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체격도 훨씬 좋고 힘도 센 가상의 존재가 내 목을 계속 졸라요. 어떤 날은 뒤에서 막 쫓아오고요.”
잡히지 않으려고 죽어라 뛰어도, 한 걸음씩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악몽인 걸 알면서도 완전히 제압돼 움직이질 못했다. 숨이 턱 막히는 상태에서 죽을힘을 다해 ‘일어나야 돼, 일어나야 돼’ 되뇌며 버둥거리다가 겨우 깨어나는 일이 반복됐다. 그렇게 새벽에 깨면 다시 잠드는 게 겁났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로 며칠을 보내다가 ‘안 되겠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휩싸였을 때, 먼저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던 후배가 “이거 먹으면 잠은 잘 와요”라며 알약을 하나 건네줬다. 신경증, 우울증, 불면증 약으로 유명한 데파스정이었다. 그날 밤, 그 약을 먹고 잠을 자니 악몽을 꾸지 않았다.
며칠 뒤, 유성기업 노동자 육영수(55)도 정신과를 찾았다. 2014년 5월이었다. 꿈속에서 육영수의 뒤를 쫓고 그의 목을 조르던 ‘힘센 존재’는, 몇 년 전 그의 현실에도 실제로 있었다.

자동차 부품업체 유성기업 노사는 2009년 임금·단체협상에서, ‘주간연속 2교대제’와 월급제를 2011년부터 시행하기 위해 준비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1997년쯤 유성기업에서 야간근무를 마치고 회사 퇴근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노동자가 버스 안에서 잠든 채 숨을 거둔 일이 있었다. 2000년대 초에도 20대 노동자가 집에서 자다가 심비대증으로 숨을 거뒀다.
주간연속 2교대제는 야간노동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제도였다. 한 주는 주간, 그다음 한 주는 야간으로 10시간씩 일하면서, 역류성식도염, 과민성대장염 같은 병을 달고 살거나 ‘돌연사’의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들에겐 주간연속 2교대제 도입이 간절했다.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유성지회)가 2011년 “밤에는 잠 좀 자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2009년 노사 합의를 바탕으로 주간연속 2교대제를 도입하라는 요구. 노조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2시간 부분파업을 진행했다. 그날이 바로 2011년 5월 18일.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끔찍한 상처로 각인된 날짜다.
회사는 바로 그날 저녁 8시부로 직장폐쇄 공고문을 붙였다. 용역경비와 회사 관리자들을 동원해 공장 안에 있던 노동자들을 끌어내고, 출근하던 야간조의 출입도 막았다. 많은 노동자들이 다쳤다.
이제는 출근이 곧 투쟁이 됐다. 노동자들은 날마다 공장에 들어가기 위한 ‘출근투쟁’을 했다. 그때마다 잔혹한 폭력이 돌아왔다.
육영수의 악몽처럼, 믿을 수 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소화기가 날아다니고, 쇠파이프와 죽창이 노동자들을 겨눴다. 여기저기 비명이 울리고 피가 흘렀다. 두개골이 함몰되거나 광대뼈가 조각난 사람도 있었다. 용역업체 직원이 몰던 차량이 노동자들을 덮쳐 10여 명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용역경비들은 사냥개를 앞세워 노동자들을 뒤쫓기도 했다.


경찰이 출동했다. 노동자들을 폭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아니다. 그들의 손에 끌려간 쪽도 노동자들이었다. 경찰병력 2500명이 투입돼, 노조원 500여 명 전원을 연행한 적도 있다.
직장폐쇄 며칠 전 노조 집행부가 된 육영수에게도 그 기억들이 오늘처럼 선명하다.
“회사 전체를 철조망으로 둘러치고, 우리가 현장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용역들이 뺑 둘러싸는 거죠. 굉장히 위협적이에요.
그리고 정권도 할 수 있는 모든 걸 투여했잖아요. 헬기를 띄워 ‘삐라’ 뿌리면서 ‘너희는 불법파업을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가 너희 때문에 멈춰서 손해가 얼마다’ 하면서요. 또 조선일보 같은 언론은 전경들 쪽에서 사진을 찍어서 노조가 과도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도하고….”
유성기업 뒤에는 ‘노조파괴 시나리오’로 악명 높은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 있었다. 노조는 그해 6월 14일 일괄 복귀 의사를 밝혔지만, 회사는 두 달이 넘도록 직장폐쇄를 유지했다.
그러고선 2011년 7월 복수노조 제도 시행에 맞춰 ‘제2노조’인 유성기업노조 설립을 주도했다. 제2노조가 노동청에 제출한 설립신고서, 노조 규약 등을 사측이 작성한 것으로 나중에 드러났다. 또, 관리자들은 직원들을 유성기업노조에 가입하도록 종용해, 제2노조를 교섭대표노조로 만들었다.
유성기업 뒤에는 원청인 현대·기아자동차도 있었다. 직장폐쇄 당일 현대차 임원의 자가용에서 발견된 문건에는 “(유성기업의) 현대·기아차 시행 전 ‘선(先)시행’ 노사합의 방지”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현대차가 유성기업에 구체적인 노조 탈퇴 목표치까지 제시하는 ‘유성동향 일일보고’ 이메일이 공개되기도 했다.
유성기업 유시영 회장은 2017년 2월 부당노동행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법정구속되고, 2020년 5월 배임·횡령죄로 다시 1년 4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창조컨설팅은 그에 앞선 2012년 “유성기업 등에 대해 노조활동에 지배ㆍ개입하도록 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지도ㆍ상담”하는 등 공인노무사법을 위반한 것이 확인돼 고용노동부로부터 설립인가가 취소됐다.
하지만 법의 심판보다 노동자들의 병듦이 더 빨랐다. 2011년 이후 수년 동안 쏟아진 공세는 노동자들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싸움이 어려운 게 그거더라고요. 힘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정부, 언론 모두 (우리를) 불법으로 매도하니까, 아무리 우리가 목소리를 내도 ‘니네들이 잘못했어’가 되더라고요.
그렇게 심리가 확 눌린 상황에서 ‘우리 싸움은 정당하다’고 알려내는 게 굉장히 힘든 거죠. 마치 모래밭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찾는 것처럼…. 어디를 가든 ‘쟤네들이 불법행위를 했대’, ‘오죽했으면 사측이, 오죽했으면 공권력이 그랬겠어’ 그런 시선과 말투가 제일 견디기 힘들었죠.”
육영수의 말에, 김성민 전 유성영동지회장은 “(사측에 대한 법적 처벌 이후) 우리가 옳다는 걸 확인했다고 해서 현장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라며 씁쓸해했다.
2017년 11월 충남노동인권센터 노동자심리치유사업단 두리공감(현재 치유와 연대의 공동체 두리공감)이 발표한 ‘유성기업 정신건강 실태조사 분석 보고서’에서는, 유성기업 사태를 ‘노사관계’의 문제가 아니라고 밝혔다.
“사용자의 지위를 가진 자들이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하여 정치적 목적의 관철을 위해 조직화된 폭력을 자행한 범죄의 현장이다. (…) 따라서 노동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은 폭력과 범죄로 인한 결과다.”

