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해한 지 15년 만에 체포된 남자는 경찰과 함께 현장 검증 중이었다. 모자를 눌러쓴 탓에 남자의 얼굴은 TV 뉴스 화면에선 보이지 않았지만, 핏줄이 당기는 것처럼 어떤 직감이 들었다.

‘저건 내 사건이다. 왠지 저 남자를 내가 변호할 것 같다.’

예감은 적중했다. 며칠 뒤 사무실 책상 위에 ‘강도살인’ 죄명이 적힌 사건기록이 올라왔다. 나에게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직업적 특성에 따른 예측일 뿐이다.

당시 나는 모 지방법원의 국선전담변호사로서 형사합의부 사건을 담당했다. 판사 3명으로 구성된 형사합의부는 살인, 강도, 강간 등 형이 무거운 강력범죄 사건들을 재판한다.

살인은 대개 사선 변호인을 선임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저지른다. 국선전담변호인은 변론할 사건을 임의로 선택할 수 없다. 재판부가 정해준다. 결국 형사합의부 재판부 소속 국선전담변호인은 살인사건을 만나게 돼 있다.

그렇다고 전국의 모든 살인사건과 내가 연결되는 건 아니다. 내가 전속된 법원 관할 지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만 담당할 수 있다. 뉴스에서 살인사건 보도가 나오면 발생 지역부터 살피는 습관이 생긴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태완이법 시행으로 살인죄 공소시효가 사라진 뒤 15년 만에 체포된 ‘의대 교수 부인 살인사건’의 진범 ⓒ경찰 제공 화면 캡처

뉴스 속 남자가 저지른, 장기미제를 넘어 ‘영원히 처벌 불가’로 남을 뻔했던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2001년 어느 날, 그는 과거 교도소 동기와 함께 모 지역 전원주택에 침입해 의대 교수였던 피해자 부부를 칼로 찔렀다. 아내는 사망하고 남편인 교수는 중상을 입었다.

범인 일당은 사건 직후 달아났다. 사라진 금품이 없어 경찰은 청부살인이나 원한에 의한 살인 쪽으로 수사했다. 하지만 범인을 추정할 단서는 없었고, 이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당시 살인사건이 일어난 동네에서 통화기록을 남긴 나의 피고인 일당도 수사를 받았지만 이들은 허위 알리바이를 대고 풀려났다.

그 후로 15년간 체포되지 않았으니, 나의 피고인은 행운이라 생각했을 터다. 하지만 다른 사건이 피고인의 운명을 바꿔놓고 말았다. ‘대구 황산테러 사건’이 그것이다.

1999년 5월 20일, 대구광역시의 어느 골목에서 여섯 살 태완이가 학원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을 때 누군가 다가와 황산을 뿌렸다. 태완이의 두 눈과 입 안, 식도와 장기는 황산으로 탔다. 몸의 상당부분이 3도 화상을 입어 몸은 까맣게 변해갔다. 의사는 생존확률이 매우 낮다고 했지만 태완이는 황산테러를 당한 지 5일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여섯 살 태완이는 엄마에게 자신을 그렇게 만든 아저씨를 혼내달라고 말했다. 엄마는 태완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이의 말을 녹음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입 안과 식도가 타버린 탓에 어눌해진 태완이의 말을 기록하며 범인을 찾으려고 몸부림치던 어느 날 태완이는 숨을 거뒀다. 황산테러 발생 49일 만이었다.

1999년 대구 황산테러 사건 초기 보도 제목들 ⓒ셜록

전문가들이 태완이가 남긴 녹음을 분석하면서 경찰의 초기 수사에서 허점을 발견했다. 태완이는 어떤 아저씨가 비닐봉지에 든 ‘뜨거운 물’을 자신에게 뿌렸다고 했는데, 수사팀은 비닐봉지에 황산을 담으면 녹을 것이라며 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실험 결과, 시중에서 쓰이는 검은 비닐봉지의 주성분인 저밀도 폴리에틸렌은 황산에 반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태완이는 사건이 일어난 골목에서 이웃 아저씨를 보았고 목소리도 들었다고 했다. 경찰은 이웃들에게 별다른 혐의점을 못 찾고 사건을 종결했다. 공소시효 만료를 며칠 앞두고 태완이 부모는 공소시효를 멈추기 위해 이웃인 한 남성을 살인 혐의로 고소하는 등 여러 노력을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끝내 공소시효는 지나고 말았다.

