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계가 사라졌다. 가족을 끔찍하게 아끼던 막내이자, 고양이 루시와 루니의 다정한 집사. 언니를 잘 따르던 착한 동생. 누구와도 잘 지내던 둥글둥글한 사람. 예쁜 걸 모으고 꾸미는 걸 좋아하던 사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꿈꾸며 모든 순간 성실했고, 무엇이든 열심이던 그런 사람. 민순이라는 귀한 세계가 어느 날 사라졌다. 고작 서른여섯의 나이였다.
“내 앞날이 너무 깜깜해서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
민순 씨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였다.
어느 날 갑자기 민순이라는 세상이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왜 사라져야만 했는지 물음으로써, 그 세계의 무게를 잊지 않음으로써, 사라진 세계는 여기 남아 있다.
장향미(45) 씨는 그날을 기억한다. 2017년 12월의 첫 주말, 이른 아침이었다. 동생은 그날도 야근을 하고 아침에 들어왔다. 야근은 거의 매일 있었고, 밤샘 근무를 하고 아침 일찍 집에 오는 일도 적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생은 꽤 지쳐 보였다.
그런 동생이 울기 시작했다. “떼굴떼굴 구르면서 펑펑”. 부모님이 걱정하실까 향미 씨는 동생을 진정시켜봤지만, 터진 울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상사 때문에 괴롭다고 동생은 대성통곡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매일 야근을 하는 걸 보고 일이 많은 줄은, 그래서 힘든 줄은 알고 있었다. 향미 씨는 회사라는 데가 원래 그런 곳이라고 생각했다. 향미 씨 자신도 유명 게임업체에서 일하고 있었고, 그즈음 그 회사에서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향미 씨와 부모님은 동생에게 퇴사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자주 하고는 했다. 그래도 동생이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착하디 착한 동생이 그렇게 우는 걸 보니 향미 씨는 화가 나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바로 관할 노동지청에 회사를 신고하고 근로감독을 요청했다.
노동부에서 연락이 온 건 일주일 뒤였다. 그 사이 동생은 과중한 업무와 상사의 비상식적인 업무 질책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탈진해가고 있었다. 향미 씨가 받은 답변은, 올해 근로감독 일정은 모두 끝났으니 내년 2월에 다른 신고업체와 ‘묶어서’ 근로감독을 나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근로감독을 요청해도 안 하겠다는데, 그런 노동부에 더 할 말이 없었다.
향미 씨는 몇 개월 전 회사 앞에서 팸플릿을 받은 게 생각났다. 향미 씨 회사의 과로사 문제를 고발했던 시민단체에서 나눠준 홍보물이었다. 내년까지 근로감독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시민단체에 연락을 취했다. 시민단체 활동가는 동생의 출퇴근 기록과, 같이 고발할 수 있는 동료들을 모아보는 게 좋겠다고 조언을 줬다.
동생은 곤란해했다. 동료를 모으기도 어려울 것 같고, 출퇴근 기록도 없다고 했다. 향미 씨는 그게 좀 이상했다.
“출입카드가 있잖아요. 그걸 찍고 들어가는데, 그 기록을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게 돼 있대요. 취업규칙도 없고요.”
회사를 고발하는 일에 나설 수 있는 직원이 얼마나 될까. 동생은 같이 고발할 동료들을 모으는 건 좀 힘들겠다면서도, 자기 혼자서라도 회사를 고발할 거라는 얘기를 했다. 크리스마스 연휴,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동생은 부모님의 걱정에도 회사를 고발하려는 이유를 말했다.
“(동생) 자신은 여태껏 그렇게 회사를 다녔지만, 자기 후배들, 지금 입사한 20대 초반의 신입들은 이제 이런 거 그만했으면 좋겠다, 그 마음으로 신고하고 싶다고 얘기를 했어요. 엄마가 훌륭하다, 열심히 해보라고 얘기를 했고요.”
2018년 새해가 밝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경찰이 왔다. 집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조사가 끝나면 장례를 치를 수 있다고 했다. 경찰의 조사라는 게,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가족들과 불화가 있었는지 물었고, 남자친구가 있는지, 금전적으로 문제가 있는지를 물었다. 향미 씨는 경찰에게 동생이 회사 때문에 많이 힘들어했다고 했는데, 경찰은 그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정신이 멍했다. 이틀 전 동생과 말다툼을 했는데, 그게 동생과의 마지막이었다. 향미 씨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장례식장에 시민단체 활동가가 달려왔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와 변호사, 노무사도 ‘웹디자이너 과로자살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라는 이름으로 함께 왔다.
회사 사람들도 빈소를 찾아왔다. 가장 먼저 인사팀에서 왔다. 인사팀 직원들은 일손을 돕겠다며 빈소를 떠나지 않았고, 빈소에서 오고 가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었다. 회사 대표도 조문을 왔다. 유족들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목인사만 하고 바로 떠났다. 동생의 상사였던 본부장과 팀장도 조문을 왔다. 두 사람이 동생을 괴롭힌 상사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인터뷰 도중 향미 씨는 두 사람 얘기를 하면서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팀 사람들 있는 데서 물어봤어요. 일이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본부장이, 우리 직원들은 자발적으로 일을 하지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아니라는 식으로 답을 했어요. 오히려, 제 동생하고 면담을 했는데 집에 일이 있어서 힘들어했던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더니, 옆에서 듣고 있던 인사팀 직원이 대신 대답을 했어요. 우리 회사는 자율적인 업무를 존중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을 기록하지 않는다고요.”
