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밤 10시가 가까워진 시간. 서울 영등포구에 위치한 국회 앞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정문으로 향하자 가장 먼저 들린 건 시민들의 목소리였다. 정문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김건희를 특검하라! 국힘당을 해체하라!
국회 앞을 지키는 시민들의 촛불은 밤새도록 계속됐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8일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국회 앞을 지키는 시민들과 밤을 지새웠다.
국회 앞에 밤새 촛불을 켜는 시민들이 있다고 제보한 사람은 김승유 변호사였다. 부산에 사무실을 둔 그는, 지난 금요일 서울로 향했다. 주말에 열린 범국민 촛불 대행진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은 윤석열 대통령 퇴진 집회에서 발생하는 갈등 상황을 조정하는 일을 도맡았다. 김승유 변호사 역시 노란 조끼를 입고 지난 7일 범국민 촛불 대행진에 참석했다.
집회가 마무리되면서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지만, 여전히 국회 앞에 시민들이 있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일곱 개의 국회 출입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았다. 이들은 윤석열 탄핵소추안 표결에 참여하지 않고 국회를 빠져나가는 국민의힘 의원들을 막아섰다. 밤을 새워 국회 출입문 앞을 지켰다.
“제가 어제(7일) 국회 앞 지키는 분들과 이야기해봤거든요. 그런데 어디 단체에서 온 것도 아니고, 개인이 자발적으로 남아 계시더라고요. 특히 10대, 20대 여성분들이요.”
기자는 8일 국회 1번 출입문 옆 돗자리를 깔고 앉은 이들에게 다가갔다. 여덟 명이 둘러 앉아 담요를 덮고 있었다. 두꺼운 패딩 안으로 한기가 파고들었다. 열여섯 개 눈동자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기자님이시면 명함 한 장 주시겠어요?”
하필이면 지갑에 남아 있는 명함도 없었던 날. 경계심을 풀기 위해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스마트폰으로 ‘셜록’을 검색해 보시고는 신원이 보증(?)됐는지, 경계가 조금 누그러진 분위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기자에게 돗자리 방석을 건네주었다. 이들도 모두 오늘 처음 만났다.
처음 보는 외부인을 반길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스팔트 위, 천막 하나 없이 돗자리와 담요로 버티는 사람들은 외부에 완전히 노출돼 있다. 그러다 보니 동의 없이 촬영을 당하기도 하고, ‘해코지’를 당하기도 한다. 특히 하루 전날에는 “후문을 지키던 ‘할아버지’가 젊은 남성에게 맞는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보안관’은 자연스레, 현장을 가장 오래 지킨 강아무개(43) 씨가 도맡았다. 그는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발표한 지난 3일, 강원 원주시에서 부리나케 달려왔다. 15만 원이 넘는 택시비쯤은 상관없었다.
강 씨는 국회로 들어오려고 했던 장갑차를 막아섰다. 머리 위로 헬기가 지나갔다. 총을 멘 군인들이 국회로 진입했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6일째 같은 옷을 입는다. 강 씨는 밤새 국회 앞을 지키다가 오전 5시 반이 지나면 종로에 있는 사우나로 향한다. 여의도 근방 사우나는 물가가 비싼 탓이다. 그곳에서 쪽잠을 자고 일어나면 무인 세탁소를 향한다. 입고 온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돌린다. 그리고 다시 국회로 돌아온다.
기자가 만난 강 씨의 목소리는 꼭 감기 걸린 사람처럼 목이 쉬어 있었다. 매일같이 목 터져라 “윤석열 탄핵”을 외친 탓이다. 수면 부족과 한밤의 칼바람으로 결국 몸은 한계에 다다랐다. 그는 지난 7일 감기에 걸렸다. 그럼에도 매일 집회 현장에 나온다. 며칠 전에는 걱정하는 엄마의 전화도 받았다. 선두에 나서지 말라는 말이었다.
“저는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자꾸 찾아요. 그러면 어떡해. 그냥 가는 거예요.”
그는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오전 2시쯤 되면 국회 주변을 한 바퀴 돈다. 손에는 무전기를 챙긴다. 이것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한 용품이다. 순찰 시간이다. 걸어서 약 40분이 소요된다.
총 일곱 개의 국회 출입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핀다. 철야 농성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일도 늘어난다.
4번 게이트에서 시비가 붙었다는 말에 달려가 보면, 이미 시비 건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가버린 뒤다. 그 말에 발걸음을 돌리면 반대편에 있는 7번 게이트에서 경찰과 싸움이 붙었다는 무전이 들린다. 그러면 다시 발걸음을 돌린다.
달밤에 질주. ‘촛불 보안관’의 일이다.
“(윤석열이) 탄핵되면 집으로 갈 건데, 점점 돈이 떨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이게 더 장기전으로 가면 안 돼요.”
국회 주변에는 각종 차가 주차돼 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주차한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다. 시민들이 자신이 운전하는 버스, 화물차, 트럭, 자가용 등을 세워서 벽을 만들었다. 장갑차의 접근을 막기 위함이었다. 저마다 차를 끌고 와 국회 주변을 에워쌌다.
강 씨는 카키색 모자를 쓰고 있었다. 시민 분이 준 선물이었다. 현장에 오래 있다 보니 그는 유명인사가 됐다. 지난 5일 동안 그는 아홉 군데 언론 인터뷰에 등장했다. 유튜브 채널은 셀 수도 없다.
