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 일에 연루된 청년은 지적장애가 있었다. 국선전담사건으로 변론을 맡은 내게 청년은 “물건 배달 아르바이트로 한 일”이라며 “보이스피싱 범죄인 건 몰랐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진실로 보였지만 중형을 피하진 못했다. 긴 징역형을 살던 그는 변론을 맡아준 나에게 감사 편지를 종종 보냈다. 편지 말미에는 “출소하면 비타500을 사서 가겠다”는 말을 꼭 적었다. 나는 “비타500보다 박카스를 더 좋아한다”고 답하며 드문드문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출소할 시기가 지나 몇 년이 흘러도 청년은 찾아오지 않았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법정스님은 과거에 이런 글을 썼다.
“불가 용어에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게 있다.
모든 인연에는 오고 가는 시기가 있다는 뜻이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만나게 되어 있는 것이고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
나는 이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건과 함께 오고, 사건이 끝나면 떠나는 피고인들과의 관계 역시 스님의 말씀처럼 생각한다. 그렇게 시절인연이 다했다고 여긴 ‘나의 친애하는 피고인’을 우연히 만난 적 있다.

법인택시를 모는 중년의 그녀가 피고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난 사정은 이렇다.
그녀의 택시가 ‘유턴 허용 구역’ 조금 앞에서 유턴을 했을 때, 하필이면 왼쪽 뒤편에서 배달 오토바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배달원은 택시를 피하려다 가로수를 들이받고 쓰러졌다. 그녀는 사고 사실을 모른 채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결국 뺑소니 혐의로 벌금 500만 원 약식기소가 되면서 피고인이 됐다.
그녀는 수배되고 노역장에 유치될까봐 지인에게 돈을 빌려 벌금을 납부했다. 이후 빌린 돈 갚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비접촉 사고여서 인지를 못했을 뿐인데, 뺑소니 혐의가 적용되니 억울하기도 했다.
피고인은 약식기소에 불복해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해당 사건을 내가 맡으면서 그녀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살펴보니 “사고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피고인의 주장은 사실로 보였다. 하지만 기소된 이상 무죄 받을 가능성이 무척 낮은 게 현실이다. 피고인 역시 통상의 재판으로 하면 뺑소니 혐의를 벗기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무죄 주장을 하더라도, 무죄가 선고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형을 깎을 수 있는 ‘양형사유’가 있는지 피고인에게 물었다.
국선전담변호사로 만나는 나의 피고인들은 대부분 가난했고, 가난한 피고인들은 자신의 식사를 선택할 수 없는 환경에 있기에 주로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같은 질병을 갖고 있다. 나는 다른 피고인들에게 늘 하는 질문을 그녀에게 던졌다.
“어디 아프신 데는 없어요?”
피고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뇌종양하고 심장병이요”라고 답했다. 놀란 나를 보면서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의사가 그러는데 뇌에 종양이 있고, 심장이 안 좋아서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대요. 악화되지 않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게 어디예요. 열심히 운동하고 일하면서 삽니다.”
피고인은 가정폭력 피해자였다. 아이를 생각해 남편의 폭력의 견디며 살았는데, 오히려 초등학생 아들이 “제발 아버지를 떠나 둘이서만 살자”고 애원했다. 그렇게 아들과 집을 나왔고, 둘이 산 지는 벌써 몇 년이 지났다.
빌린 돈으로 이미 벌금을 납부했으면서, 굳이 정식재판을 청구한 이유가 궁금했다.
“벌금 500만 원을 갚으려면 일을 해야 하잖아요. 근데, 뺑소니로 운전면허가 취소되면 일을 못 해요. 앞날이 창창한 20대 아들은 공사판에서 일하고 있는데, 제가 짐이 되면 어떡해요. 그렇게 되면 저는 그냥 죽어버릴 거예요!”
피고인은 소아마비 장애인으로 두 다리의 길이가 달랐다. 식당 일이나 파출부 등 오래 서서 움직이는 노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앉아서 하는 운전이 가능해 택시를 몰았는데, 뺑소니로 유죄가 확정되면 그것마저 잃는 거였다.

