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구제역 바이러스가 퍼졌다. 축산업 관계자들만 알던 바이러스 이름을 전 국민이 알게 됐다. 정부는 감염동물이 있는 농장을 비롯해 인근 5km 농장에 있는 가축까지 ‘예방적’으로 빠르게 살처분했다.

당시 구제역으로 죽은 가축의 수는 350만 마리. 소와 돼지가 산 채로 땅에 묻히고, 전 국민은 실시간으로 그 장면을 봐야 했다. 살아 있는 동물이 굴삭기에 찍히는 모습. 그리고 동물들의 비명. 살처분이란 재난은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살처분을 목격‘당해야’ 했던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채널을 돌렸다. 그런다고 화면에 비친 동물들의 눈빛과 울음소리가 완전히 잊히지는 않았지만, 끔찍한 장면으로부터 당장 도망칠 수는 있었다.

도망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와 돼지들이 지르는 비명이 귀 옆에서 찢어질 듯 울리고, 동물들이 피를 흘리는 곳으로 가까이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

당시 구제역으로 죽은 가축 수는 350만 마리. 살처분이란 재난은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pixabay

다시는, 그 뒤로 다시는 안 했다고 입을 뗐다. 수의사 최은호(가명) 씨는 후배의 부탁으로 2010년 4월 강화도 살처분 현장에 처음 갔다. 일손이 부족하다는 말에, 또 일당이 30만 원이라는 말에 ‘용돈이나 벌자’ 싶었다. 주사만 놓으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현장에는 해병대와 공병대 군인들, 공무원들과 공익근무요원들이 미리 와 있었다. 분위기는 싸늘했다. 농장주는 속이 상해 ‘알아서 하라’며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다들 방역복만 하나 입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땅을 어디에 얼마나 팔지, 어떻게 소를 잡을지 이야기하는데, 매뉴얼만 보고 일하는 공무원들도 우왕좌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의사가 하는 일은 소에게 주사를 놓는 일이었다. 500kg쯤 되는 소는 주사를 맞지 않으려고 날뛰었고, 수의사와 보조만으로는 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농장주를 어르고 달래 현장으로 데려왔고, 그제야 소를 밧줄에 묶고 주사를 놓을 수 있었다.

살처분에 쓰이는 주사는 석시콜린(succicholine). 근육을 마비시켜 통증에 반응하지 못하도록 하는 근이완제다. 동물 안락사 약품으로 알려졌지만, 해외 동물단체에서는 이 약물에 의한 죽임을 ‘비인도적 안락사’로 규정할 정도로 고통이 심하다.

주사를 놓는 것 자체가 트라우마라 할 만큼 괴로웠다.

“횡격막이 움직이면서 호흡을 하잖아요. 이 자체가 마비되는 거예요. 정신은 멀쩡한데 소리도 못 지르는 거죠. 결국 질식사하는 거고요, 주사를 놓으면 바로 마비되긴 하는데, 소가 이렇게 쳐다보고 울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거든요. 괴로워서 그런 거겠죠. 숨이 안 쉬어지니까. 이게 엄청난 트라우마입니다.”

주사를 놓고 나면 낫으로 소의 배를 찍어 구멍을 낸다. 반추동물의 위장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는 아직 살아 있다. 그러나 소가 죽을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 ‘빨리 빨리’ 하는 소리만 들렸다.

공병대가 소뿔에 묶은 줄을 굴삭기로 들어올려, 깊게 파놓은 구덩이에 옮긴 뒤 생석회를 뿌린다. 뿔이 줄에서 종종 빠지며 소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몸에서는 계속 피가 흐른다. 소를 집어들어 구덩이에 넣고 나면, 또 다시 울고 있는 소를 구덩이에 넣어야 한다. 모든 소를 묻을 때까지 반복한다.

살처분이 막 끝난 매몰지. 주변에 생석회를 뿌려놨다. ⓒ정윤영

하루 동안 여섯 개 농장을 돌아다니며 같은 일을 했다. 소 130여 마리에게 주사를 놓았고, 그들과 눈을 마주쳤다. 최은호뿐 아니라 다른 현장의 수의사들도 ‘무분별한 살처분’이었고 무자비한 현장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빨리 빨리 죽이라고 쪼아대는’ 통에 일하는 모두가 무감각해졌다. 구덩이만 파는 줄 알았던 중장비 기사는 굴삭기 삽으로 동물을 찍어내야 했다. 동물들이 구덩이 위로 기어 올라오면 다시 쑤셔넣었고, 사람들은 그걸 지켜봐야 했다.

십 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다며, 최은호는 한 농장주 얘기를 꺼냈다.

“마지막 집에 갔더니 소가 두 마리예요. 송아지가 엄마 젖을 빨고 있더라고요. 뭐, 어떡해요. 한 마리씩 다 잡았죠.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오시더라고요. 혼자 사시는 분인데, 막걸리 한 사발 하고 가라는데…. 소가 할아버지한테는 전 재산이고 가족이잖아요.

막걸리를 마시지 못하고 도망치듯 농장에서 빠져 나왔다. 농장주가 주는 잔을 받으면 울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하루를 끝으로 최은호는 다시는 살처분 현장에 가지 않았다.

가끔 뉴스로 살처분 소식을 들었고, 한참 지나 대학 선배가 아프리카돼지열병(ASF) 살처분 업무에 시달리다 과로사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겪은 현장이 떠올랐고,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곤 했다. 그날의 일들은 하나도 잊히지 않고 괴로움으로 남아 있었다.

