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헌법을 훼손하는 계엄 선포와 협박에 가까운 포고문, 갑작스러운 군대 출동 등으로 큰 심리적 충격을 받으셨을 모든 국민께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헌법 위반과 부당한 권력 행사로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안긴 현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죄와 더불어, 헌법에 명시된 절차에 의한 직무 정지 또는 사퇴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합니다.“(국민공동체 치유와 복원을 바라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일동)
윤석열 내란 사태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까지 나섰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510명은 12일 낮 12시 40분경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윤석열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지 약 2시간 만에 나온 선언이다. 12.3 비상계엄 선포로부터는 9일 만이다.
앞서 윤석열은 대국민 담화에서 “계엄은 대통령 고유의 통치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어 “저를 탄핵하든, 수사하든 저는 이에 당당히 맞설 것”이라고 말했다.
경희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백종우·백명재 교수도 이번 시국선언문에 이름을 올린 의사들이다. 이들은 12일 저녁 셜록클럽 ‘굿바이 2024 하림×왓슨’에 연사로 참여했다. 이들은 계엄 선포로 인한 ‘국민적 트라우마’에 대해 설명했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비상계엄령이 처음으로 선포돼서, 그만큼 국민들이 갖고 있는 불안이 큽니다. 사실 트라우마의 가장 좋은 치유는 정의(실현)입니다. 그래야 빨리 회복이 될 수 있어서 (시국선언문을 통해) 상식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백종우 교수)
정신의학과 의사들의 시국선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12월 3일부터 현재까지 온 국민은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 방송에 이어, 평화로운 국회에 무장 군인들이 침입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민들이 저지하며 대치하는 장면을 온 국민이 목격했습니다. 군부독재와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하는 많은 국민께서는 그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며 심각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료 시민의 일부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여 공동체 내의 분열과 적대를 부추기는 듯한 계엄 담화는 국민의 마음에 큰 환멸감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계엄 포고문에 담긴 온갖 금지와 협박은 선량한 시민들께 두려움과 모욕감을 주었으며, 치료와 돌봄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의료진에 대한 살벌한 위협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백종우 교수는 시국선언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해 설명했다.
“비상계엄 당일에 대기를 하고 출동은 안 하셨던 군인 분이 (병원으로) 찾아오셨는데요. ‘내가 왜 이런 직업을 선택했을까, 잘못 선택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도덕적 손상’이라고 볼 수 있죠.
우리(정신과 의사들)도 뭔가를 좀 해야겠다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단체가 아니라 동의하는 개인들이 연명하는 형식으로 정신과 의사 510명이 하루 만에 사인을 했더라고요.”
백명재 교수는 국군수도병원 정신건강증진센터 센터장 출신이다. 백 교수는 특수한 조직인 군대에서 군인들의 정신건강이 왜 중요한지 설명했다.
“군부대에서 큰 사고가 났을 때 현장에 가서 사고에 노출된 장병들을 돌보는 역할도 했는데요, 각 개인의 회복력, 충격을 받더라도 그 사람이 얼마나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부대가 얼마나 건강한지, 그리고 그 부대의 사기가 어떤지 이런 것들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도 사고가 난 부대를 가면 먼저 이제 장병들을 (바로) 만나는 게 아니라, 부대 지휘관을 통해서 지금 상황이 어떤지, 그리고 부대 사기가 어떤지 이런 것들을 다 여쭤보거든요. (…) 이번 (계엄령 선포) 사태로 출동한 부대뿐만 아니라 전군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아서 좀 안타깝습니다.”
백종우 교수는 ‘골드워터룰’, 즉 환자를 대면해서 진찰하지 않고 본인의 동의가 없으면 진단하지 못한다는 원칙을 언급하며, 직접적인 진단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일반적인 의견으로 접근했다. 그는 과거 왕정 시절 사례를 통해 현 시국 상황을 분석했다.
“(과거) 왕이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편집증에 빠진 사례들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죽이려 하는 것처럼 느끼고, 반국가세력들을 끝없이 의심하고, 그걸 또 공격하고. 동시에 무력감을 또 느끼고.
그러면서 전체 국민들에 대한 공감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나는 너희들의 마음속을 볼 수 있다’는 식으로. 망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게 되는 그런 변화가, 이미 많은 왕들이 겪은 일이긴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내란 사태에 의해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시민들은 당장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백명재 교수는 휴식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분노나 이런 것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간혹 본인 스스로 주체를 못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한 분은 밤에 자려고 누우면 (이번 내란 사태가) 너무 어른거려서 잠을 못 주무신대요. 본인 스스로 케어가 안 돼서 일이 손에 안 잡힌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분들은 우선 과도하게 유튜브를 본다든지 그런 일을 피하는 게 현재로서는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내란 사태 이후, 정신질환을 뜻하는 단어들이 욕설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박지원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전남 해남군완도군진도군)도 12일 뉴스1 유튜브 채널의 ‘팩트앤뷰’에 출연해, “무엇보다 시급한 게 정신병자 윤석열을 빨리 체포해야 해요. 그래야 사고를 막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백종우 교수는 정신장애인들에게 편견과 차별을 조성하는 언어 사용의 위험성에 대한 당부도 빠트리지 않았다.
