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위에 있으면 아프다는 말도 잘 못 하게 돼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니까.”
김진숙(64)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추워지는 날씨에 걱정이 늘었다. 길에서 문득 과거의 제 모습을 떠올리기도 했다. 김진숙도 과거 309일간 고공농성을 이어간 적 있다.
그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85호’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하던 2011년. 고공농성 중에 지상과 소통할 수 있는 ‘생명줄’은 밧줄이다. 밧줄에 아침과 저녁 밥, 물 등을 올리고 받는 일을 한다. 그날도 지상과 생명줄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밧줄이 빠른 속도로 내려가고 있었다. 김진숙은 문득 지상에서 밥을 챙겨주는 동료의 모습이 떠올랐다. 짐이 이대로 추락하면 지상의 동료가 그대로 맞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는 쏜살같이 흘러내리는 밧줄을 손으로 붙잡았다. 양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졌다. 다만 동료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걱정하거나, 농성을 중단하고 내려오라고 말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그는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밧줄을 당겨올리는 것도, 내리는 것도 느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고공이란 함부로 아플 수도 없는 미안한 자리이기도 했다. 어쩌면 힘들다고 말도 못 하고 있을 박정혜(39)와 소현숙(42)을 하루빨리 만나 안아주고 싶었다.
김진숙은 지난달 22일부터 10일간 경남 양산시 호포역에서 경북 구미시 한국옵티칼하이테크공장까지 걸었다. 320일째(지난달 22일 기준) 고공 농성 중인 두 여성 노동자를 위한 일이었다.
박문진(63)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도 김진숙의 곁을 지켰다. 그날 그날 새로운 사람들도 김진숙과 박문진의 도보 행진에 함께했다. 모두 하늘색 조끼를 갖춰 입은 채, 공장 옥상에 있는 ‘박정혜와 소현숙’을 향해 걸었다. 이른바 ‘희망 뚜벅이’. 이들이 열흘간 걸은 거리는 약 160㎞에 달한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달 30일과 1일 ‘희망 뚜벅이’ 여정에 함께했다.
박정혜와 소현숙은 지난 1월 8일부터 공장 옥상에서 살고 있다. 겨울에 시작한 농성. 봄, 여름, 가을 지나 이들은 또 한 번 옥상에서 겨울을 맞았다.
두 사람은 LCD 편광 필름을 생산해 LG, 애플 등에 납품하는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일했다. 한국옵티칼은 일본 ‘니토덴코’가 100% 지분을 가지고 있다. ‘알짜 기업’으로 18년 동안 17조 원을 벌었다. 한국 정부로부터 토지 무상임대, 법인세와 취득세 감면 등 각종 혜택도 받았다.
그러던 2022년 10월 4일, 공장에 큰 불이 났다. 회사는 화재보험금 1300억 원을 받았지만 법인을 청산하기로 했다. 구미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193명을 희망퇴직시키고, 이를 거부한 17명을 정리해고 했다.
해고자 가운데 7명은 경기 평택시에 위치한 공장으로 고용승계를 요구하고 있다. 닛토덴코의 다른 자회사인 한국니토옵티칼 평택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주장이다.
회사는 구미공장의 물량을 평택공장으로 이전하고, 노동자 30명을 신규 채용했다. 이 때문에 고용승계가 충분히 가능했을 거라는 추측이 나온다. 해고자들은 “사측이 노조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고용승계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혜와 소현숙이 옥상에 올라간 이유 역시 딱 하나. 평택공장으로의 고용승계다.
내가 이틀간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은 다양했다. 병원 의사, 의료노조에서 활동하는 정년퇴직 간호사, 지역 여성노동자회 지부장과 조합원들, 강원도에서 온 교사, 근처에서 농사 짓는 농부, 귀농한 프리랜서, 소성리 사드 반대 투쟁에 함께하는 시민들, 미쓰비시중공업 상대 강제징용 피해 소송에서 이긴 변호사, 글 쓰는 르포작가, 사진가까지.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 이들은 “이 정도 걷는 건 괜찮다”고 말한다. 하루 15㎞, 많게는 25㎞를 걷는 일정에도 “힘들다”, “죽겠다”는 곡소리 한번 듣지 못했다. 먼저 쉬었다 가자고 불러세우거나 멈춰서거나 주저앉는 법이 없었다. 그저 묵묵하게 걸었다.
