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은 ‘겨울방학’을 보내고 있었다. 대장암 4기 엄마는 항암치료를, 중학교에 다니는 딸은 학기 수업을 잠시 쉬고 있었다. 기자는 지난 17일 경기 화성시에 있는 모녀의 집을 찾았다.
“오는 길이 멀진 않으셨어요?”
엄마 유하나(47세) 씨는 석 달 만에 만난 기자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의 딸 민지유(가명, 16세)는 자폐스펙트럼 장애와 지적장애를 진단받았다.

엄마 하나 씨는 반도체 노동자였다. 그는 자녀의 선천적 장애의 원인을 회사에서 찾고 있다. 업무상 유해환경에 의해 자녀가 아픈 ‘태아산재’를 의심하고 있는 거다.
집에 들어서자 하나 씨의 일상이 눈앞에 그려졌다. 벽과 바닥 곳곳에는 지유가 그린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방바닥엔 지유가 핀셋으로 옮겨 붙인 스티커가 열을 맞춰 붙어 있었다.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 만한 장난감도 거실 한쪽에 놓여 있었다.
지유는 방 안에 앉아 휴대전화로 ‘코코몽’ 동요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오른손을 활짝 펼쳐 기자에게 흔들어 보이면서도, 눈은 여전히 코코몽 영상을 향해 있었다. 기자가 카메라를 들자, 얼굴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브이… 브이… 찰칵… 찰칵….”

지유 방 곳곳엔 직접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아이가 그린 자화상이 집을 환하게 밝혔다. 지유의 얼굴 뒤로 노란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는 그림이었다. 엄마 하나 씨와 함께 있는 그림도 벽에 걸려 있었다.
엄마 하나 씨는 지난해 11월 11일 근로복지공단에 ‘태아산재’를 신청했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보상법)은 임신 중 업무상 유해환경에 의해 태어난 자녀에게 발생한 선천성 건강질환에 대한 산재보상을 보장하고 있다. 일명 ‘태아산재법’이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만인 지난해 12월 11일. 근로복지공단은 하나 씨가 신청한 태아산재에 대해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태아산재 신청 기한인 ‘1년’을 놓쳤다는 게 이유다. 태아산재법은 개정 당시 소급적용을 한시적으로 인정했다. 법 시행일(2023년 1월 12일) 1년 전인 2022년부터 1월 11일부터 2023년 1월 11일까지, ‘1년’ 사이에 신청한 경우에만 소급 적용할 수 있게 단서를 달아놨다.

하지만 하나 씨가 딸 지유의 태아산재를 의심하기 시작했을 당시(2023년)엔, 이미 소급적용 기한이 지나 있었다.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결정에 하나 씨의 아쉬움은 크다. 대장암 투병 중인 엄마가 아픈 몸을 이끌고 추진했던 일이니까.
“태아산재 신청하기에 앞서도 고민이 되게 많았어요. 과연 ‘내가 의심한 게 맞을까’ 이런 고민 끝에 했으니까요. (아이가 아픈 원인을) 밝히고 싶었죠.
막상 (태아산재 신청서를) 제출하고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근로복지공단에서 역학조사도 안 해보고 원인도 밝히지 않고 불승인 처리를 했잖아요. 마치 폐기처분처럼. 서류 사이에 끼여서 누락된 것처럼 말이죠. 원인도 안 밝혀보고, 아무것도 아닌 휴지조각처럼 이렇게 (불승인) 처리해버릴 수 있나… 처참하더라고요.”

유하나 씨는 1997년 삼성 반도체 기흥사업장에 입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스무 살. 약 19년을 일하고 2016년 명예퇴직했다.(관련기사 : <엄마는 암, 아이는 자폐… 희망은 소급될 수 없나요>)
하나 씨는 2009년 지유를 임신했다. 당시 LED 생산라인의 ‘EDS 공정’에서 일했다. ‘EDS 공정’은 공정이 완료된 웨이퍼를 테스트해서 불량을 선별하는 과정이다. 해당 공정에선 설비 세척 용도로 유해화학물질(에틸렌글리콜)을 사용한다.
에틸렌글리콜은 현행 산재보상법 시행령상 ‘건강손상자녀 관련 유해인자’에 포함된 물질이다. 실제 노동자가 유해화학물질에 노출될 수 있다는 역학조사 결과도 있다.(반도체 노동자 김○○ 산재 역학조사 보고서, 2016년)
하나 씨는 회사에서 나눠준 임부용 방진복을 입고, 출산 30일 전까지 일했다. 육아휴직도 90일만 썼다.
“저도 회사를 계속 다녔으면 이렇게 용기 내지는 않았을 거예요.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산재 신청을) 해보니까, ‘내가 충성하면서 열심히 일을 했었구나’ 생각이 들어요. 당시엔 회사에 애사심이 있다고 생각을 안 하고 일을 했거든요. 주어진 일에 성실히 책임을 다한 건데, 이런 게 애사심인지 몰랐어요.
하루에 12시간 이상 16시간까지 근무한 적도 있고, 휴무 중에 하루 정도는 근무 아닌 것처럼 나와서 일하고… (왜 이렇게까지 일을 하냐면) 매일같이 (업무를) 안 보면 (일이) 너무 밀리니까요.”