향미 씨는 빈소에 온 동료들, 동생과 잘 지내던 사람들의 연락처를 모두 받아뒀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동료들을 만나고 다녔다. 동생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 했다. 그래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서른 명 정도 만났고, 대부분 이미 퇴사한 사람들이었다. 동료들은 ‘회사 다니면서 우울감을 느꼈다’고 말했고, ‘아침에 일어날 때 눈을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향미 씨는 동생의 죽음이 “동생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과로와 괴롭힘, 압박과 무기력, 우울과 탈진. 동생의 죽음은 문제의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과로죽음’이었다. 과로로 인한 죽음에는 뇌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과로사뿐 아니라, 과로자살도 포함된다.
동생은 2015년 5월, 한 유명 온라인 교육업체 디자인팀에 입사했다. 전에도 IT업체 디자이너로 일을 해왔던 터라 이곳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업계 1위로 창업 6년 만에 매출 4000억을 달성했고, 직원 수가 불과 10명에서 1200명으로 엄청나게 성장하던 곳이었다.
회사를 설명하는 ‘신화와 기적’이라는 수식어 뒤에는 직원들의 “뼈를 갈아 넣는” 희생이 있었고, 그만큼 노동강도가 높기로 악명이 높았다. 동생은 첫 출근을 앞두고 “힘들 것 같다”고 했다. 입사 4일째 새벽 4시에 퇴근을 했고, 그때부터 매일 야근이었다.
근로계약서 자체가 야근을 기반으로 작성됐다. 계약 연장근로만 매달 69시간에 야간근로 29시간. 주 5일 근무로 계산하면, 매일 3시간씩 더 일하고 매일 1시간씩 야근을 해야 하는 계약이었다. 실제로는 주말에도, 퇴근 후에도 일했다. 계약서에 적힌 시간을 항상 초과했다.
포괄임금제(근로시간과 상관없이 일정액의 수당이 포함된 월 급여를 지급하는 임금계약)라 시간외근로 수당도 없었다. 힘들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버티기가 어려울 정도로 일이 많았다.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된다는 얘기를 꺼낼 수가 없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만 ‘미친 사람’이 되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전할 때마다 향미 씨의 입에서는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야근이 엄청 심했어요. 새벽에 들어오고, 아예 밤을 새우고 안 들어온 날도 있었고요. 퇴근해서도 업무 연락이 왔어요. 밤 12시에, 벌써 퇴근했냐고, 아침까지 확인하라고…. 이것도 해라, 저것도 해라, 하도 그러니까 ‘(나보고 회사를) 나가라는 건가?’ 그렇게 느낄 만큼 일을 많이 줬던 것 같아요.”
동생의 업무는 웹디자인. 기획이 생기면 디자인이 따라다녔다. 프로젝트가 없어지거나 기획이 바뀔 때마다 디자인도 함께 바뀌었고, 그 기획이라는 것도 수시로 바뀌었다.
기획회의 때마다 디자인 시안을 ‘플랜A’부터 ‘플랜D’까지 만들었다. ‘까일(반려당할) 걸’ 알지만 아무렇게나 만들 수는 없었다. 밤을 새워 완성도를 높여 시안을 제출한다고 끝이 아니다. 그 과정은 본부장이나 대표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됐다.
동생은 통상적인 디자이너 업무만 한 게 아니었다. 웹기획부터 상품 디자인 프로젝트, 팀관리 업무까지 수행했다. 좋아서 시작한 일이 자존감을 갉아먹는 일이 됐다.
업무시간이랄 게 따로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기획에 따라 ‘초치기’로 일이 생겼다 엎어졌고, 일은 ‘컨펌(confirm, 승인)’을 받아야 끝이 났다. ‘자율출퇴근’이라는 말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컨펌을 받지 못하면 퇴근할 수 없다. 상사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결과물은 몇 번이나 까이고, 디자이너는 질책을 받는다.
동생이 ‘이런 거’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던 ‘무한 대기와 컨펌 까이기’는 장시간 노동을 넘어 끝이 없는 무한노동이었다.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벌을 받는 것 같아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밤새 일하고 무한정 컨펌을 기다리느라, 동생의 시간은 동생의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그의 저서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말했다. 노동시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것은 일상이 자기파괴적으로 변하고, 인간이 정신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라고. 친구들과 주고받은 메시지에 동생은 “완전 죽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회사 일 말고 뭘 할 수가 없어요. 일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친구들도 이해를 잘 못했죠. 점점 고립되는 상황이었고, (일이) 자기 생활을 다 잠식해간다고 했어요. 집에 오면 방에 틀어박혀서 잠만 잤어요. 누구랑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어요.