“걷는 게 힘들다”고 대답한 건 박문진 한 사람뿐이었다. 다만 “힘들어도 다들 그저 걷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저 걷는 것.
평소 운동을 하지 않았던 20대인 나 혼자 죽을 맛이었다. 토요일 21㎞를 걷고 양쪽 발등과 오른쪽 무릎, 고관절에 뻐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일요일 아침 일어나서 “서울로 먼저 떠납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의 ‘그저 묵묵하게 걷는 모습’에 발목이 잡혔다. 내가 또 언제 이들과 함께 길에 오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둘째, 이들은 김진숙과 박문진에게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의 연대의 길에 함께할 수 있어 “기쁘다”거나, “언젠가 진 빚을 갚아야 해서 나왔다”거나, “집에만 있으니까 마음이 무겁다”는 이유였다.
셋째, 처음 만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빈손으로 길에 올랐던 나는 별안간 점심시간이라는 말에 당황했다. 사람들은 가방에서 자연스레 간식들을 꺼냈다. 과일, 샌드위치, 김밥, 떡 같은 것들이었다.
내 가방에 든 짐이라곤 카메라와 렌즈, 세안용품뿐이었다. 둘러앉아 음식을 나눠먹는 이들 틈에서 괜히 눈치가 보였다. 멀뚱하게 앉아 있으면 ‘저도 조금 나눠주세요’ 하고 신호를 보내는 사람처럼 느껴질까봐. 투명인간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른쪽 제일 끝자리에 앉았다.
“기자님, 샌드위치 좀 드실래요?”
걸어오는 길에 함께 이야기 나눈 퇴직한 간호사 선생님이 샌드위치 반쪽을 건네주셨다. 그 옆에 계시던 수간호사 선생님은 김밥을 권했다. 길 위에서 말 한번 섞지 못한 ‘뚜벅이’들도 방울토마토나 사과, 유부초밥을 나눠주곤 했다.
이튿날. 전날 얻어먹기만 했던 기억 때문에, 미리 점심시간을 대비했다. 숙소 아래 편의점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샀다. 내 몫은 내가 해결해서 폐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몫’만 챙긴 게 문제가 됐다.
일요일에는 무려 100여 명의 ‘뚜벅이’들이 전국에서 모였고, 각기 다른 노동조합에서는 떡과 김밥 등을 준비했다. 누군가는 수십 명을 상대로 김밥을 말고 떡을 준비했는데, 나는 겨우 1인분의 샌드위치를 준비했다.
다리가 아파서 벤치에 앉으니 사람들이 여럿 모였다. 옆에서 떡, 김밥, 차, 빵, 토마토를 갖다주셨다. 이날도 역시 다른 뚜벅이들이 주는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부끄러운 샌드위치는 꺼낼 수 없었다.
말을 꺼내면 맞장구를 치고, 대화를 시도하면 또 자연스레 이어나가는 식이다. 그 길 위에 소외받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 만나는 이들도 어렵지 않게 그 안에 녹아들 수 있었다.
“이건 우리가 구미공장까지 걸어온 걸음을 잊지 말라는 그런 (뜻의) 키링이에요.”
김진숙 옷에는 여러 개의 키링이 달려 있다. 그중 발바닥 모양 키링은 이번 ‘희망 뚜벅이’를 기념하는 장식이다. 그는 작은 발바닥들을 박정혜와 소현숙을 위해 준비했다. 발바닥에 새긴 ‘HOPE(희망)’가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길을 걷는 동안 김진숙의 손에는 늘 부채가 들려 있었다. 그에게 부채는 하나의 피켓이다.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일본 먹튀기업 옵티칼은 고용승계 책임져라.”
반대쪽에는 또 다른 문구가 쓰여 있다.
“박정혜, 소현숙은 꼭 공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박문진의 손에도 부채가 들려 있다.
“먹튀자본 가고 고용승계 와라. 노동자, 민중들도 충분히 쉬고 웃고 춤추는 세상을 만들자.”
두 사람의 개성이 녹아 있는 부채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검은색 펜으로 명료한 구호를 적었고, 박문진 지도위원은 알록달록한 색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말을 적었다. 두 사람은 손 대신 부채를 흔들었다. 카메라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지난 1일 오후 3시. 저 멀리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뚜벅이들처럼 파란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저 멀리서 팔을 흔들고 있었다. 드디어 공장으로. 드디어 김진숙과 박문진, 박정혜와 소현숙이 만나는 순간이다.