2011년 8월 직장폐쇄는 종료됐지만 탄압은 멈추지 않았다. 현장으로 돌아온 유성지회 노동자들은 해고 27명을 비롯해 대부분 정직, 출근정지 등 중징계를 받았다. 해고취소 판결로 복직했다가 다시 해고된 이도 11명이나 됐다.
육영수도 18개월 동안 해고자 생활을 했다. 복직 후 다시 정직도 당했다. 그가 해고되자 살림만 돌보던 그의 아내가 간호조무사로 병원에 취직해 막막한 가계를 꾸려나갔다. 하나뿐인 아이는, 해고 당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여덟 살이었다.
“아내가 잘 참는 성격이에요. 주변에 다 해고된 사람들이고, 다른 조합원들도 급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상황이었으니까요. 가족대책위 활동도 하면서 아내가 잘 버텼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렇게 몇 년을 보내면 희망이 안 보이잖아요. 제가 분노가 좀 쌓였을 거예요. 아내나 아이한테 엄청 화를 냈겠죠. 아마 식구들도 똑같이 굉장히 어둡고, 억눌려 있고, 상처를 많이 입었을 거예요.”
결혼하면서 그가 스스로 마음먹은 다짐이 있다. ‘부부싸움은 하지 말자.’ 자라면서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많이 봐서, 자신은 결혼하면 절대 아내와 싸우지 말자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자신과의 약속은 직장폐쇄 이후 깨졌다. 화를 내고서는 내가 왜 이럴까 자책하고, 다시 또 자기도 몰래 목소리를 키우곤 했다. 한 집에 있어도 세 식구가 각자 핸드폰만 쳐다보는 날이 늘어났다.
사측은 징계에 머물지 않았다. 수백 건의 마구잡이식 고소·고발도 진행했다. 한 번은 우습고, 세 차례 이상 고소·고발을 당한 노동자도 20명이 넘었다. 대부분 불기소 처분되거나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판결이 나오기까지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현장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공장 곳곳에 CCTV가 새로 설치됐다. 관리자들은 휴대용 카메라와 녹음기 등을 들고 다니면서 노동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해 징계에 활용했다. 화장실에 조금 오래 가 있거나 식사시간을 조금만 넘겨도 분까지 계산해서 월급에서 제했다. ‘몰래 카메라’가 발견되기도 했다.
월급은 반토막이 났다. 풀 뽑기, 페인트칠, 배수로 청소 같은 업무로 배정돼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숨 막히는 상황을 투쟁을 하면서 버텼다. 천막농성, 굴다리 고공농성, 높이 22m 고속도로 광고철탑 고공농성, 오체투지, 삭발, 단식 등 할 수 있는 투쟁이란 투쟁은 다 해봤다.
“본사 앞에 기습적으로 비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어요. 날마다 경찰들하고, 회사 경비들하고 싸우고 그랬죠. 서울 강남 한복판인데 밤에 자동차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려요. 바닥도 기울어져 있어서 자는 것도 힘들었고요.
행색이 어떻겠어요? 거의 노숙하는 사람이에요. 꼬질꼬질한 몸으로 강남역, 본사에 가서 피케팅 하고, 국회도 가고요. 그렇게 6개월을 보냈죠. 피폐해진 상태로 현장에 들어왔는데, 회사에서 또 정직 3개월을 때리는 거예요.”

징계와 재징계가 되풀이되면서 육영수는 “멘털이 나가고 몸 속 배터리가 다 빠진 느낌”이 들었다.
“2011년 직장폐쇄 이후 그렇게 싸웠는데 진척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뭔가 벽에 딱 가로막혀서 일보도 전진을 못하는 그런 상황 같고, 진짜 무력해지더라고요.”
꼼짝도 하기 싫었다.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그 즈음 악몽이 시작됐다.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하고선, 악몽이 시작되면 깨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 하는 날들이 흘러갔다.
☞ 다음 이야기 <“광호가, 광호가 죽었대” 그날의 시간에 갇힌 사람들>로 이어집니다.
신정임 르포작가 jjung911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