누군가에게 500만 원은 소액일 수 있지만, 나의 피고인에겐 태산 같은 돈이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가 TV에서 들려준, 어느 살인 누명 피해자의 법정 최후 진술이 떠올랐다.
“오래전, 1심 재판 때 국선변호인이라도 제 말을 잘 들어주었더라면 제가 이렇게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피고인 앞에서 머리를 흔들며 ‘왜 굳이 정식재판을 청구했을까’라는 생각을 털어냈다. 나의 피고인은 꼭 무죄를 받아야만 했다. 그녀에겐 삶이 걸린 문제였다. 내가 제안했다.
“국민참여재판 한번 해봅시다.”
열심히 살아도 박복하기만 했던 운명에 그녀를 그대로 맡겨놓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휴일에 사건 현장에 가서 피고인이 운전했던 경로를 쫓아 수없이 돌아다니고, CCTV 영상도 무한 반복으로 시청하며 재판을 준비했다.
그런데, 재판을 약 1개월 앞두고 피고인이 사라졌다. 아예 연락이 되지 않았다. 대책 없이 재판을 회피할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녀가 자기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했던 “수원 ○○병원에서 심장 치료를 받았다”는 말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당 병원에 전화를 했다. 역시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확인해줄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병원 관계자에게 “○○○ 씨가 치료를 받으러 온다면 변호사가 애타게 찾고 있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한 남자에게 연락이 온 건 그날 오후였다.
“엄마가 심장 이상으로 쓰러졌습니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2주째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습니다.”
피고인의 아들이었다. 아들의 말대로 그녀는 갈비뼈를 모두 열고 심장 수술을 받고 입원 치료 중이었다. 얼마 뒤 의식은 돌아왔지만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재판 날은 다가오는데 수술 후유증으로 높아진 체온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의사는 단호했다.
“재판 당일에도 외출은 불가능 합니다.”
국민참여재판이 열린 2019년 6월 14일, 피고인은 기어코 법정에 나타났다. 아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말이다. 몸의 열이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복잡했다.
‘재판 받다가 사망하면 그녀는, 그녀의 아들은,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불안한 내 마음을 읽었는지 피고인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재판이 끝날 때까지 앉아 있을 테니, 제가 일어설 때나 앉을 때 변호사님이 앞에서 저를 안아 주세요. 가슴을 열고 수술했기 때문에 상체에 힘을 주면 안 돼요.”
이뇨작용이 있는 약을 복용한 피고인은 수시로 화장실에 가야 했다. 그런 피고인을 두 팔로 안아서 일으켜 세우고, 화장실까지 부축해 데려갔다. 피고인이 바지를 내리면, 다시 피고인을 안은 채 조심스럽게 변기에 앉혀야 했다. 용변을 다 보면 또 다시 안아 일으켜 세우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그녀는 손에 힘을 주지 못해 주저앉기를 반복했고, 그럴 때면 옷을 올리고 내리는 것도 내가 해줘야 했다. 가사와 일은 동시에 해봤지만, 변론과 간병을 병행하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재판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날 유능한 검사의 현란한 언변은 우리의 강력한 초라함에 힘을 잃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병색 완연한 깡마른 피고인과, 그녀를 법정에서 일으켜 세워 부축해 나가는 변호인, 우리의 힘겨운 걸음 자체가 양형 자료였다.
“여러분, 사고 시각을 보십시오. 밤 12시에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변론에 배심원들 눈에서는 안쓰러움이 뚝뚝 떨어졌다. 화면에 피고인의 진단서를 띄웠다.
“피고인에게는 뇌종양이 있고, 심장에는 세 개의 인공판막이 있습니다. 지금 피고인은 계단도 오르지 못하는 절망적인 건강 상태입니다. 그렇지만 택시 면허가 취소되지 않는다면, 피고인이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해서 건강해지면, 언젠가는 다시 택시 운전을 할 수 있다는 희망만은 가지고 살 수 있겠지요.”