국가가 명령하니까, 그래야 질병이 번지지 않는다니까 하라는 대로 했지만, 이렇게 ‘싹‘ 잡는 게 맞나’ 싶었다. ‘그냥 제일 편한 방법’을 쓰는 것 같았다. 최은호는 무분별한 살처분은 ‘결국 돈 때문’이라고 못 박았다.

“정부든 농장이든 소나 돼지를 생명으로 봤다면 그런 판단을 쉽게 내리지 않을 거예요. 생산성이 중요한 거고 ‘구제역 청정국’ (타이틀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니까. 생명에 대한 존중이나 이런 것 가지고는 그 일을 못할 거예요, 아마.”

그 ‘못 할 일’을 누군가 하고 있다.

“살처분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한데, ‘소 죽인 것 가지고 뭘 그러냐’ 할 게 아니라 치유의 과정이 충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거기 공감을 해야 한다는 거죠.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야 하고요.”

돼지 살처분 현장.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스 주입을 위해 구덩이 위에 비닐을 씌우고 있다. ⓒ동물해방물결 제공

여전히 일이 터지면 편한 방법으로, 쉬운 사람들의 손을 빌어 임시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쉬운 사람들만 여기에서 저기로 바뀌어갔다.

임한국 지부장(전국공무원노동조합 상주시지부)이 처음 살처분 현장에 투입된 것은 2011년 1월이었다. 살처분조였던 임한국은 예방주사도 맞지 않고 현장으로 들어간 것으로 기억한다.

한우 농가였다. 수의사 한 명과 굴삭기 기사 한 명, 공무원 30명 정도가 살처분 현장에 모였으나,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매뉴얼이라고 책자는 있는데’ 살처분을 주도할 사람은 없었다.

“외부랑 단절된 상태로 현장에 갇혀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살처분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고 뭐부터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그러다 이제… 포클레인으로 구덩이를 다 파놨더라고요. 몇 명이 앞장섰죠.”

소를 묻을 차례다. 한 마리씩 무게를 잰다. 소의 무게가 보상금이 되기 때문에 농장주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소의 다리를 밧줄에 묶은 뒤 굴삭기로 들어올린다. 저울에 올려 무게를 잰 뒤 비닐을 씌운 깊은 구덩이로 위치를 옮기면 낫으로 밧줄을 끊는다.

소는 수의사가 놓은 주사에 마비된 상태다. 긴 장대에 달린 낫으로 밧줄을 끊으면 소가 구덩이 안으로 떨어진다.

가끔 임신한 소들이 있었다. 배 속 송아지들도 보상금이 되므로, 소의 배를 갈라 송아지 한 마리씩 무게를 잰다. ‘그런 것 때문에 트라우마가 많이 생긴다’던 그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이게… 방역복은 입었지만 피가 얼굴에 막 튈 정도로…. 배는 다 갈라놨죠, 무거운 소를 위에서 계속 떨어뜨리니까…. 그런데 이걸 다 해야 집에 가는 거예요.”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구덩이에 묻은 소는 140마리였다. 매몰이 끝나면 구덩이 안에 생긴 가스가 빠질 수 있도록 배관을 설치해야 한다. 그러려면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구덩이에는 죽은 소와 아직 살아 있는 소들이 쌓여 있었고 소들의 피가 뒤엉켜 있었다.

책임져야 하니까, 끝내야 하니까, 그래야 집에 갈 수 있으니까 했을 뿐 ‘이런 건지 아무도’ 몰랐다. 매뉴얼에 적힌 대로 모두 끝나고 나서야 입고 있던 옷과 신발을 모두 불에 태웠다. 지급된 체육복과 운동화로 갈아입고 갈아신은 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집으로 왔지만, 마음은 구덩이 안에서 나오지 못했다. 소에 계속 쫓겨 다녔다. 소의 눈이 잊히지 않았다. 새끼가 버둥거리는 모습과 덩치가 커다란 소가 덤비는 모습도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살처분이 모두 끝난 돈사. 남아 있는 돼지는 없지만 여전히 환풍기는 돌아가고 있었다. ⓒ정윤영

살처분되는 소에게도, 일하러온 사람에게도 ‘너무 끔찍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할 일인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문가가 아니라 조심스럽다면서도 그는 말을 이었다.

“몇 마리가 (감염) 증상을 보였다고 그 농장에 있는 소를 전부 (예방적으로) 살처분한다는 게, 너무 과하지 않은가 생각했어요. 병에 걸린 소만 처리를 하고 나머지는 격리시켜서 지켜보고 해도 되지 않았나….”

<더티 워크>(2023)의 저자 이얼 프레스는 ‘도덕적 신념을 위배하는 행위를 스스로 행하거나 막지 못하거나 목격하는 일’을 도덕적 외상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관계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산업재해’로 설명한다.

공무원들이 겪는 트라우마도 마찬가지였다. 노조는 트라우마 치료를 지자체에 요청했지만, 치료라고 할 만한 것은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임신 중이거나 지병이 있는 직원만이라도 살처분 작업에서 제외해달라고 강하게 요구했고, 그것만 받아들여졌다.

구제역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운영백서에 따르면, 권역별로 정신겅간지원팀을 구성해 구제역 피해자와 가족, 살처분이나 매몰작업 참여자에게 심리안정 서비스를 지원하도록 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이후 국가트라우마센터와 공무원을 위한 마음건강센터가 생기긴 했지만, 상담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임한국은 기억한다.

☞ 다음 이야기 <트라우마에서 과로사로… ‘죽이는 일’이 남긴 악몽>으로 이어집니다.

정윤영 르포작가 freak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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