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함박눈이라니 최악이다. 18일 아침. 명동역 10번 출구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하나둘 우산을 펼쳤다. 패딩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계단 끝에 다다랐다. 길가에 함박눈을 온몸으로 맞는 사람들이 서 있다. 그들 손에 우산 대신 피켓이 들려 있다. 출근하기 위해 길 위에 나선 사람들이다.

저희도 그냥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어요. 피켓 들고 있으면 사람들 출퇴근하는 게 부러웠고, 점심에는 커피 들고 다니면서 떠드는 그런 일상생활이 부러웠어요.”(김란희 민주노총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조합원)

이들은 4년 전 세종호텔에서 해고당한 뒤, 다시 출근길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함박눈 날리는 이른 아침 세종호텔 해고노동자 복직 투쟁 선전전이 진행됐다 ⓒ셜록

평일 오전 8시 서울 중구 세종호텔 앞은 외국인 관광객과 출근하는 직장인들로 붐볐다. 일상적인 풍경 속 눈에 띄는 이들이 있다. 2021년 12월 세종호텔에서 정리해고 당한 조합원들, 그리고 연대하는 사람들이다.

‘해고 4년, 복직을 거부하는 세종호텔’

양손에는 피켓을 쥐고 출근하는 이들을 마주 본다. 사람들은 눈길을 헤치며 지나가기 바쁘다. 곁눈질로 살펴보며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조금 먼 발치에서 함께하는 이가 있다. 10m 높이의 구조물 위에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고진수 민주노총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지부장이다.

차가 지나다니는 도로 위 고 지부장의 작은 ‘집’이 있다 ⓒ셜록

한 시간가량 선전전을 마치면 마이크를 통해 고진수 지부장에게 안부를 전한다. 고 지부장은 구조물 끝에서 수신호를 보낸다. 양 팔로 가위표를 만들기도 하고,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어 보이기도 했다. 얼굴에 미소도 잃지 않았다.

“사실 다른 후보들도 있었어요. 남산예장공원도 있었는데 호텔에서 너무 멀었고, 지부장님은 세종호텔 난간에서 농성하고 싶어 하셨어요. 거기가 1순위라고. 그런데 동지들이 그건 너무 위험하다고 해서….”(함민희 노동사회과학연구소 사무국장)

그는 발 아래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위를 택했다. 차가 끊이지 않은 도로에서 매연을 마시느라 피부도 거칠어졌다. 마스크를 올려줬지만 맨얼굴을 고집했다. 비록 폭 1m도 안 되는 좁은 철탑 위에 있지만, 숨은 편하게 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고공에서의 아침도 벌써 34일째(18일 기준)다.

난간에서 손을 흔드는 고진수 지부장 ⓒ셜록

그는 지난달 13일 새벽 5시, 지하차도 진입 차단 시설물에 올랐다. 고공농성을 택한 건 이유가 있다. 오랜 싸움의 끝을 보겠다는 결심이었다. 해고자 6명의 3년간 복직 투쟁. 그리고 회사의 노조 탄압에 끝장을 볼 심산이었다.

세종호텔은 2021년 코로나19에 따른 경영 악화를 이유로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이때 32명이 희망퇴직했고, 이를 거부한 12명은 해고됐다. 다만 특이점이 있었다. 해고 노동자 모두 ‘민주노조’ 조합원이었다는 것. 이때 25년차 일식 요리사였던 고진수 지부장을 포함해 29년차 호텔 노동자 김란희, 28년차 호텔리어 허지희 씨 등이 일자리를 잃었다.

18일 출근길 선전전에 나선 사람들 ⓒ셜록

노조는 세종호텔이 대량해고할 만큼 경영 사정이 나쁘지 않았고, 사측이 해고 회피를 위해 노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부당해고 및 부당노동행위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을 법원에 제기했다.

하지만 법원을 통해 일터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 좁았다. 대법원은 2024년 12월, 해고가 정당하다는 1·2심 판결을 유지했다. 법원은 호텔이 영업 손실을 입고도 해고 회피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신발 속 거슬리는 모래알을 넘어 위협적인 송곳이 되겠습니다.”(2025년 2월 13일 새벽에 작성한 고진수 지부장 결의문)

고 지부장은 해고 이전에도 세종호텔의 노조 탄압에 맞서 싸워왔다. 그는 결의문에서 “회사는 복수노조법을 활용해 교섭권을 앗아가고 부당전보와 각종 괴롭힘으로 노조의 힘을 약화시켰다”며, “임금은 개악되고 정규직은 점점 줄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투쟁을 복직으로 귀결”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자본가들이 정리해고를 쉽게 하지 못하도록 싸우고 싶다”며, 고공에 올랐다.

김란희 씨는 일주일에 단 하루를 제외하고 늘 농성장을 지킨다 ⓒ셜록

“기자님, 이제 식사 올리러 갈까요?”

김란희 씨는 고 지부장의 아침과 저녁 식사를 챙긴다. 점심은 먹지 않는다. 활동 반경이 좁으니 식사량을 줄였다. 김 씨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 맞은편 9번 출구로 나갔다. 그 앞에 경찰 세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가방에 든 물건을 확인했다. 위험한 물건이 있을지 모르니 확인한다는 취지였다. 김란희 씨는 익숙한 듯 안에 든 것들을 설명했다.

“날이 추워서 따뜻한 물이랑 충전기랑 식사랑….”