그날 뺑소니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피고인과 변호인의 ‘강력한 초라함’ 때문은 아니다. 차량 블랙박스를 비롯해 다른 증거에서 피고인이 사고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피고인은 자신으로 인해 오토바이 사고 피해자가 상해를 입은 것은 다투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상 과실치상은 벌금 500만 원으로 하되 벌금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그녀의 운전면허는 취소되지 않았고, 이미 냈던 벌금도 돌려 받았다.
재판이 끝나고 피고인을 부축해서 법정 밖으로 나오니, 피고인의 아들이 불안한 눈빛으로 우리를 살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피고인은 아들을 안고 소리 없이 울었다. 아들은 자신보다 작아진 엄마의 등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그녀가 심부전이 올 수 있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종일 법정에 앉아 있었던 힘은, 아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악착같은 마음에서 나온 것일 테다.
그날 선고를 마지막으로 그녀와 나의 시절인연은 다 했다. 그 후 4년 반 동안 서로 만난 적 없다. 그 사이 나는 다른 도시로 근무지를 옮기고 이사도 했다.

2024년 1월 어느 날, 나는 어느 조직의 징계위원회 위원으로 참석하기 위해 과거에 일했던 도시로 갔다. 회의를 마치고 전철역으로 가기 위해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택시는 금방 배차됐다. ‘도착까지 2분’이라는 문구와 함께 기사의 이름과 얼굴이 스마트폰 화면에 떴다. 여성이었다.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그 이름이었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뛰고 저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도 올라왔다. 도착한 택시 뒷좌석에 말없이 올랐다. 오래전 나의 피고인이었던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선생님….”
운전석에서 고개를 돌린 그녀는 나를 보더니 손으로 입을 틀어 막았다.
“변호사님, 정말 생각 많이 했어요….”
그녀는 악착같은 마음으로 운동하고 식단을 조절해 건강을 회복했다고 했다.
“변호사님 댁이 어디세요?”
아무리 거절을 해도 그녀는 “변호사님이 저를 살려주셨는데, 제가 이것도 못 해주나요?”라며 운전대를 전철역이 아닌 우리 집 방향으로 돌렸다. 길을 달리면서 그녀는 그동안 어떤 노력을 하며 살았는지 들려줬다.
“변호사님 저 정말 열심히 살았아요. 저는 이렇게 개인택시를 샀고, 일용직 노동을 하던 아들은 소방관이 됐어요….”
그녀는 “아들은 공무원이 되고 자신은 정년 없이 일할 수 있으니 더는 부러울 게 없다”고 말했다. 집 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리기 전 그녀는 내 손을 잡고 “건강하게 살다가 또 이렇게 기사와 승객으로 만나자”고 말했다. 나는 “다음에 만나면 꼭 택시비 받으시라”을 말을 남기고 그녀와 헤어졌다.
국선전담변호사로서 사건으로 만나는 피고인들은 대부분 “나중에 꼭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로 찾아온 사람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다. 국선전담변호사와 피고인의 인연은 재판 종료와 함께 끝난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다시 만난다면, 그가 또 형사재판을 받는 경우일 테니 말이다.
이런저런 죄를 지었거나 연루됐지만 돈으로 변호사를 살 수 없는 ‘나의 친애하는 피고인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아프고, 의지할 만한 가족이 없다. 이들은 출소하기 전에는 자유만 찾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처럼 약속하지만, 막상 밖에 나오면 구속되기 전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곤 한다.
법정이나 수감시설이 아닌 곳에서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난 피고인은 택시를 운전하는 그녀가 유일하다. 국선전담변호사로 10년 일하며 피고인 수천 명 만난 걸 고려하면 슬픈 일이다. 그들은 찾아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몬스테라 작가의 책 <국선변호인이 만난 사람들>에도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이후 이야기를 더해 새로 쓴 글입니다.)
몬스테라 작가 monstera0930@kaka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