“물론 분노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런 때에 특정 질병을 이야기하는 것들은 (정신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더 쉽게 만드는 일이잖아요. 우리 사회에 큰 도움이 안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거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도 12일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이러한 행태를 비판했다.
“담화 후에 그(윤석열)를 조현병이나 정신과 환자에 비유하는 글들이 자주 보이는데요. 자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 피해를 주지 않는 환자분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아래는 ‘510명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시국 선언문’ 전문이다.
510명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시국 선언문
헌법이 정한 절차에 의한 퇴진만이 국민적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12월 3일 헌법을 훼손하는 계엄 선포와 협박에 가까운 포고문, 갑작스러운 군대 출동 등으로 큰 심리적 충격을 받으셨을 모든 국민께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또한 그 와중에도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용기와 시민의식을 발휘해 주시는 모든 분께 각별한 존경을 표합니다.
헌법 위반과 부당한 권력 행사로 대한민국에 큰 충격을 안긴 현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사죄와 더불어, 헌법에 명시된 절차에 의한 직무 정지 또는 사퇴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합니다. 또한 사회 공동체의 조속한 안정을 위해 정치권은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고 수용하여 조속한 수습을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12월 3일부터 현재까지 온 국민은 심리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계엄 선포 방송에 이어, 평화로운 국회에 무장 군인들이 침입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민들이 저지하며 대치하는 장면을 온 국민이 목격했습니다. 군부독재와 국가폭력의 역사를 기억하는 많은 국민께서는 그 트라우마를 재경험하며 심각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동료 시민의 일부를 제거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여 공동체 내의 분열과 적대를 부추기는 듯한 계엄 담화는 국민의 마음에 큰 환멸감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계엄 포고문에 담긴 온갖 금지와 협박은 선량한 시민들께 두려움과 모욕감을 주었으며, 치료와 돌봄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의료진에 대한 살벌한 위협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어린이들은 학교가 문을 닫을지, 전쟁이 벌어지진 않을지 무서워하고, 어른들 또한 경제를 걱정하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며 심란해합니다.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체포계획, 내란 음모 등의 경악스러운 사실이 하나씩 밝혀지는 과정은 그러한 심리적 고통을 가중하고 있습니다. 온종일 뉴스와 유튜브를 시청하며 불면과 불안을 호소하는 분들 또한 늘어나고 있으며, 군인, 경찰 등의 공직자들은 도덕적 손상에 따른 울분과 우울을 호소하기도 합니다. 후진적 쿠데타로 인한 국가 위상 및 자부심의 저하를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경제 위기에 대한 우려로 인해 현실의 안정과 생업에 대한 위협감도 커지고 있습니다.
정신의학적으로 폭력 트라우마 피해자의 빠른 회복을 위해 두 가지 요소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피해자의 신속한 안전 확보이며, 두 번째는 가해자가 응당한 처벌을 받는 정의로운 해결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불안정한 상황은 국민의 트라우마를 강화하고, 미래에 대한 공포를 증폭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 사회는 정치의 위기가 촉발한 생존의 위기에 더하여, 실존의 위기도 겪고 있는 국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명확하게 헌법에 근거한 단호한 해법만이 우리 국민과 대한민국을 폭력의 트라우마에서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에 우리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은 국민의 심리적 안정, 정신적 충격에 대한 치유를 위해 다음 사항이 조속히 진행될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첫째,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현 대통령과 관련자들은 국민에게 정중히 사죄해야 하며, 헌법 절차에 따른 조치에 따라야 합니다.
둘째, 집권 여당은 국민의 요구를 경청하여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국회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현 대통령과 정부가 초래한 의대 증원으로 인한 위기의 해결을 위해서는 의료 전문가에 대한 처단과 같은 위협이 아닌 존중이 필요합니다.
넷째, 정치권은 현재 국민이 느끼는 현실적 위기를 최대한 신속히 종식하기 위한 합리적인 결정과 조치를 추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국민의 심리적 충격을 치유하고 사회 통합과 공동체 복원을 도모할 수 있는, 일회성이 아닌 근거 기반의 체계적인 정신건강 정책을 권고합니다.
202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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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