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나이 예순을 웃도는 이들은 지난 10일간 약 160㎞를 걸었다. 모두 하늘색 조끼를 갖춰 입은 채 구미로 향했다. 마지막 날인 지난 1일에는 100여 명의 사람들이 공장 옥상에 있는 ‘박정혜와 소현숙’을 향해 도보행진에 나섰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지난달 30일과 1일 ‘희망 뚜벅이’ 여정에 함께했다.
“여기는 안타까운 게 뭐냐 하면, 내일 가보면 아시겠지만 아무도 없어요. 경찰도 없고. 이미 공장을 다 떠나버렸거든요. 그런데 여기는 정말 황량하게 공장은 불타 있고,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거, 그게 더 힘든 거죠.”(김동은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전문의)
경북 구미시에 위치한 한국옵티칼하이테크공장. 불 탄 공장 옆에 서 있는 경비동 옥상에는 두 여성 노동자가 있다. 이들은 지난 1월 8일부터 옥상에서 농성을 이어오고 있다. 벌써 334일째(6일 기준)다.
이곳에서 박정혜(39) 씨는 13년, 소현숙(42) 씨는 16년 근무했다. 사건은 2022년 10월 발생한 화재에서 시작됐다. 공장에 큰 불이 나자 회사가 복구를 하지 않고 청산을 결정한 것. 심지어 회사는 화재보험금 1300억 원을 챙기기도 했다.
회사는 그때부터 공장 노동자에게 희망퇴직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193명을 희망퇴직 시켰고, 거부한 이들은 정리해고했다. 해고자 중 7명은 경기 평택시에 위치한 ‘형제 공장’으로 고용승계를 요구했다. 또 다른 자회사인 한국니토옵티칼 평택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주장.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준 건 ‘뚜벅이’ 대열 가장 뒤를 지키고 있는 김동은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다. 그는 2주에 한 번씩 옥상 농성장으로 의료지원에 나선다.
옥상에 올라가 보니 문제점이 보였다. 고공농성을 하다 보면 발생하는 건강상의 문제 중 하나가 근육 감소다. 높은 곳에 거점을 마련하다 보니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다리 근육이 감소하게 된다.
농성장이 있는 관리동 옥상 바로 옆에는 불탄 공장이 붙어 있다. 그 열기가 관리동 옥상의 바닥에도 영향을 줬다. 울퉁불퉁한 바닥 때문에 걸으려고 해도 쉽지만은 않았다.
“(고공농성 중인) 두 분이 저보고 하는 말씀이, 우리 두 사람보다 저 밑에 (농성을 지원하는 분들이) 정말 몇 분 안 남으셨는데, 그분들 건강이 훨씬 안 좋다고, 우리 동료 노동자들 건강 좀 체크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고공에서 생활하는 두 사람은 지상에서 생활하는 동료들을 먼저 걱정했다. 날마다 밥을 챙겨주고 손인사를 나누는 동료들이 농성장 대각선 방향에 있는 노조 사무실에 있다. 옥상에서 ‘고립감’을 느낄 그들에게, 아직 여기 동료들이 있다고 매일 그 마음을 전한다.
“저는 5년 전에 김진숙 지도위원하고 같이 걸었어요. 당시 (김진숙 지도위원이) 항암치료 받고 얼마 안 됐을 때라 건강이 너무 걱정되는 거예요. 눈 펄펄 날리는 날, 같이 걸으면서 많은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 박문진 지도위원 내려오시면 두 분이서 같은 운동화 신고 산티아고 간다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희망 뚜벅이로) 같이 걸으시는 거예요.”
김동은은 5년 전 ‘희망 뚜벅이’에도 참여했다. 김진숙(64)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대구 영남대병원(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6개월 넘게 고공농성 중인 ‘친구’에게 향할 때였다.
친구는 박문진(63)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지도위원. 그는 간호사로 근무하던 영남대병원에서 2007년 해고됐다. 이후 14년간 복직 투쟁을 했고, 2019년 고공농성에 돌입했다.
옥상을 ‘집’ 삼은 지 100일을 넘기자, 김진숙은 친구를 위해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2018년부터 암 투병을 했다. 박문진은 그를 한사코 말렸지만, 그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항암후유증, 우울증, 지인기피증, 약물부작용으로 인한 관절통까지 풀옵션으로 앓는 중이라 그동안 돌보지 못한, 아니, 학대한 몸이나 달래려 했는데. 내 친구 박문진이. 내 오랜 친구 박문진이 영남대의료원 옥상에서 176일째 매달려 있으니 앓는 것도 사치라 걸어서 박문진에게로 갑니다. 호포에서 시작합니다.”(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트위터 2019. 12. 22.)
암 투병으로 생긴 부작용과 후유증으로 김진숙은 한동안 걸을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경남 양산시 호포역에서 대구 영남대의료원까지 걸었다. 110㎞가 넘는 길을 200명의 사람들과 동행했다. 그의 ‘뚜벅이’ 소식을 듣고 함께 길을 나서준 사람들이다. 그 과정에서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
두 사람은 70m 고공에서 만났다. 약 2달 뒤인 2020년 2월, 박문진의 고공농성이 마무리됐다. 노사 합의로 해고자들에 대한 복직 문제가 해결되고, 노조 활동의 자유 보장 등이 포함된 조정이 이뤄졌다.
