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밤에는 잠 좀 자자”는 외침으로 시작된 노동자들의 투쟁. 회사는 ‘노조파괴 시나리오’에 따라 직장폐쇄와 폭력, 해고와 갈라치기로 맞섰다. 결국 회사 대표는 감옥에 갔다. 하지만 회복될 수 없는 상처가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남았다. 악몽의 밤이 길어졌다.
유성기업 노동자 육영수(55)는 스스로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자괴감도 몰려왔다.
“멘털이 무너지더라고요. ‘아, 내가 이런 상태가 됐네. 지금까지 싸워왔는데 이제 뭘 해야 돼? 할 수 있는 게 없네. (정신과) 치료받는 거밖에 없어….’”
적응장애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증상이 악화된다면서 노조 활동과 멀어질 것을 권했다.
‘나는 노동조합 활동을 함으로써 존재해왔는데, 이걸 하지 말라고?’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다고 의사 말을 안 들을 자신도 없었다.
‘다시 노조 활동을 하면 옛날처럼 우울증이 심해질 텐데, 할 수 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갈등상황이 그를 또 힘들게 만들었다.

육영수가 정신과 치료를 받던 2014년 전후로, 동료 노동자 4명도 정신질병 산재를 승인받았다.
▲2014년 3월 아산공장 신○○, 우울병 및 적응장애 산재 승인. 자살 시도.
▲2014년 11월 영동공장 김○○, 혼합형 불안 및 우울병 장애 산재 승인. 해고 후 18개월 만에 복직. 다시 정직 3개월 징계.
▲2015년 1월 아산공장 김○○, 중증의 우울증 및 적응장애 진단.
▲2015년 7월 아산공장 조○○, 우울병 장애 산재 승인. 용역경비의 차량 돌진 사고 피해자.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용기를 내서 정신과를 찾아가고, 정신질병 진단을 받고, 또 산재를 신청하고, 그래서 승인까지 받은 사람이 4명이었을 뿐.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은 몹시도 위태로운 상태였다. 차에 자살 도구를 가지고 다니거나, 정신을 차려보니 아파트 베란다나 옥상 위에 있었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두리공감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했다. 주요우울장애 고위험군이 매년 40%가 넘었다. 보건복지부가 조사한 주요우울장애 평생 유병율 6.7%의 6배가 넘는 수치였다.
사회심리스트레스 조사 결과도 매년 40%를 넘다가, 2015년에는 무려 64.5%까지 이르렀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로 강력한 스트레스 상태에 있는 사람이 열 명 중 여섯 명 이상이라는 뜻.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역시 고위험군이 매년 50%를 넘나들었다.
결국 비극의 날이 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2016년 3월 17일 유성기업 영동공장 노동자 한광호(당시 42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1건의 고소·고발과 두 차례의 징계. 회사는 한광호에게 세 번째 징계를 예고했다. 숨진 그의 곁엔 회사에서 보낸 징계위원회 출석요구서가 놓여 있었다.

정신건강 실태조사에서 한광호는 우울증이 의심돼 상담치료를 권유받기도 했다. 당시 유성영동지회장이던 김성민의 말이다.
“내 마음도 불안불안하니까 옆을 잘 못 보는 거죠. 우리가 그런 실수를 많이 했어요…. 광호가 그렇게 된 뒤, 한 달에 서너 번씩 파업을 했죠.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등 외부로도 엄청 (투쟁을) 나갔는데, 조합원들을 밖으로 끌고 나가는 게 부담스러웠어요. 심리상태도 안 좋은데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아서요.”
김성민은 한광호와 함께한 어느 술자리를 떠올렸다. 한광호가 말했다.
“형, 제가 노동조합에 짐이 돼서 정말 죄송해요.”
“뭔 소리 하는 거야! 너 해고돼도 우리 해고자들이랑 같이 싸우자. 그러면 돼.”
그게 마지막이었다. 3일 뒤 한광호는 동료들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라는 문자메시지만 남기고 삶을 마감했다.