특히 월요일이 오는 걸 되게 불안해했어요. 일요일에는 저녁도 안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잠을 못 잤어요. 입사하고 살이 엄청 많이 빠졌는데, 점심시간에 밥 안 먹고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대요. 스트레스가 심했던 것 같아요.”
주말 역시 회사의 것이었다. 온라인 교육업체인 회사는 수강생들의 시험 일정이 있는 주말이면, 수험생에게 홍보물을 나눠주는 응원이벤트에 참여하도록 했다. 말은 ‘자발적’이라지만, 인사평가에 20%나 반영이 되는 ‘업무’였다. 야근하고 새벽에 들어온 날도 예외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본부장은 업무와 상관없는 책을 읽어오라고 하고, 채식을 하는 동생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요구를 했다. 동생이 상사에게 어떤 말들을 들어왔고 어떤 요구를 받았는지, 괴롭힘은 업무일지에도 잘 드러났다. 업무일지가 아니라 반성문에 가까웠다.
“머릿속에 온통 브랜드 생각뿐입니다. 지치지 않고 제대로 된 아웃풋(성과)을 내겠습니다.”
“엉망으로 작업을 진행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다시는 이런 결과가 없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또 한 번 배우고 부끄러운 하루였습니다. 앞으로는 하나라도 발전된 아웃풋을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동생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시키는 일을 다 했고, 무슨 일이든 허투루 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책임감이 강했고 스스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된다’고 말했다. 자신이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것도, 또 ‘아픈 사람’인 것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라고 했다.
상사의 지시에 동생은 늘 “넵넵. 알겠습니다.”로 답했고, 살인적인 업무량과 업무지시를 가장한 괴롭힘에도 “웃으면서 어떻게든” 일을 해왔다. 그러나 “아무리 야근을 해도” 일은 줄지 않았다.
쉬고 싶었다. 완치 진단을 받은 우울증이 도졌다. 공황장애까지 나타나 두 번이나 휴직 신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2017년 9월, 이번에도 휴직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퇴사하겠다고 하자, 그제야 한 달간 쉴 수 있게 됐다.
“소모품처럼 쓰이는 것” 같다던 동생은 휴직 내내 방에만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쉬는 날이면 여행을 다니고 전시회에 가는 걸 좋아하던 동생이었다. 휴직기간 동안 동생이 회사 때문에 못했던 걸 했으면 했는데, 동생은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향미 씨가 집에만 있는 동생을 데리고 ‘호캉스’(호텔+바캉스,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며 보내는 휴가)를 하루 다녀온 게 전부였다. 동생이 좋아하는 디자이너가 만든 호텔이었고, 동생은 오랜만에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한 달을 쉬고 오자 일은 몇 배로 더 늘었다. 브랜딩 업무에, SNS에 올라가는 카드뉴스만 일주일에 서너 개. 상사는 ‘새롭게 발전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며 카드뉴스를 매일 바꾸라고 요구했다.
팀에서 하는 업무들을 사실상 동생 혼자 맡아 했고, 몰아치는 업무에 동생은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했다. 동료들은, 동생이 맡은 업무가 적어도 서너 명이 해야 할 분량의 일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더 심해졌다. 시간이 없어 병원에 가기도 어려웠다. 예약하고도 제때 못 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동생은 병원에 가지 못했고, 폭음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동생은 집 앞 편의점에서 몰래 술을 마시고 들어오기도 했다.
술로 괴로움을 잊으려 했다는 걸, 폭음이 우울증의 한 증상이라는 걸, 과로 때문에 우울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향미 씨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고 했다. 겪어보지 않으면 누구라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술로, 약으로 달래가며 일해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벌을 받는 것 같은 ‘무한노동’은 여전했고, 본부장에게 “이렇게 할 거면 왜 시간을 줘야 하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처음으로 괴로움을 호소하던 날, 동생은 그게 그렇게 억울했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게 동생 죽음의 ‘방아쇠’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던 향미 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본부장이 잠 좀 자라고, 그래야 맑은 정신으로 일하지 않겠냐고 했대요. 거기서 폭발한 거예요. 저는 마음에도 급소가 있는 것 같아요. 급소를 맞았다면 즉사할 수 있다고 봐요. 급소가 아니더라도 상처를 계속 입으면 과다출혈로 죽기도 하잖아요.
동생이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자살하는 사람들도 죽는 거 두려워한다고. 그런데 그것보다 내일 아침이 오는 게 더 두렵기 때문에 죽는 거라고요. 저는 동생이 정말 죽을 생각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그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는 이 상황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동생은 부모님이나 저를 정말 아끼고 사랑했고요, 우울증을 치료하려고 정말 노력했던 것도 저는 알거든요. 살고 싶은 의지가 더 강한 애였어요.”
동생은 세상을 떠났다. 출퇴근 기록이 찍힌 교통카드 내역을 언니의 이메일로 보내놓고서. 그것은 무엇이 동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이자, 꼭 진실을 밝혀달라는 동생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언니의 긴 싸움이 시작됐다.
☞ 다음 이야기 <처벌하지 않는 살인… 이 죽음은 끝날 것 같지 않았다>으로 이어집니다.
취재 정윤영 르포작가 freakss@naver.com
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