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석에 앉은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고단해 보였다. 많이 지친 듯했다. 검찰은 김 총수의 유죄 입증을 위한 동영상을 2월 23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법정에서 재생했다. 김 총수가 재판받는 이유가 담긴 영상이다.
“여러분, OOO 후보를 지지해 주십시오. 알겠습니까?”
동영상 속에서 김어준은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를 둘러싼 사람은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김 총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밝고, 유쾌했으며 무엇보다 젊어 보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검찰이 재생한 동영상은 2012년 총선 때 촬영된 것이다. 당시 김어준은 광장에서 “가카 심판(이명박 정권 심판)”을 외치고 일부 지역에서 야당 후보 지지 연설을 했다.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이 모든 행위에 선거법 위반을 적용해 김 총수를 검찰에 고발했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5년간 피고인 신세
김어준은 2012년 총선 때 일로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다. 오타 아니다. 2016년 20대 총선이 아닌, 정확히 2012년 19대 총선의 일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 5년간 피고인 신세라니.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다. 그동안 달라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대 총선 때 시민에게 득표를 호소하던 정당은 모두 이름이 바뀌었거나 사라졌다.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분화했고, 민주통합당은 더불어민주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통합진보당과 자유선진당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여당이 과반을 차지했으나, 지금은 여소야대다. 대통령은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바뀌었다. 박 대통령은 탄핵 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달라졌는데, 김어준은 아직도 19대 총선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김 총수가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도 저질렀을까? 아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건 김어준이 아니라, 한국의 공직선거법(선거법)이다. 오죽하면 국선전담 변호사 신민영마저 “우리나라 법 중 가장 악법“으로 선거법을 지목했을까.
‘포괄적 금지, 예외적 허용‘
한국 선거법의 기본 원칙이다. 쉽게 말해, 선거 시즌 때 시민들의 여러 행위는 대부분 금지되고 허용되는 건 일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선거법 제93조는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행위를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후보자와 관련됐다면 농담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신민영 변호사가 쓴 책 <왜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가>에는 웃기고도 슬픈 이야기가 나온다. 2012년 대선 때, 한 중년 남성이 박근혜 후보와 허경영 씨가 함께 나온 사진 밑에 이런 댓글을 달았다.
‘여보야를 여보야라고 부르지 못하고.’
박근혜 후보와 허경영 씨가 부부 관계가 아니란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검찰은 농담 혹은 장난으로 볼 수 있는 이 댓글 쓴 남성을 허위 사실 공표죄로 기소했다.(선거법 제250조) 허위사실 유포만 문제가 아니다. ‘댓글로 적은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후보자를 비방하는 내용이면 처벌‘ 될 수 있다(선거법 제251조. 책 <왜 나는 그들을 변호하는가> 참고).
농담성 댓글로도 처벌 받을 수 있다
김어준을 피고인석에 앉힌 행위를 살펴보면 선거법의 문제를 더 쉽게 알 수 있다. 기억을 2012년 3월~4월로 돌려보자.
그해 3월 13일, 당시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부산을 방문해 손수조 후보(부산 사상)와 짧은 카퍼레이드를 했다. 두 사람은 차량 선루프 밖으로 상체를 내밀어 시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등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의 행위는 ‘누구든지 자동차를 사용하여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는 선거법 제91조 3항을 어긴 것이란 지적이 많았다. 선관위는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고 손을 흔든 시간이 짧아 선거법 위반으로 단정 짓기 어렵다“며 이들을 고발하지 않았다.
김어준 총수는 주진우 <시사인> 기자와 함께 이를 패러디한 ‘삼두노출‘ 퍼포먼스를 4월 8일 서울광장에서 열었다. 당시 시민 약 5000명이 모였다. 며칠 뒤 선관위는 김 총수와 주 기자를 검찰에 고발했다.
두 사람의 퍼포먼스는 ‘선거기간 중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집회를 개최하여 특정 후보를 지지 선전하는‘ 선거법 위반 행위로 간주됐다. 마이크를 잡고 시민에게 ‘가카 심판‘과 야당 후보 지지를 당부한 것 역시 ‘확성장치 사용 제한‘을 규정한 선거법 제91조 1항을 어긴 것으로 여겨졌다.
삼두노출 행사와 마이크를 잡고 시민에게 야당 지지를 당부한 행위. 이것이 김어준이 여전히 법정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이유다. 그의 재판이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언론인 선거운동도 문제가 됐으나, 헌법재판소는 2016년 이 조항에 대해 위헌을 결정했다. 김 총수의 재판이 지연된 건 이런 원인도 있다).
합리적인 의문을 던져보자. 왜 우리는 선거기간에 집회 등 행사를 자유롭게 열 수 없는가. 왜 좋아하는 후보를 마음껏 지지할 수 없는가. 시민의 기본권에 해당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선거법은 과연 합당한가?
한창 진행 중인 촛불집회와 일명 ‘태극기 집회‘를 생각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탄핵을 인용하면, 두 행사는 열리기 어렵다.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행위를 선거법이 엄격히 규제하기 때문이다(선거법 제93조).
탄핵 인용되면 촛불-태극기 모두 규제
누군가 마이크를 들고 “박근혜 정권에 책임 있는 후보를 심판하자“거나 “탄핵을 무리하게 추진한 야당 후보를 심판하자“라고 외치면, 그 역시 김어준처럼 법정에 설 수 있다. 선거법에는 ‘확성장치 사용 제한‘ 등 깨알 같은 조항이 있다.
‘여당 후보 심판‘ ‘야당 후보 심판‘이 적힌 피켓도 들 수 없다. 선거법 93조는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 벽보, 사진, 문서·도화, 인쇄물‘ 게시를 규제하고 있다. 정말이지 탄핵이 결정되면, 시민들은 대선 투표날까지 닥치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 언제까지 이런 선거법을 그냥 둬야 할까. 인터넷에 댓글 하나 쓰려해도 ‘혹시 선거법을 위반하는 건 아닐까‘ 하고 자기검열을 하는 건 독재국가에서나 어울리는 걱정이다.
대선이 열리는 올해, 민주주의 꽃을 피우기 위해선 선거법을 개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김어준처럼 오랜 세월 법정 피고인 석에 앉을 수도 있다.
5년째 선거법 위반 혐의로 재판받는 김어준. 그는 우리 모두의 미래 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