태완이 부모의 오랜 노력으로 살인 등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일명 ‘태완이법’이다. 법 시행일 기준으로 아직 공소시효가 만료되지 않은 범죄에 대해서도 소급적용이 가능하도록 했는데, 2000년 8월 1일 이후 발생한 살인죄에 대해 공소시효가 사라졌다.

다시 내 사건으로 돌아가자. 나의 피고인이 전원주택에 침입해 피해자 부부를 칼로 찌른 때는 2001년이었다. 당시 막내급이었던 형사는 태완이법이 시행된 2015년엔 노련한 수사관이 돼 있었다. 그는 장기미제로 남은 ‘의대 교수 부인 살인사건’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담당형사는 장기미제로 남은 ‘의대 교수 부인 살인사건’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pixabay

형사는 사건 당시의 수사 대상자를 확인하던 중 현재 다른 범죄로 교도소에 있던 나의 피고인과 면담했다. 이 과정에서 형사는 피고인의 진술이 과거 경찰에서 했던 말과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사건 현장 주변에서 공범과 통화한 기록을 남겼던 나의 피고인은 2001년 그때 경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제가 휴대전화 판매점에서 일하는데, 고객이랑 통화한 겁니다.”

하지만 그는 15년이 지난 2016년 면담에서 “통화한 사람을 모른다”는 취지로 말했다. 형사는 피고인과 통화했던 상대방이, 오래전 피고인과 같은 교도소에서 수감됐던 ‘감방동기’라는 걸 알아냈다.

경찰이 출석요구서를 보내자 공범이었던 ‘감방동기’는 아내에게 “15년 전 남의 집에 들어가 흉기로 사람을 찔렀다”고 말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나의 피고인은 의대 교수 부인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기소됐다.

재판을 앞두고 피고인은 이런 취지의 주장을 했다.

“감방 동기와 함께 식칼을 들고 전원주택에 들어가 칼을 휘두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고의로 찌른 게 아닙니다. 빈집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사람의 비명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칼을 휘둘렀을 뿐입니다.”

고의에 의한 강도살인이 아닌 강도치사를 주장한 것이다. ‘강도살인’이라면 태완이법으로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아 피고인은 중한 처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강도치사’는 과실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므로 태완이법 적용을 받지 않았다.

후자의 주장이 인정되면 ‘면소’ 판결, 즉 나의 피고인은 공소시효 도과로 처벌을 피하게 된다. 그를 변론하게 된 나의 딜레마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앞서 말한 대로, 국선전담변호인은 임의로 사건을 선택할 수 없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배정된 사건에서 사임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변호인은 피고인과 다른 의견을 낼 수 없다.

나는 피고인의 주장에 따라 강도치사 취지로 변론하며 재판부에 면소를 구했다. 이 사건은 태완이법 적용으로 기소된 최초 사례여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받았다. 기사도 쏟아졌는데, 피고인을 변호하는 나에 대한 악플도 이어졌다.

이 사건은 태완이법 적용으로 기소된 최초 사례였다 ⓒ셜록

재판의 쟁점은 ‘살인의 고의 여부’였다. 끔찍한 사건의 생존자이자 피해자인 의대 교수를 증인으로 불러 신문해야만 했다. 자연인인 한 개인으로 따지면, 나는 정말이지 그를 신문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피고인의 변호인이었다.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건 변호사의 핵심 의무 중 하나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 감정은 사건 변론에서 큰 의미가 없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일. 이제는 70대 노인이 된 피해자가 사건 발생 16년 만에 형사합의부 법정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나의 피고인은 당시 다른 사건으로 법원에서 꽤 먼 거리의 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는데, 차가 밀렸는지 증인보다 법원에 늦게 도착했다. 그 탓에 피고인은 유치감이 아닌 뒷문을 통해 바로 법정으로 들어왔다. 이럴 경우, 피고인은 증인석을 지나칠 수밖에 없다.