“올 것이 왔구나… 나도 그런 생각 했었는데…”
한광호의 부고를 들은 한 노동자가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 불안한 상상이 현실이 되자, 노동자들의 마음은 더 깊게 곪아갔다. 두리공감이 2017년 11월 발표한 ‘유성기업 정신건강 실태조사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주요우울장애 고위험군은 2015년 43.3%보다 10%p 이상 늘어났다.
사회심리스트레스 고위험군은 2017년 무려 86.2%에 달했다. 24.3%가 ‘최근 1년 안에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7.8%는 자살을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2%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했음도 확인됐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2011년 직장폐쇄 이후 보낸 일상은 결코 일상적이지 않았다. 48.3%는 지인의 자살을 경험했고, 28.9%는 채권추심으로 인한 괴롭힘을 당했다. 중대 질병이 발생한 경우도 25.4%에 달했다. 배우자나 연인, 부모나 자녀, 친구들과의 관계도 대부분 악화됐다.
회사와의 갈등이 몇 년째 계속되면서 외상 경험을 반복해서 겪을 수밖에 없었다. 현장 통제도 강화되면서, 오랫동안 쌓아온 노동자들 간의 유대감이나 질서 등이 파괴됐다.
한광호의 죽음 이후로도, 한광호를 포함해 유성지회 노동자 5명이 정신질병 산재를 승인받았다. 2014년 이후 정신질병 산재 승인 건수는 모두 9건.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의 정신질병 산재 승인이 부당하다면서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패소해도 회사는 계속 2심, 3심으로 재판을 끌고갔고, 2018년 연말에야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오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산재요양을 하면서도 마음의 평안을 얻기 쉽지 않았다.
육영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신질병 산재를 2014년에 신청했지만 2016년에야 승인이 났다. 회사가 제기한 소송 탓에 2018년 12월 대법원 판결을 받기까지 4년간이나 마음을 졸여야 했다.
그는 약에 의존하려는 자신이 걱정됐다. 약을 먹으면 잠을 잘 수 있고 분노나 우울감이 줄어드니, 의사에게 더 센 약을 처방해달라곤 했다. 그렇게 센 약을 먹자, 약에 취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 됐다. 그래서 약을 줄이면 우울감이 다시 올라오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약을 대신할 방법을 찾던 그는 ‘불교대학’도 다니고 ‘흙건축학교’도 다녔다. 명상과 대화로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흙을 만지고 땀을 흘리며 ‘편안함’을 찾았다. 정신과 진단을 받은 지 약 3년이 지난 2017년 즈음부터는 약을 점점 줄여, 나중에는 약을 거의 먹지 않게 됐다. 그렇게 현장으로 돌아왔다.

2020년 12월 31일 노사 간 단체협약이 타결됐다. 2011년에 시작했으니, 만 10년 만이다. 이제 문제가 해결됐을까? 2022년 실시한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사회심리스트레스가 여전히 60%대에 머물러 있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수치 역시 큰 변화가 없었다.
두리공감 장경희 활동가는 고무줄에 빗대 설명했다. 고무줄을 늘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팽팽하게 당겼다 놓으면, 다시 줄어들긴 하지만 원래 길이와 똑같이 돌아가진 않는다. 탄력을 잃고, 처음보다는 조금 느슨하게 늘어진 상태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마음속에서도, 10년 세월 동안 받은 고통과 상처들이 끊임없이 되새김질 됐다. 이른바 복합외상. 장기간 반복적으로 겪은 외상은 한번에 치유될 수 없는 거였다.
육영수는 2024년부터 다시 노동조합 대의원을 맡고 있다.
“(노조) 간부를 하면 다시 (정신적으로) 힘들어지지 않을까 걱정도 했어요. 그런데 우리 중에 온전한 사람이 누가 있겠나 싶더라고요. (정신과) 치료를 안 받더라도 혼자 감내하거나 생채기가 적을 뿐이지, 다들 생채기는 있다…. 그걸 알면서 주어진 역할을 방기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심리상담은 계속 받고 있다. 2020년 회사와의 협상 타결 때, ‘심리치유 지원’도 합의안에 넣은 결과다.
두리공감의 장경희 활동가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파업을 시작한) 2011년 5월 18일에 시간이 멈춘 채 오늘을 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일을 묻자 육영수가 대답했다.
“정년까지 6년 남았어요. 그 안에 주간연속 2교대제를 쟁취해서, 나와 우리 조합원들이 적어도 심야노동은 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싶습니다.”
15년 전 외쳤던 구호가 여전히 ‘바람’인 채로 남아 있는 동안,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가슴을 쥐어뜯는 마음의 파괴를 견뎌내야 했다.

