렇게 얘기하겠어요. 저도 너무 어이가 없고, 죄송하고….“
A 경위는 더 놀랄 만한 발언을 이어서 했다.
“다른 것(사건)들도 다 (비슷한 방식으로) 정리를 하는데요. 변호사님한테 내가 솔직히 말씀드리니까, 다른 사람한테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믿고 얘기하는 겁니다. 내부 점검에 걸리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여러 고발인에게 고발 취하나 재고발 접수를 요청하고 있다는 자백에 가까운 고백. 그 다음 이어지는 말은 더 놀라웠다. 이번에는 문제를 강남경찰서 전체로 확대시켰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수사관들도 그래요. 강남(경찰서)은. (고발인들에게) 부탁해가지고 다시 (고발장) 접수받아서, 기일을 다시 잡아서 (사건을 다시) 시작할 겁니다.”
강남경찰서 내 다른 수사관들도 자신과 같이 고발인들에게 ‘고발 취하’를 요청하고 있다는 폭로. A 경위는 고발 취하 날짜까지 정해줬다.
“(함께 고발한) 진실탐사그룹 셜록한테도 협조를 (부탁)해주시고… 오늘 중으로 고발 취하장 있잖아요, 팩스로도 보내주셔도 돼요. (경찰 내부) 점검이 다음주라서….”
셜록과 서성민 변호사는 고발 취하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고발 취하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결국 강남경찰서는 지난 6월 28일 ‘검은물’ 고발 사건을 각하 처분하며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공정위의 조사 결과와 제재 사실을 근거로 한 고발이었음에도, “고발인의 추측만을 근거로” 고발했다는 어이없는 명분을 내세웠다.
“고발인의 추측만을 근거로 본건 고발을 한 것으로 파악되기에 수사를 개시할 만한 구체적인 사유가 충분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불송치 통지서)
각하 처분 이후 서 변호사는 다시 고발장을 접수하기 위해 A 경위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지난 8월 초부터 약 2주 동안 15번의 전화 연결을 시도했지만 결국 A 경위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사이, 오히려 검찰에서 사건을 다시 끄집어올렸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검사 선현숙)은 지난 8월 강남경찰서에 재수사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강남경찰서로 넘어갔다.
경찰 내부 점검을 피하기 위해서라며 고발인에게 고발 취하를 요청한 A 경위. 그의 입장은 무엇일까. 기자는 지난 4일 강남경찰서를 찾아 그를 직접 만났다.
“기자가 오해하고 있는 생각대로였다면, 애초에 (고발인에게) 전화 안 했습니다. 당연히 전화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각하 쳐버리면 됩니다. 그게 더 깔끔해요. (…)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한번 (경찰 입장을) 역으로 생각해주십시오.“
셜록과 서 변호사가 고발장을 접수한 게 지난해 9월. 그동안 수사는 얼마나 진행된 걸까.
“(고발인을 통해) 자료 받은 걸로 공정위 쪽에 저희가 확인을 해봤고요, 그 상황에서 이제 각하를 한 거예요. (…) (고발장이 재접수되면) 실질적으로 (사건을) 거의 다시 시작할 거예요.”
경찰 수사관이 고발인에게 고발 취하와 재고발을 요청하는 게 상식적인 일일까. 경찰 출신 손병호 변호사(법무법인 현)는 단호하게 지적했다.
“염치없는 요청입니다. (내부적으로) 장기사건 점검 때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 하는 부탁이잖아요. (…) 그야말로 행정 편의주의적인, 수사관 개인의 편의를 위한 요청이잖아요. (…) 각하는, 수사할 만한 사건이 되지 않는다 판단해서 수사하지 않고 끝낸다는 개념입니다. (고발로부터) 9개월 정도 있다가 (사건을) 각하하는 건 상당히 잘못된 겁니다.”
기자는 강남경찰서의 반론을 듣고자 시도했다. 지난 20일 국민신문고를 통해 강남서에 서면질의서를 넣었다.
전화 연결도 시도했다. 기자는 지난 19일부터 27일까지 A경위가 소속된 지능범죄수사팀 과장(언론대응 담당)에게 총 9차례 전화를 시도했다. 27일엔 지능범죄수사팀 소속 담당자를 통해 “과장님의 회신을 부탁드린다”는 메모도 남겼다. 하지만 전화 연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고발인 서성민 변호사는 A 경위의 행위가 시사하는 현재 경찰의 문제점을 이렇게 짚었다.
“검경수사권 조정 이후 고발인의 이의신청권이 사라지면서, 경찰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수사를 끝내도 고발인은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열심히 수사하고 싶다는 둥 핑계를 대며 고발 취하를 유도하고, ‘(사건을) 불송치할 테니 재고발 해달라’는 제안까지 이른 것은 현재 경찰의 범죄수사가 총체적인 난국이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셜록과 서 변호사는 30일 A 경위를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지방검찰청에 형사고소했다. 또 A 경위에 대한 수사관 기피(교체) 신청을 진행해 ‘검은물’ 고발 사건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도록 끝까지 감시할 예정이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