공장 정문에는 양옆으로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옵티칼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이들이 서 있었다. 박수 갈채와 환호성 속으로 두 사람이 들어갔다. 열흘 간의 대장정이 끝나는 순간.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두 명의 ‘후배’들과 마주치자 눈물이 쏟아졌다.
“시원섭섭!”
‘희망 뚜벅이’ 대장정을 마치는 소회를 물었다. 함께 걷던 차해도 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답했다. 그는 한번 시작한 일이 끝나게 되니까 “시원하다”는 마음이 들면서도, 함께 나선 일인데 세상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섭섭하다”고 말했다.
‘희망 뚜벅이’는 말 그대로 희망을 품고 가는 길이다. 그 끝에 희망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이들은 걸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저 걷는 것”이라는 이들은 그렇게 마음을 전했다.
“우리 뚜벅이들의 길은 언 마음을 녹여주는 열정이었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뭉클한 우정이었고, 투쟁의 불씨를 지피는 연대와 함성이었습니다. 이 길이 끊이지 않고 우리가 어떠한 형태든지 큰 길을 만들어서 승리하는 큰 성과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 도착한 박문진 지도위원 발언 일부)
그 마음은 박문진의 발언에서 어렴풋이 드러났다. 그는 “(고공농성 중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맛있는 밥을 먹어도 맛을 잘 모르겠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도 뒤통수가 따가웠다”고 토로하며, 10일간 만들어온 길이 이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지는 연대의 힘, 그로 인해 변화하는 세상을 고대했다.
“소현숙, 박정혜 동지! 걷잡을 수 없이 막막하고 외로운 날은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 30만 보를 걸어왔던 그 발걸음들을 기억해주십시오.
박정혜, 소현숙 동지! 끝도 없이 눈물이 흐르는 날은 그 마음을 너무 잘 아는 두 선배 노동자가 얼마나 당신들을 걱정하는지, 함께 걸었던 많은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걸었는지 잊지 말아주십시오.
곧 땅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말을 하고 싶어 여기까지 왔습니다.”(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 도착한 김진숙 지도위원 발언 일부)
김진숙은 또 한번 사람들을 울렸다. 그는 고공에서 농성하는 ‘후배’들의 마음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처음 이 길에 나서는 것도 주저했다. 오고 싶지 않았던 길. 어떤 길을 얼마큼 걸어야 하는지 알기에 진심으로 오고 싶지 않았던 길. 그 끝에 두 사람이 있었기에 ‘선배’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박근혜 집 앞에서 매일 3000배를 두 달 동안 하면서 무릎이 고장난” 박문진의 사정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필리핀에서 봉사활동하는 그를 불러 함께 걷자고 했다.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2011년 ‘희망버스’의 기적으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가 철회된 것처럼, 고용승계를 요구하는 옵티칼 조합원 7명이 공장으로 돌아가는 ‘기적’이 찾아와 주기를 바랐다. 김진숙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끝까지 함께 투쟁”을 외치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옥상에서 1시간가량 이어진 ‘만남의 날 행사’를 지켜본 박정혜에게도 마이크가 전해졌다. 그는 “기적은 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소현숙도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16년간 회사에서 일했지만, 회사가 폐업하자 손을 잡아준 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며 마음을 전했다. 이어 “단 하루를 다니더라도 회사의 문턱을 다시 넘어보고 싶다”며, “그날이 올 때까지 저희가 가는 길, 끝까지 지켜봐달라”고 당부했다.
두 사람은 공장을 찾아올 ‘뚜벅이’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각종 과일을 깎아 컵에 담아 전했다. 그렇게 오늘을 위해 기억하고, 마음을 모아준 이들을 향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공장은 불탄 그날의 흔적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깨진 창문과 내부에는 검게 그을린 부품들이 굴러다녔다. 그 건물 바로 옆에 천막을 치고 333일째(5일 기준) 고공농성 중인 두 사람.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건 경찰이나 매서운 한파도 아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는 것. 관심 밖의 일이 돼 조용히 묻히는 일이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일부)
나도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또 함께 기적 같은 희망을 꿈꾸고 싶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