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살기 위해 일터로 향하지만, 과연 그곳은 안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해 9월 MBC 기상캐스터 고(故) 오요안나 씨의 죽음을 계기로 ‘직장 내 괴롭힘’이 사회적 문제로 다시 한번 대두됐다. 뉴스를 보며 남 일처럼 여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듯하다.

김호세아(35) 씨도 그중 하나다. 그에게도 매일 ‘지옥’으로 출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제가 살고 싶어서 사직서를 냈어요.”

그는 5년 전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퇴사했다. 생존을 위한 탈출이었다.

셜록은 지난달 20일 김호세아 씨와 만났다 ⓒ셜록

괴롭힘의 시작은 2019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씨가 근무하던 장애인복지시설에 A가 팀장으로 입사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한 달 뒤부터 시작됐다. A는 폭언과 질책을 반복했다. 길게는 50분간 이어지기도 했다. 김 씨는 스트레스와 불면증을 호소하며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다.

괴롭힘에 못 이겨 신고도 했다. 2020년 4월 ‘직장 내 괴롭힘 신고서’를 회사에 제출했다. 복지관 내부 자체조사였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보기 어렵다’는 결과를 받았다. 김 씨는 결국 회사를 나왔다.

반전은 석 달 뒤 노동청 조사에 있었다. 2020년 7월 서울지방노동청 서울서부지청(이하 ‘노동청’) 직장내괴롭힘 판단 실무위원 3인 모두, A의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판단했다.

“업무상 발생하는 지시, 독려 등으로 필요성이 인정된다고 하나, 상당한 장시간, 자주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것은 사회통념상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판단됨.”(서울지방고용노동청서울서부지청 의견서 일부)

김 씨는 처음으로 ‘피해자’임을 인정받았다. 피해 회복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갔다. 2022년 12월 A와 복지관 재단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나섰다.

“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싶었어요. 직장 내 괴롭힘 때문에 개인의 존엄성이 훼손됐는데, 소송을 통해 훼손된 존엄을 되찾고 싶더라고요.

“저한테 중요했던 출발점은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로서 인정받는 거였어요. 피해를 회복하는 과정인 거죠.” ⓒpixabay

고용노동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니 법원의 인정을 받기도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를 판례로 남겨놓으면, 자신처럼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다른 노동자들도 도움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시작한 소송이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반전. 재판부는 노동청의 판단을 완전히 뒤엎었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지난해 6월, 1심 선고를 내렸다. 청구 기각. 그의 완패였다.

법원이 인정하지 않은 그날의 상황은 이러하다. 이날은 ‘청소’가 화근이었다. 김 씨는 청소를 도맡아 하겠다고 연락했고, A는 “‘평소답게’ 행동하라”고 질책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50분간 이어졌다.

“너 내가 호구로 보여, 그냥? 내가 호구로 보이니?”

“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내가 미친◯이어가지고 성격이 지랄맞아가지고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2020년 3월 13일 녹음 일부)

김호세아 씨는 “고치겠다”, “죄송하다”,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A는 “죄송하다는 말 듣고 싶은 생각도 없고, 진심으로 들리지도 않는다”며 말을 이어갔다.

재판부는 두 사람의 대화에 “A가 평소에 쌓였던 불만사항을 얘기하거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며,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적정한 범위를 넘어서 원고에게 폭언, 질책 등을 하였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판결문 인용).

“노동청 판정이 나왔기 때문에 소송에서도 이길 거라고 생각했죠” ⓒpixabay

‘직장갑질119’ 김세정 노무사(노무법인 돌꽃)은 판결에 아쉬움을 표했다. 김 노무사는 “(괴롭힘) 행위가 사무실에서 이루어졌고, 사무실 청소와 관련된 업무로 인한 발화인 점 등을 참작하면, 포괄적으로 업무 관련성이 있다고 볼 만하다”는 것.

