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은 신호영(48, 가명) 씨의 손을 들어줬다. 어느새 머리가 희끗해진 그는 7년 만에 대법원으로부터 최종 ‘산재 인정’을 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이 너무 야속했지. 내가 거짓말하는 것도 아닌데, 그걸 못 믿어서 대법원까지 간 거잖아.”(어머니 김정혜 씨, 가명)
근로복지공단은 피해자의 호소를 외면했다. 호영 씨의 산재 신청을 불승인한 근로복지공단. 그에 불복한 호영 씨가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1심 재판부는 산재를 인정한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했다.(관련기사 : <법원은 산재 인정, 공단은 불복 항소… “죽어야 끝날 일인가”>) 이어진 2심에서도 재판부는 산재를 인정했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결국 대법원까지 재판을 끌고 갔다.
그렇게 이어진 싸움이 7년이었다. 대법원에서 지난달 28일 별도의 심리 없이 근로복지공단의 상소를 기각하면서 지난한 싸움이 끝났다.
호영 씨는 2002년 3월부터 2년간 LED 제품 생산 라인에서 엔지니어로 일했다.
하루 11시간씩 100℃가 넘는 고온으로 제품 열 테스트를 수행하거나, 화학물질이 가득한 용액에 웨이퍼를 넣고 빼는 작업 등을 했다. 심지어 하루 11시간에서 13시간씩 일했다. 주말에도 예외는 없었고, 주로 야간조로 투입됐다.
그에게 주어진 건 방진복과 얇은 마스크였다. 작업장에는 열을 식히는 장치나 국소배기장치도 없었다. 업무 효율을 높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온 건 2007년 6월이었다. 조금씩 뻣뻣하게 굳어가던 몸. 호영 씨는 2009년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치료약이 없는 불치병. 50대 전후로 발병한다는 병이 33살에 나타났다.
1심 판결은 지난해 6월 나왔다.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신청서를 제출한 지 6년 만에 나온 첫 번째 판결. 당시에도 거동이 어려웠던 그에게 산재 인정과 요양급여, 간병급여 등이 시급히 필요했다.
근로복지공단도 1심 재판부의 판단을 받아들여 ‘항소를 포기하겠다’고 법무부에 밝혔다. 그러나 법무부는 ‘소송을 계속하라’고 지휘했다.
근로복지공단이 ‘항소 포기’ 의사를 밝히면 법무부가 받아들이는 게 관례였다. 2021년과 2022년에는 법무부가 항소 이행을 지시한 사례가 없었다. 하지만 2023년은 달랐다. 이수진 당시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에 따르면, 그해에만 호영 씨를 포함해 ‘반대 사례’가 4건이나 있었다.(관련기사 : <파킨슨병 산재 또 승소… ‘법정고문’은 7년으로 족하다>)
“그때 내가 회사 못 나오게(퇴사하지 못하게) 했어. 끝내 다니다가 이 병을 얻은 거잖아. 그게 참… 너무 후회가 되더라고.”
호영 씨에게 사과를 한 건 회사도, 근로복지공단도 아니었다. 나날이 악화되는 아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어머니 김정혜(72, 가명) 씨였다.
어느새 일흔이 넘은 노모는 인생의 ‘황금기’를 병상에서 보내는 아들을 간호했다. 지우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들이 힘들다고 이직을 고민할 때 다른 일 해 보라고 권하지 않았던 과거는 발목을 잡았다.
아들과 보내는 시간은 점차 늘어났다. 이제는 옆으로 넘어져도 호영 씨 힘으로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고, 마음 편하게 잠든 것도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대법원 판결을 통해 산재가 인정된 지금은 한시름 덜지 않았을까. 반가운 마음으로 호영 씨에게 전화 인터뷰를 요청했다.
“죄송해요. 컨디션이 안 좋아서 11시 30분쯤에 전화해도 될까요.”
전화하기로 예정된 9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간. 호영 씨가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법정 공방이 길어지면서 호영 씨의 몸 상태도 나날이 악화됐다. 증상을 완화시켜준다는 약도 7년이라는 시간 앞에 속절없었다.
오전 11시 30분이 돼서야 전화를 할 수 있었다. 호영 씨는 짧게 안부 인사만 나누고 핸드폰을 정혜 씨에게 넘겼다. 그를 대변하는 건 늘 어머니의 몫이었다.
“참 기분이 묘했죠. 끝을 봐야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지나고 보니까 ‘언젠가 되긴 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대법원 선고가 있던 지난달 28일. 호영 씨 가족들은 오전부터 결과가 나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1심, 2심 재판부가 그랬던 것처럼 ‘산재 인정’ 결과를 받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점심시간을 조금 넘기자 결과가 확인됐다. 심리불속행 기각. 재판부가 심리하지 않고 근로복지공단의 기각하겠다고 결정했다.
“이제 한시름 덜겠구나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직 멀었더라고. ‘더 큰 산’을 넘어야 되더라고요.”
호영 씨의 가족이 다시 울상을 지은 건 산재 인정 이후의 절차 때문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은 호영 씨의 산재가 승인됐다며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향후 보상 절차에 대한 안내였다. 그 서류들을 준비하는 것도 역시나 일흔 넘은 노모의 일이었다.
“(산재 행정소송 이후가) 절차적으로 복잡해요. 그런데 공단에서는 이거 신청해야 된다거나, 어떤 서류 필요하니 제출해라, 이런 안내도 거의 안 해줘요. 산재 인정받고 잘 모르는 분들은 신청도 못 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어요. 따로 안 챙겨주거든요.”(이종란 노무사)
불친절한 행정 서비스에 정혜 씨는 분통이 터졌다. 주치의한테 소견서를 받아야 했다. 호영 씨는 요양급여뿐만 아니라 장해급여, 간병급여 등이 필요했다. 이것들을 하나 신청할 때마다 의사 소견이 필요했다.
정혜 씨는 지난 17일 주치의로부터 소견서 작성을 해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왔다. 이종란 노무사는 “산재 피해자에게 소견서 작성을 거부하는 주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겠죠. 8년 동안도 (산재 행정소송) 해봤는데, 계속 해봐야지.”
지난 시간은 정혜 씨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아야 바뀐다”고 설명했다.
정혜 씨는 지난해 진실탐사그룹 셜록과 인터뷰를 하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 간병의 어려움과 근로복지공단의 부당한 항소 철회를 호소하는 글을 전하기도 했다. 아들의 산재 승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근로복지공단에 더는 시간을 끌지 말아달라고 외쳤지만, 끝장을 본 뒤에야 ‘산재 인정’ 결과를 받을 수 있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의 문턱은 높다. 지난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 중 박정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파주시을)은 호영 씨 사례를 언급하며, 근로복지공단에 태도 변화를 요구했다.
박 의원은 “사회 변화에 따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 늘어나고, 의학·과학의 연관성만 따지면 산재 노동자는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며, “법원의 (산재 인정)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에 (근로복지)공단도 그 기준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정혜 씨는 피 말리는 소송전을 이어가는 또 다른 산재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캄캄한 터널을 걷는 기분일 텐데, 언젠가는 ‘드디어 빠져 나왔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그런 기대와 용기를 가지고 승리할 때까지, 끝까지 싸워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은 산재 피해자들한테 복지가 될 수 있도록 다시 한번 생각해야 돼요. 그렇게 잔인하게 하지 말고 복지를 위해 일했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해야 할 ‘숙제’가 남은 정혜 씨는 다음을 기약했다. 모든 절차들을 마치면 반가운 소식을 안고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자도 그때 다시 축하를 전하겠다고 답했다.
“계속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아픈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 많이 해주십시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