증인석의 피해자는 피고인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물끄러미 피고인을 바라봤다. 아내를 죽이고 자신에게 중상을 입힌 사람을 16년 만에 마주한 피해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증인 신문이 더욱 내키지 않았다. 재판장이 피해자에게 물었다.

“사건 당시 왜 119에 신고하지 않으셨나요?”

의사인 피해자는 오랜 기간 미국의 병원에서 공부하고 근무하기도 했다. 그가 답했다.

“너무 충격적이고 당황해서 계속 911을 눌렀습니다.”

그의 부인은 흉기에 찔려 과다출혈로 숨졌다. 의사인 그도 심각한 중상을 입은 상태여서 아내를 구하기 어려웠다. 증인석에 앉은 그는 사건 이후 16년간 겪은 충격과 상처,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쓸쓸함을 풀어냈다. 그를 신문하는 게 더욱 힘들었다.

70대 노인이 된 피해자는 증인석에 앉아 사건 이후 16년간 겪은 충격과 상처를 풀어냈다 ⓒpixabay

재판부는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의 피고인은 강도살인 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태완이법 적용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최초의 사건이다. 

피고인이 범죄를 저지른 직후 검거됐다면, 아마 그는 지금쯤 출소해 자유의 몸으로 살고 있을 터다. 당시에는 살인죄의 형량도 그렇게 높지 않았으니 말이다. 15년 공소시효 만료일이 다가오도록 체포되지 않던 피고인은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때 바로 검거되지 않은 것이 그의 최대 불운이 되고 말았다.

이번 글을 쓰면서 나는 정혜진 변호사가 쓴 책 <이름이 법이 될 때>를 다시 펼쳐봤다. 정 변호사는 기자 출신으로, 이름이 법이 된 사건들을 직접 취재하고 유족 등 관련 사람들을 인터뷰해 책을 썼다. 여기에는 태완이법에 대해서도 나오는데 책을 읽다가 울고 말았다.

태완이는 시력을 완전히 잃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에서도 당시 유행한 텔레비전 만화영화 ‘지구용사 선가드’의 주제곡을 불렀다고 한다.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엄마가 아들을 토닥이며 말한다.

“우리 태완이 참 잘하네.”

태완이가 불렀다는 ‘지구용사 선가드’의 가사를 찾아봤다.

‘무지개 다리 놓고 가고 싶어도/ 지금은 갈 수 없는 저 먼 우주는/ 아름답고 신비한 별들의 고향…’

나는 어느 크리스마스에 태완이가 좋아했던 ‘지구용사 선가드’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을 태완이에게 줄 순 없어도,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렸다.

태완이가 좋아했다는 ‘지구용사 선가드’를 그려봤다 ⓒ몬스테라

국선 변호를 하다보면 무서운 피고인은 물론 애처로운 피고인도 만난다. 또한, 내가 변론하는 피고인에게 큰 피해를 겪은 탓에 변호사인 나에게까지 분노를 표하는 피해자도 만난다.

이런 만남 중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애처로운 피해자를 만났을 때다. 피고인은 내가 도와줄 수 있지만, 피해자에게는 대부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의 의뢰인이 사건 발생 16년 만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직후, 나는 이제는 노인이 된 ‘내 사건의 피해자’가 부디 남은 생을 평온하고 건강하게 지내길 마음 깊이 기도했다. 안타깝고 애처로운 피해자, 제2의 태완이가 다시는 나오지 않길 바란다.

몬스테라 작가 monstera0930@kaka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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