김진숙이 친구를 외면하지 못한 이유는 또 있다. 그 역시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는 1981년 대한조선공사(한신중공업 전신)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1986년에는 노동조합 대의원에 당선돼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 어용노조 비판 등을 했다. 그 과정에서 대공분실에 세 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회사는 무단결근을 주장하며 해고했다.
그는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에 맞서 크레인에 올랐다. 회사는 경영악화를 이유로, 노동자 400명을 내보내겠다고 했다. 김진숙은 노사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땅을 밟지 않았다. 그렇게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높이 35m짜리 크레인 위에서 309일간 생활했다.
“나는 그때 내가 제일 무서웠어요. 위에 고립돼 있으니까 자꾸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해요. 내가 여기에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은 죽음밖에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런데 그럴 때 희망버스 오고 하면서 말 그대로 ‘희망’이 됐죠.”
사람들은 전국에서 부산으로 ‘희망버스’를 타고 와 크레인 아래 모였다. 김진숙과 조합원들을 응원하기 위함이었다. 2011년 6월 11일을 시작으로 파업이 끝날 때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운행된 버스에서 김 씨는 ‘희망’을 봤다.
한진중공업은 230명을 희망퇴직시키고 170명에 대해서는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이후 170명 중 76명이 희망퇴직으로 전환했지만, 나머지 94명은 정리해고자로 남았다.
사측은 35년간 “김진숙만은 복직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김진숙이 맞서지 않은 건 그들의 주장이 정당해서도, 싸울 의지가 부족해서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복직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2020년 희망버스는 다시 부산을 찾았다. 김진숙의 복직을 위해 시민과 노동자들이 뭉쳤다. 이들은 정년 전 복직을 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전국 각지에서 부산 한진중공업 앞으로 500여 대의 버스를 타고 모였다. 정년까지 보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진숙이 두 번째로 길을 나선 건 2022년이다. 자신의 복직을 위한 길이었다. 경남 양산시 호포역에서 출발해 청와대까지 400여㎞. 행진은 40일간 이어졌고, 700여 명의 시민이 함께했다.
그는 해고 37년 만인 2022년 2월 복직했다. 2020년 12월 31일로 정년을 넘긴 그는 명예 복직과 동시에 퇴직했다. ‘기적’이었다.
김진숙이 세 번째로 길을 나선 건 2024년 11월이다.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에서 고공농성 중인 두 여성 노동자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는 길을 먼저 가본 선배로서, 그들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과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부채감이 그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했다.
한국옵티칼 정리해고 문제는 지난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쟁점이 됐다. 김주영·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해고 노동자의 고용승계를 요구했다. 오요안 한국닛토덴코 대표는 “(일본) 본사에 의원들의 우려 사항을 잘 전달하겠다”고 답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여전히 공장은 황량했다.
“사실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2022년 11월 4일, 회사는 200명 전체 노동자에게 청산을 통보했습니다. 고용을 책임지라고 노동조합으로 뭉친 이들에게 가압류·가처분을 진행했습니다. 퇴직 위로금을 받고 싶으면 일본어로 반성문을 써서 내라고도 했습니다.
노조는 공장을 지키며 싸웠고, 회사는 물리적으로 공장을 철거할 계획이었습니다. 구미시는 철거를 승인했습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었습니다. 눈발이 뼛속을 찌르던 지난 1월 8일, 고공에 오르기까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춥고, 뜨겁고, 적막하고, 긴 싸움이 될 줄은요.”(박정혜 씨 경향신문 기고 <참 좋은날이었어요> 2024. 11. 12. 일부)
고공농성 300일째 되던 날, ‘희망버스’가 구미공장에 들어왔다. 전국 각지에서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두 여성 노동자는 여전히 옥상에서 내려오지 못했다. 김진숙은 필리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박문진을 불렀다. 두 사람은 함께 길에 올랐다. 약속했던 산티아고 순례길은 아니었다. 그들만의 ‘노동자 순례길’을 만들어갔다.
열흘간 걸어간 거리 160㎞. 28만 7529걸음. 김진숙과 박문진은 선두에 섰다. 10일간의 여정에 적게는 10명, 많게는 100명의 사람들이 뒤따랐다.
“아래를 향해 흔드는 저 손짓이 얼마나 간절한지 알기에 안 보고 싶었습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도록 삭아져 찢어진 깃발처럼 펄럭이는 저 두 사람을 정말 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라도 안 오면 저 사람들 어쩌겠습니까? ‘명태균’으로 도배된 언론에서 소현숙, 박정혜 저 이름을 우리라도 불러주지 않으면 누가 저들을 부르겠습니까?”(한국옵티칼 구미공장에 도착한 김진숙 지도위원 발언 일부)
김연정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