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촛불집회가 아니라 ‘응원봉 집회’로 불러야 한다고 했던가. 11일 오후 6시 국회 앞에서 ‘윤석열 탄핵 집회’가 열렸다. 이날도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어두운 밤하늘을 환하게 빛냈다.
세대통합, 남녀노소 불문하고 시민들은 가지각색의 응원봉을 들고 나왔다. 아이돌 팬클럽 응원봉부터 경광봉과 캐릭터 조명까지. 국회 앞으로 뛰쳐나온 이들의 사연이 각각 다르듯이, 응원봉은 각자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듯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수제 응원봉’. 시민들은 직접 만든 개성 넘치는 응원봉을 들고, 거리를 활보했다.
조은아(36) 씨는 아이패드에 응원봉을 직접 그려서 들고 다녔다. 전두환의 얼굴을 바탕으로 놓고 윤석열 얼굴을 그려넣은 그림이었다. 윤 대통령 머리 위엔 수갑이 그려져 있었다.
“응원봉이 없으니까 직접 그려본 겁니다. 국민의힘도 (당원들이) 많이 탈당하고 하니까 좀 부끄럽지 않을까요? 저희 지역구 국회의원이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인데요. 그분도 이렇게 (탄핵 찬성으로) 돌아선 걸 보니까, (국민의힘 국회의원) 많이들 (탄핵 찬성 쪽으로) 오실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희망 갖고 있습니다.”
피규어에 전구를 감싼 이색적인 응원봉도 거리를 빛냈다. 피규어는 일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의 인기 캐릭터 ‘아스카’. 수제 응원봉의 주인 최지현(24) 씨는 제작 경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집에 있는 가장 공격적인 피규어를 (골라서), 아이돌 응원봉을 가져오는 사람들한테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스카’는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혁명적인 여성이거든요.“
무엇이 그렇게 최 씨를 화나게 만든 걸까.
“(너무 많아서) 고를 수가 없는데…. 일단 부모님 두 분이 광주 출신이거든요. 광주(항쟁 당시의) 운동가들이 버젓이 살아 있는 지금 이 시대에, 그렇게 민주주의를 죽이려 하는 (내란) 행동이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남녀 갈라치기를 이용해서 자기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는 것도 짜증이 났습니다. (평일에) 일이 늦게 끝날 때는 새벽에 와서, 국회를 지키고 있는 10대, 20대 분들 간식 주는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전통 등불도 등장했다. 박지선(29) 씨는 전통 문양의 등불에 LED촛불을 넣은 응원봉을 들고 돌아다녔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키트로 (등불을) 만들어서 탄핵 피켓을 연결한 거예요. 원래 문화재를 좋아해서 만든 건데요. 저는 응원봉이 없어서 그냥 가지고 나온 거예요. 발광력이 약해서 아무도 관심을….(웃음)”
LED 촛불은 흐리게 빛났지만, 박 씨의 발언은 날카롭게 빛났다.
“민주주의가 근본인 이 나라에서 너무 근본 없이 하는 그 (내란) 행동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역사의 잘못된 점을 반복하는 그 행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그 행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국회로 나왔습니다.”
수제 응원봉과 기성 응원봉의 화합도 찾아볼 수 있었다. 원희(가명, 20대) 씨는 LED 줄조명을 감싸서 만든 수제 응원봉을 들고 있었다. 옆에 있던 친구 재희(가명, 20대)는 기성품인 LCK(League of Legends Champions Korea) 응원봉을 흔들었다.
“다이소에서 전구를 샀어요. 그래서 셀카봉에다가 전구를 감았어요. 다들 응원봉을 들고 나오는데, 저는 들 게 없어서 비슷한 거라도 차별화를 주고 싶어서요.“(원희)
“계엄령의 무게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윤석열 정부에서 계엄을) 가볍게 여기는 듯해 국회로 나왔습니다.”(재희)
시민단체 쪽도 수제 응원봉을 선보였다. 김은희 ‘온전한생태평화공원조성을 위한 용산시민회의(이하 용산시민회의)’ 대표도 수제 응원봉을 들고 나왔다. 일회용 플라스틱 커피컵에 셀로판지를 넣고 손전등을 연결해 만들었다.
“응원봉을 대략 40개 정도 만들었는데, 다 주변에 나눠줘서 몇 개 안 남았어요. (당장 현장에) 한 8개 정도 있어요. 이번주 토요일 촛불집회 전까지 90개 더 만들어야 해요.”
이날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국민의힘 당사 앞까지 함께 행진했다. 저마다의 손에 들린 가지각색의 응원봉이 오히려 조화로운 빛을 냈다. 오후 9시가 넘도록 많은 시민들이 집에 가지 않았다. 시민들이 꽉 찬 거리에선 가수 로제의 노래 ‘아파트’가 울려 퍼졌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