사실 ‘태아산재’는 이미 판례상으로 인정된 산업재해다. 대법원은 2020년 태아산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심지어 당시는 ‘태아산재법’조차 없던 시기.
2012년 선천성 심장질환아를 낳은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은 근로복지공단에 자녀의 질환에 대한 산업재해를 신청했다. 공단이 보상을 인정하지 않자, 엄마들은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약 6년간의 법적 다툼 끝에 2020년, 대법원은 엄마들의 손을 들어줬다. 엄마 배 속 태아는 ‘엄마와 한 몸’이라는 논리. 대법원은 “태아는 엄마의 업무 환경상 위험성을 함께 공유한다”고 봤다.

그로부터 약 2년이 흐른 2021년 12월에야 ‘태아산재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개정법은 적용 대상을 한정하는 조건을 달았다. 태아산재 법안이 시행된 ‘2023년 1월 12일 이후 태어난 아이들에게만’ 적용된다. 그리고 법 시행일 1년 전에 태아산재를 신청한 경우에만 적용되도록 한정했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법이 하나 씨 모녀와 같은 사례를 가로막았다. 뒤늦게 태아산재 가능성을 인지한 경우에는 아예 산재 신청조차 못 하는 것.
이 때문에 법안도 발의됐다. 이용우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인천 서구을)은 지난해 10월 태아산재 피해자의 소급적용 인정기한을 법 개정 시행일로부터 3년 이후까지 연장하는 내용의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엄마 하나 씨 역시 포기하지 않을 예정이다.
“삼성에서 나는 하나의 도구로 쓰인 것밖에 안 되는 느낌을 받아서 참담해요. 작은 목소리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들어주는 사람이 없구나’, ‘누구 하나 죽어야지만 들여다보는구나’ 싶죠….
지난해 12.3 계엄 이후에 굉장히 혼란스러웠을 때 근로복지공단이 (불승인) 결정을 내려버렸거든요. 이 틈을 타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는 눈치랄까.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다, 제풀에 꺾이면 안 되겠다, 한 번 더 저 문을 또 두들겨봐야겠다.’ 했어요. 한 번 더 심사청구를 해서 역학조사라도 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면 좋겠어요.”
시민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이하 반올림) 소속 조승규 노무사는 지난 6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결정에 대해 3월 중으로 심사청구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근로복지공단은 (내란 사태 이후) 현재 어떤 법 개정도 진행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일단 조사 및 판정 등 산재절차를 밟으면서 기다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책임한 불승인 통보로 피해자들을 법적 절차로 내몰았습니다.”(2024. 12. 26. 반도체 노동자 자녀 산재 불승인 규탄 기자회견 중 조승규 노무사 발언)

오후 3시, 모녀는 지유의 언어치료를 위해 복지관으로 향했다. 방학에도 지유는 학기 중과 똑같은 일정으로 치료를 받는다. 주 5일 중 2일은 언어치료를, 남은 3일은 음악과 인지 수업을 받는다.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운동과 요리 수업을 받을 때도 있다.
이들은 복지관에 도착하자마자, 인근 편의점부터 갔다. 지유는 최애 간식인 초콜릿을 집었다. 이날은 특별히 초코 아이스크림도 샀다. 지유는 복지관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먹은 후 언어 치료실로 들어갔다.
엄마 하나 씨는 나날이 자라는 지유를 볼수록 고민이 깊어진다.
“아무래도 제 건강에 대한 게 가장 큰 고민이죠. 지금 정도로 현상유지만 돼도 지유하고 이렇게 치료실 다닐 수 있을 텐데.
또 한 가지는 그림이나 운동처럼 지유가 좋아하는 분야를 빨리 찾아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혼자서 스스로 해나갈 수 있게끔 가르쳐주고 싶어요. 계속 지원해주고 싶은 거죠. 그렇게 되려면 저 또한 아프면 안 되니까, 그게 제일 큰 고민이고 숙제예요.”

엄마 하나 씨는 지난해 11월 본인의 질병도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로 신청했다. 엄마는 대장암, 아이는 자폐. 업무상 유해환경에 의해 모녀가 둘 다 아픈 ‘이중산재’를 인정받고자 한다. 공단은 하나 씨의 산재 신청에 대해선 아직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오후 4시경, 지유가 언어치료실 문을 열고 나왔다. 지유는 집으로 가자고 엄마를 보챘다. 딸의 재촉에 엄마 하나 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지유는 엄마를 앞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엄마 하나 씨는 그런 지유만 바라보며 차가운 겨울날을 걸었다.
모녀에게 하루빨리 따뜻한 봄날이 오기를.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