인도에서 차도로 발을 내딛어 다섯 걸음. 경찰들이 차량을 통제하는 동안 김 씨가 움직였다. 그동안 고진수 지부장은 밧줄을 내렸다. 끝에 걸린 비닐 쇼핑백이 바닥에 내려오자 김 씨는 짐을 옮겨 담았다.

김란희 씨가 고진수 지부장의 아침식사와 짐 등을 올린다 ⓒ셜록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줄’. 낯선 모습이 아니다. 기자는 이 풍경을 지난해 12월 경북 구미시 한국옵티칼하이테크공장에서도 본 적 있다. 그곳에 436일째(18일 기준) 고공농성 중인 해고 노동자 두 명이 있다.

박정혜 씨와 소현숙 씨는 지난해 1월부터 공장 옥상에서 살고 있다. ‘비공식’ 세계 최장기 고공농성이다.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2022년 10월 공장에 불이 나자 화재보험금 1300억 원을 받고도 법인을 청산하기로 했다. 이때 구미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193명을 희망퇴직시키고, 이를 거부한 17명을 정리해고 했다. 이들 중 2명이 불 탄 공장을 지키고 있다. 경기 평택시에 위치한 공장으로 고용승계를 요구하면서.

불 탄 공장 옆으로 소현숙(왼쪽), 박정혜(오른쪽) 씨가 서 있다 ⓒ셜록

해고 노동자들의 고용승계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한 이들도 있다. 경남 양산시 호포역에서 약 160㎞ 떨어진 경북 구미시 한국옵티칼하이테크공장까지 걸어간 사람들. 바로 ‘희망 뚜벅이’다. 

“저 위에 있으면 아프다는 말도 잘 못 하게 돼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걱정하니까.”(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김 지도위원은 과거 309일간 고공농성을 이어갔던 ‘선배’로 마음이 무거웠다. 고공에서의 삶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알기에 하루빨리 두 사람을 만나 안아주고 싶었다. 열흘간의 여정 끝에 상봉이었다. 네 사람은 눈물을 쏟았다.(관련기사 : <“정치로 도배된 언론… 누가 저 이름들 불러줄까”>)

지난해 12월 열흘간 걸었던 희망뚜벅이들 ⓒ셜록

이후 ‘희망 뚜벅이’들은 구미에서 국회와 광화문까지 23일을 또 한 번 걸었다. 그때 고진수 지부장은 철골 구조 위에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기자도 명동 고공 농성장을 지키는 사람들과 둘러앉아 죽을 나눠 먹었다 ⓒ셜록

명동 고공 농성장 아래에는 검은 천막이 마련돼 있다. 봄눈이 천막 위로 내려앉아 벽에는 물이 흥건했다. 농성장을 지키는 연대 단체 회원들과 ‘말벌 동지’들은 그 아래에서 아침을 때웠다. 첫 끼는 흰 죽, 그리고 컵라면에 언 몸을 녹였다. 천막을 보수해야겠다며 담소도 나눴다.

세 명 남짓 누울 수 있는 은박 돗자리. 그 위에 무릎을 접고 앉으니 그제야 바지 밑단이 축축하게 젖었다는 걸 알았다. 양말에도 물기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양말이 젖어 맨발로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함박눈은 피했어도 몸에 한기가 느껴졌다.

고 지부장이 난간 위에 만든 눈사람 사진 ⓒ셜록

이날 농성장을 지킨 진아(활동명) 씨는 고진수 지부장을 “평범한 사람”이자 “투쟁 선배”라고 말했다. 평범한 노동자가 고공으로 올라간 건 사익 때문이 아니다. 또 다른 노동자들의 부당해고를 막기 위해, 또 다른 노동자가 투쟁의 전선에 오르지 않고 ‘평범하게’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저도 사실 사회에 관심이 별로 없던 사람이에요. 회사랑 집 오가면서 세종호텔에서 29년 동안 일만 했거든요. 어쩌다 보니까 복직 투쟁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다른 투쟁에도) 연대하게 되고, 거기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사회 문제들이 보이더라고요.”(김란희 조합원)

4년째 복직 투쟁을 함께하고 있는 김란희 씨도 지난날을 떠올렸다. 이 길이 좋아서 ‘투사’로 나선 사람은 없다.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빌딩숲 사이에 우뚝 솟은 철탑. 저 꼭대기에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지회장이 있다. ⓒ셜록

식사를 마치자 농성장을 지키던 이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세종호텔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고공농성에 나선 또 다른 노동자가 있다.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지회장이다.

그는 지난 15일 오전 4시부터 서울 중구 한화 본사 앞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김 지회장은 30m 높이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철탑에 올랐다.

사정은 비슷하다. 하청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것이다. 2016년 조선업 불황을 이유로 상여금 550%가 모두 깎이고, 2023년에야 50%로 일부 회복됐다. 노조는 ‘상여금 정상화’를 요구했지만, 여전히 이전 상여금(550%)의 9% 수준에 불과하다.

철탑 꼭대기 비닐 안에 김형수 지회장이 있다 ⓒ셜록

노조는 지난해 11월부터 거제도 옥포조선소에서 천막농성에 나섰다. 김형수 지회장과 강인석 부지회장은 단식농성도 벌였다. 하지만 원청인 한화오션은 양보안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결국 김 지회장은 철탑 꼭대기 고공으로 올랐다.

고공농성 현장 바로 옆, 발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들이 있었다. 함박눈이 쏟아져 한 치 앞을 보기도 힘든 길. 그 위에 얇은 비닐 하나로 무장하고 출근길을 고대하는 사람들. 매일 딛는 그 길이 누군가에게는 오래도록 밟고 싶은 그 땅이다.

김연정 기자 openj@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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