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덕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후원회원의 기고입니다.

기적의 연속. 진실탐사그룹 셜록에서 낸 선우(가명) 씨 소식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이었다.

조직검사도 불가능할 정도로 간이 완전히 녹아버렸는데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간이 그렇게 녹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료진이 가족들에게 ‘마지막 배웅’을 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간을 기증해줄 뇌사자가 나타난 것도 기적이었다. 의료진 10명 중 8명이 생존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수술을 반대했다. 10시간이 넘는 간이식 수술을 받았다.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사람에게 섣불리 위로할 수 없다. 살아 있기에 고통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적이란 말만 되풀이했다. 마음이 불편하긴 했다. 선우씨와 가족이 겪었을 그 수많은 고통을 ‘기적’이라는 단어 하나로 위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선우 씨에게 재이식을 고려해야 할 만큼의 위기가 계속 닥쳐왔다. 지난 3년간 든 약값과 치료비만 해도 2억 원이다. 지난 5월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 결정은 기적이란 말만 되풀이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지금까지도 너무 힘들었는데 앞으로도 계속 힘들 사람들한테 기적이란 말이 얼마나 마음에 와닿을까.

선우 씨는 2020년 10월 고등학교 3학년 때 인천에 있는 반도체 후공정 업체 스태츠칩팩코리아에 취업했다. 현장실습생이었다.(관련기사 : <반도체 공장 취업한 고교생, 1년 만에 간이 녹았다>)

선우 씨가 맡은 건 칩 어태치(Chip Attach) 공정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반도체 산업은 수많은 유해화학물질이 집약적으로 사용되는 산업이다. 선우 씨도 솔더페이스트, 플럭스, 유기용제 등 다수의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했다. 주 6일 동안 얇은 마스크를 뚫고 들어오는 독한 냄새를 맡으며 화학물질을 씻어냈다.

반도체 업체에 취업한 마이스터고 졸업생 김선우(가명) 씨는 근무 1년 만에 간이 모두 녹아 없어졌다. 일러스트 신지현 ⓒ셜록

그런데 회사는 세정실에서 유기용제 대신 ‘물’을 사용했다고 발뺌했으며, 지금까지 어떠한 사과나 보상도 하지 않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은 선우 씨에게 작업과정을 묻지 않았고 회사의 말만 들었다. 심지어 선우 씨 얘기를 쓴 ‘셜록’ 기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당신의 삶은 너무 억울한데 세상은 너무 뻔뻔하다.

선우 씨는 화학물질을 다루긴 했지만 어떤 화학물질인지, 그 화학물질의 위험성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열여덟 살 현장실습생이 저항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알려줬어야 대응 방법이 뭐라도 있는지 고민할 수 있다.

물론 헛된 바람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시스템 아래에서 현장실습생은 잠깐 쓰다 버리는 소모품뿐이기 때문이다. 교육청과 학교는 취업률에 목을 맬 뿐이고, 기업은 값싼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고 싶어 할 뿐이다.

나는 2021년부터 지난 8월 말까지 택배 일을 했다. 택배 터미널에서 분류 알바에 뛰어든 많은 청년을 봤다. 선우 씨와 같이 마이스터고를 나와 공장에서 현장실습을 해본 청년들도 많이 있었다. 마이스터고를 다니며 제빵 자격증을 따 유명 회사에 들어갔지만, 상사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뒀다는 청년도 봤다.

전문대를 다니다 생계 때문에 그만두고 일을 시작했다는 27살 청년은 ‘노가다’ 빼고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건축학과를 다니고 있는데 학비가 모자라 1년을 휴학하고 알바를 세 탕씩 뛴다는 청년도 봤다. 그들은 똑같은 목소리로 어딜 가나 최저임금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차피 도와주는 사람은 없고 혼자 헤쳐 나가야 한다는 말도 많이 했다.

이들은 쉴 틈 없이 살기 위한 방법을 계속 찾았다.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았다. 내가 택배 일을 그만둔 지 석 달이 넘었는데도, 어디 좋은 분류 알바 일자리가 없느냐고 연락이 온다.

영화 ‘다음 소희’ 한 장면. 2017년 LG유플러스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홍수연의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다. ⓒ트윈플러스파트너스/크랭크업필름

선우 씨처럼 심한 질병을 얻은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선우 씨 글을 볼 때마다 이들이 겹쳐 떠올랐다. 그때도 그들을 쉽게 위로할 순 없었다. 무조건 힘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너무나 쓰린 현실이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 ‘다음 소희’, 지난 2017년 LG유플러스 고객센터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생으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홍수연의 이야기로 많이 알려져 있다. 많은 현장실습생이 일하다 죽고 다칠 때마다 언론들이 잠깐 주목하긴 했지만 금세 잊히곤 했다. 끝까지 관심을 놓지 않으려는 셜록의 태도가 소중한 이유다.

선우 씨가 겪고 있는 일은 선우 씨만의 일이 아니다. 역시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수많은 현장실습생이 교육권, 노동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저임금 땜방 노동자 양성소’에 다름 없는 일터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바뀌어야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경쟁의 벽을 높게 세운 후 청년들을 줄 세워 저항을 가로막는 사회 시스템, 오직 이윤만을 위해 청년들이 놓여 있는 열악한 현실을 교묘히 이용하고 최대한 쥐어짠 후 소모품 취급하는 사회 시스템이 아직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우 씨도, 또 다른 청년들도 외로울 것이다. 위로의 말 대신, 기적이라는 말 대신 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을 하고 싶다. 혼자 헤쳐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하고 싶다.

어쩌면 길고 힘든 싸움일지 모른다. 그래도 끈질기게 싸워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 노동시민사회 단체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관심과 연대를 호소한다.

[스태츠칩팩코리아 간독성질환 산재 피해 기자회견]

일시 : 2024. 12. 11.(수) 오전 11시 30분
장소 : 스태츠칩팩코리아 정문(인천 중구 자유무역로 191)
공동주최 : 건강한노동세상, 노동인권실현을위한노무사모임,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진실탐사그룹 셜록 등

사회 – 반올림 상임활동가 권영은
1) 사건경과 소개 : 반올림 상임활동가 이종란
2) 유해하고 열악한 노동환경 제공한 스태츠칩팩코리아 규탄, 반도체특별법 규탄 : 건강한노동세상 양은정 상임활동가
3) 언론탄압 경과와 2차가해 문제에 대해 : 진실탐사그룹 셜록 김연정 기자
4) 현장실습생들의 생명과 건강이 위태롭다
5) 회사 대표와 책임자들은 사과하고 산재 책임져야 합니다 : 피해자 부모님 발언
6) 기자회견문 낭독 : 노동인권실현을위한노무사모임 김민 노무사, 하은성 노무사

*문의: 양은정(건강한노동세상 010-9145-1917), 이종란(반올림 010-8799-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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