하루는 찜질방에서 쪽잠을 자는데, 중년 여성이 그를 깨웠다. 처음 보는 얼굴에 어리둥절하게 눈을 껌뻑이자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집회 현장 안 가시고 여기 계세요? 같이 가요. 지금 안 가면 차 막혀요.”
세 시간도 채 못 잤다. 결국 오전 11시에 국회 정문에 도착했다. 아직 사람들이 채 모이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국회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잠을 깼다.
아스팔트 위에서 한밤은 강추위를 견디는 시간이다. 둘러앉은 이들은 담요를 덮고 있다. 핫팩으로 무장도 했다. 그럼에도 발가락 감각은 무뎌졌다. 처음에 느껴지던 발가락이 깨질 듯한 통증도 시간이 지나자 둔감해졌다.
아침을 맞기 위해서는 긴 어둠을 견뎌야 하고, 봄을 맞기 위해서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야 한다. 이들은 그런 마음으로 집회 현장에 나온다. 집에 있어도 잠에 들기 어렵다. 언제 또 비상계엄이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일상을 보내고 있다.
“차라리 국회 앞에서 저랑 비슷한 생각하는 사람들 만나는 게 마음이 편해요. 집에 있어도 잠을 잘 못 자거든요. 비상계엄 터진 이후로는 계속 그랬던 것 같아요.”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정치, 경제, 그리고 시민들의 일상까지 뒤흔들었다.
배달을 전업으로 하는 남성 두 명은 여분의 피켓을 찾았다. 오토바이에 붙이고 다니고 싶다는 이유였다. 벌써 “윤석열 탄핵” 피켓을 붙이고 다니는 기사들도 있다고 전했다.
“(윤석열 정권이) 딱 그런 것 같아요. 쓸모없는 사랑니. 뽑을 때 빨리 뽑아 버려야 돼, 더 썩기 전에. 안 그러면 아파요.”
이날 국회 앞을 지킨 대다수가 20대 여성.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트위터(현 ‘X’)에 올라온 현장 소식 보고 왔어요.”
철야 농성에 참여한 이들은 트위터를 통해 소식을 접했다. 야심한 시각에도 사람이 현장에 있다는 소식에 ‘나도 뭐라도 해야지’,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은 안 바뀐다’, ‘혼자 있으면 위험하니까’ 하는 생각으로 나왔다. 집회 현장이 실시간으로 공유되니 용기를 내고 동참하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수능 마치고 서울로 놀러온 재수생, 아르바이트 마치고 달려온 대학생, 일 마치고 막차 탄 직장인까지. 셜록이 이날 만난 약 20명의 여성들은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 사이였다.
특이한 건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박근혜 퇴진 집회에 참석 못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고, 어제 집회에 나온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고, 오늘 찬바람 맞을 이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은 ‘현생(현실의 삶)’을 이야기하며,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이들의 사정은 이해한다”고 말했다. 다만 이들의 ‘현생’에서는 윤석열 탄핵 집회가 중요했다고 입을 모았다.
7시간 뒤 봐야 하는 시험에서 한 번 정도는 미끄러져도 괜찮았고, 일하면서 조금 피곤해도 괜찮았다. 다만, 비상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 일은 괜찮지 않았다. 정치는 일상과 동떨어져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번 집회에서는 각자 응원봉을 들고 나온 시민들이 눈에 띄었다. 팬덤 문화에 익숙한 이들은 ‘덕질(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해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드는 일)’을 통한 내성이 있다.
장시간 오래 서 있는 일은 어렵지 않다. 응원봉을 흔드는 건 식은 죽 먹기다. 화장실을 가지 않는 요령도 꿰고 있다. “콘서트를 통해 단련”할 수 있었다.
철야 농성에 참여한 이들 손에도 응원봉이 들려 있었다. 잠이 쏟아질 때면 일어나서 몸을 움직이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기자도 이들과 이야기 나누겠다고 두 시간을 책상다리 하고 앉아 있으니 고관절이 뻐근했다. 허리도 뻣뻣해졌다. 양쪽 바지 위에는 부착형 핫팩을 붙였지만 한기가 감돌았다. 서 있으면 춥고 다리가 아프고 앉아 있으면 온몸이 쑤셨다.
화장실을 가고 싶어도 쉽지 않았다. 지하철 막차가 끊기면 지하철역 내부는 새카만 어둠이 깔린다. 가동이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핸드폰 손전등을 들고 내려갔다 올라오는 건 웬만한 담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깊은 9호선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다 보면 도중에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
다음 선택지는 주유소 화장실이었다. 그러나 영업을 마치면 문을 닫는다. 결국 근처에 있는 호텔 화장실을 이용한다. 한때 호텔은 외부인의 화장실 출입을 제한하는 경고문을 달아두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이 트위터에 공유되면서 화력이 모였다. 호텔은 화장실을 재개방했다.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여섯 시 반. 돗자리 위에 앉은 이들은 ‘탄핵송’을 부르며 응원봉을 흔들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오던 남자는 우리를 향해 손가락으로 욕을 했다. 이후에도 두 번을 오가며 주시했다.
대신 그보다 응원하고, 고마움을 전하는 시민들이 더 많이 찾아왔다. 이날 돗자리 옆에는 핫팩과 귤, 치킨, 피자, 커피, 유자차 등이 가득했다. 힘내라고 주먹을 불끈 쥐거나 고맙다며 인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둠이 밀려와도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국회 앞 반짝이는 시민들은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탄핵이 될 때까지 불을 밝히겠다고 다짐했다.
“계속 여기 있다고. 지켜보고 있다고. 지치지 말고 우리가 또 한 번 바꿔보자, 그런 마음으로 나오게 돼요.”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