김 노무사는 “업무 관련성이 인정되는지 여부는 쌍방 당사자 관계, 행위가 행해진 장소 및 상황, 행위의 내용 및 정도 등의 구체적 사정을 참작하여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2006년 12월 판결, 2005두13414)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어 “괴롭힘 판단에 있어서 행위자의 의도는 고려사항이 아닌데, (판결문상에) ‘A가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는 상태’, ‘어떠한 악의적 의도나 감정’과 같은 표현을 한 점은 아쉽다”고 덧붙였다.

사회복지종사자 권익지원센터(이하 ‘센터’)는 1심 법원에 아쉬움을 전하는 의견서를 내기도 했다.

센터는 “법원이 노동청의 조사 및 판단 결과를 보다 면밀히 검토하고, 피해자의 입장을 반영한 실효성 있는 판결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해당 사건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한 뒤, 이에 대한 징계나 손해배상 등의 양정을 적절히 판단하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전했다.

최정규 변호사 ⓒ주용성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지 아직 6년밖에 안 되다 보니까 판례도 많이 안 쌓여 있고, ‘부당한 대우’라는 게 직접적인 폭행이나 폭언이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직 아쉬운 판단을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 같아요.”

김호세아 씨의 항소심 재판을 대리하는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의 말이다. 법원이 직장 내 괴롭힘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직 모호하다는 지적.

아직 미지근하기만 한 법원의 ‘괴롭힘 감수성’에 비해, 직장인들의 민감도는 높아졌다.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9월 전국 19세 이상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35.9%가 ‘지난 1년 동안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한 적 있다’고 답했다. 3명 중 1명 꼴이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듯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매년 급등하고 있다. 김위상 국회의원(국민의힘, 비례대표)이 지난 2월 고용노동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건수는 1만 2253건. 2019년 법 시행 이후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2020년, 5823건 ▲2021년, 7774건 ▲2022년, 8961건 ▲2023년, 1만 1038건)

하지만 기관의 판단은 이를 따라오지 못한다. 지난해 전체 신고 건 중 고용노동청이 ‘개선지도’, ‘과태료 부과’, ‘검찰 송치 등’ 법 위반으로 판정한 비율은 12.4%에 불과하다. 즉, 신고 8건 중 7건 꼴로 고용노동청 단계에서 ‘괴롭힘’을 인정받지 못한 셈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바늘구멍처럼 좁은 고용노동청의 괴롭힘 인정 과정을 통과하더라도, 법원에서는 또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다. 바로 김호세아 씨처럼.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절반 이상이 ‘침묵’을 택했다 ⓒunsplash

이렇게 좁고도 험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피해자들은 신고 대신 침묵하거나 도망을 치는 길을 택한다.

직장갑질119 조사 결과에 따르면, 피해자 359명 중 ‘참거나 모르는 척했다’고 대답한 비율이 65.7%로 절반을 넘었고, ‘회사를 그만뒀다’는 응답은 27.3%에 달했다. 회사 또는 노동조합에 신고했다는 응답은 6.7%, 고용노동부, 국가인권위, 국민권익위 등 관련기관에 신고했다는 대답은 5.3%에 그쳤다.

“항소심 판결을 통해 이를 바로잡는 건 단지 김호세아 씨를 위한 일만이 아닙니다. 고용노동부의 판단을 신뢰하고 피해회복을 위해 손해배상소송에 나서는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서도 이 소송의 결과는 의미가 있습니다.”(최정규 변호사)

법원의 판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적 메시지가 된다. 노동청은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했지만, 가해자는 아무런 처벌도 피해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것은 곧 많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렇게 해도 괜찮은 일’이라는 메시지를 준다. 소송을 2심으로 끌고 간 김 씨는 “또 다른 피해자들의 피해구제를 위해 앞장서 발을 딛겠다”고 말했다.

한편,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 지목된 A는 “김 씨가 업무시간에 노조활동을 하거나 채용공고를 보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고 주장하며, “매주 진행하던 팀장회의에서 고개도 들지 못할 만큼 곤란했다”고 반박했다. 오히려 “(본인이) 팀원을 감싸고 있다 보니 김 씨가 하는 실수에 대한 지적은 특히 신경을 썼다”고 말했다.

그는 ’50분간 이어진 질책’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A는 “김 씨가 평소 무슨 설명을 해도 한번에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아 예시를 들어 설명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