‘치유와 연대의 공동체, 두리공감’은 2011년부터 노동자들의 마음건강을 돌보는 활동을 해왔다. 그 시작은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두리공감의 허윤제, 장경희 활동가를 만났다.
– 유성기업 노동자 정신건강 실태조사를 매년 해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허윤제(이하 허) : “계속 투쟁 중이었으니까, 투쟁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마음건강이 더 악화되고 있지는 않은지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장경희(이하 정) : “약간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상담도 하고 치유 프로그램들도 진행했으니 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요. 그런데 오히려 고위험군 비율이 올라갔던 거죠. 외상성 심리 문제들은 ‘안전한 환경’이 구축되지 않는 한 회복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이분들에게 안전한 환경이란 탄압이 중단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죠.”
– 처음에 치유프로그램을 할 때 노동자들이 잘 참여했나요?
허 : “처음엔 ‘우리가 정신병자인 줄 아느냐’고 화내던 노동자들이, 3년쯤 지나니까 ‘난 괜찮은데 쟤는 (마음이) 아픈 것 같아’ 이렇게 바뀌더라고요. 동료의 위험을 감지해낼 정도로 감수성이 커졌다는 거죠. 그건 큰 성과였어요.”
– 현재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상태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장 : “과거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내가 죽든지 저들이 죽든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코너에 몰려 있었다고 봐요. 이런 복합외상이 10여 년 이어지면, 사람의 성격도 변합니다. 10년 전의 나와 현재의 내가 다른 사람이 돼 있다고 할 수 있죠.
상처들이 현재 회복되거나 치유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계기로 건드려지면 과거의 안 좋았던 때로 되돌아갈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태이지 않나 해요.”

– 노동자 심리치유 활동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요.
허 : “초기만 해도 노동자 정신건강이 악화됐다고 하면, 회사가 내놓는 답변이 ‘힘들면 퇴사하셔야죠’ 수준이었어요. 그렇게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이 얕았는데, 그래도 지금은 일터의 환경이 노동자들의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회적인 인식이 조금은 생겼죠.
중대재해 트라우마 등에 대한 노동부 매뉴얼이 나온 것도 우리 활동이 영향을 미친 것 같아 보람차고요.”
장 : “예전에, 연배가 좀 있는 노동자 한 분이 저희보고 ‘필요 없는 사업을 뭐 하러 하냐’고 그러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분이 저한테 ‘너네가 하는 일이 우리를 살릴 줄 몰랐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우리가 몇 년 동안 해온 일이 의미 있는 일이었다는 얘기를 ‘시크하게’ 하더라고요. 그 얘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 앞으로 두리공감은 어떤 역할을 하는 공간이 되길 원하시나요?
장 : “처음에 시작할 땐 두리공감의 역할을 ‘후방’으로 상정했어요.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간이 ‘전선’이라고 한다면, 전선에서 다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회복해서 다시 전선으로 나아가게 하는 곳으로서 후방이요.
그런데 몇 년 지나면서부터는 ‘우리가 꼭 후방에만 존재해야 할까’라는 의구심이 들었어요. ‘두리공감이 전방의 바리게이트는 될 수 없는가.’ 노동자 정신건강과 관련한 사회적 편견, 법과 제도에 맞서 싸우는, 하나의 바리게이트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역할을 하고 싶고요.” <끝>
취재 신정임 르포작가 jjung9110@naver.com
사진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