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사당역 4번 출구를 빠져 나오자 K팝 세상이었다. 에스파의 ‘위플레쉬’가 귀를 때리고, 알록달록한 응원봉이 눈앞에서 춤을 췄다. 응원봉 모양과 빛깔은 제각각이지만, 구호는 동일했다.
“윤석열 퇴진!”
“국민의힘 해체!”
목소리의 주인공은 거의 20대 초중반 여성. 귀와 눈은 인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뇌에 전달했지만, 적응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오래된 정보로 가득한 내 40대 후반의 뇌는 에스파의 노래처럼 빠르지 않았다. 다른 세상에 뚝 떨어진 기분이었다.
2002년 미선-효순 촛불집회,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 등 사안에 따라 촛불집회 분위기는 변했지만, 이번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걸그룹 에스파 곡에 맞춰 탄핵 구호를 외치는 세상이라니. 구호 타이밍과 박자 맞추기도 어려웠다. 분위기 파악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집회 대열 끄트머리에선 지드래곤의 ‘삐딱하게’가 크게 울려퍼졌다. 이건 또 뭔가 싶었는데, 오히려 마음의 적응이 쉬워졌다. 에스파에 비하면 지드래곤은 ‘왕년의 가수’니까.
내란수괴 윤석열 탄핵이 불발된 이후, 새 주의 첫 월요일(9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선 어김없이 K팝이 큰일을 했다. 20대 여성이 주축이 된 집회 참석 시민들은 촛불보다 오래가고 바람에도 안 꺼지는 응원봉으로 무장했다.
여기에 더해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와이어 전구를 몸에 두른 ‘인간트리’도 등장했다.
“지난 토요일(7일) 집회는 못 나왔는데, 뉴스로 보니까 너무 재밌어 보이더라구요. 저는 아이돌 응원봉이 없어서, 집에 있던 크리스마스 트리(전구)로 온몸을 감고 나왔어요. 어차피 연말이니까, 분위기 좋게 ‘인간트리’로 해보자고 했어요.”
대학생 고예림(23세) 씨는 나무처럼 두 팔을 펼쳐보였다. 머리부터 허리까지 감긴 작은 전구에서 알록달록한 빛이 점멸했다. 고 씨는 윤석열의 내란이 터진 지난 3일 밤, 인터넷 게임을 하고 있었다.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는데, 비상계엄 뉴스가 뜬 뒤로는 손에 아무것도 안 잡히더라구요. 저희는 계엄을 겪은 세대가 아닌데도, 뭔가 두려운 느낌이 들기도 했거든요.”
공포감은 같은 세대와 연결된 뒤부터 조금씩 사라졌다.
“SNS(트위터, 현 X)에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다들 놀라면서 분노하고 있더라구요. 모바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것도 민주주의 덕분인데, 이게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의견도 많았고. 나 혼자만 분노하는 게 아니라는 안도감도 들고….”
많은 사람들처럼 고 씨 역시 SNS에서 함께 분노하고, 공감하고, 결국 집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9일 집회에 함께 참석한 친구 추예지(22세) 씨 역시 트위터에서 만난 친구다. 추 씨 역시 온몸에 전구를 둘렀다.
20대 초반인 이들은 탄핵 집회에 또래 여성이 많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할까.
“여초(여성들이 많이 이용하는) 커뮤니티, 트위터 등에서 그동안 사회적 이슈가 많이 논의돼 왔거든요. 저희도 거기서 정보를 얻고 의견도 교환했구요.
윤석열 씨는 지난 대선 때부터 여성혐오 분위기를 만들어냈잖아요. 여성가족부도 없앤다고 했고, 최근엔 또 여대 문제도 있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의 분노가 많이 쌓인 게 아닌가 싶어요.”
추예지 씨의 말이다. 여기에 고 씨가 “20대 남성들의 집회 참여가 지난주보다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두 사람의 촛불집회 참여는 지난 금요일에 이어 이날이 두 번째. 집회에 대한 거부감이나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SNS에서 봤을 때도 디게 즐겁고 재밌게 보였는데, 현장에 나오니까 더 신나요. 같이 노래 부르고 춤도 추니까요.”(고예림)
두 사람은 연말까지 ‘인간트리’ 콘셉트를 유지하기로 했다. 고 씨는 “대통령 탄핵이 될 때까지 계속 집회를 나올 예정”이라며 “우리는 될 때까지 싸울 것이기 때문에 시민이 무조건 이긴다, 탄핵은 올해 내에 마무리 될 것 같다”고 말했다.
9일 진행된 탄핵 촛불집회는 행진을 거쳐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를 포위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시민들은 당사를 향해 “국민의힘 해체하라”를 반복해 외쳤다. 집회는 오후 9시에 끝났다.
고 씨와 추 씨는 그제서야 늦은 저녁을 먹으러 현장을 떠났다. 몸에 두른 전구에서는 계속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다시 멀리서부터 K팝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로제의 ‘아파트’였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