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동 피부과에서 젊은 남자와 말을 섞으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얼굴에 주름이나 기미가 없는데도 그는 피부 관리비로 2000만 원을 썼다.
‘코인 좀 한다더니, 부자인 건 확실한가부네.’
약 40년 사업 의류사업으로 재산을 일군 지리산 갑부 장덕순(61년생, 가명)은 낚이고 말았다. 이수민(40대 초반, 가명)은 강남 테헤란로에서 숱하게 열리는 ‘코인 다단계’ 투자 설명회장을 기웃거리는 남자였다.
일정한 직업이 없어 고정수입도 없지만, 입으론 “탈중앙 금융 비즈니스” 같은 말을 술술 읊는 사람. 아주 드물게 목돈을 쥐었다 해도, 다시 다단계 투자와 허세로 돈을 탕진하는 이들. 테헤란로에선 이수민 같은 사람을 ‘다단계 죽돌이’라 부른다.
장덕순은 이수민이 소개한 코인 다단계 플랫폼 ‘다이비스’에 2억 원을 투자했다가 모두 잃었다. 돈 잃은 사람은 원금 회복을 바란다. 손쉽게 손해를 만회한다면 금상첨화인데, 이런 성급함이 피해자를 다시 코인 다단계 사기판으로 이끈다. 이수민이 장덕순에게 툭 던졌다.
“사장님, 다이비스에서 잃은 돈, PTD(프로트레이덱스)에서 회복하시죠? 이쪽으로 코인을 보내면 하루 1% 이자를 복리로 줍니다.”

이수민은 PTD를 ‘디파이 플랫폼’이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은행이 현금을 예치받아 대출 등의 사업을 하듯이, PTD라는 업체가 코인을 예치받아 사업을 벌여 수익을 나눠준다는 뜻이다.
장덕순은 하루 1% 이자 수익을 준다는 PTD에 2023년 5월 발을 담갔다. 이수민은 “PTD는 국제적인 재단이 운영한다”고 설명했는데, 이걸 한국에 가져온 건 연변 출신 중국동포 김지영(가명)이다.
그녀는 코인 다단계 판에서 ‘제니 킴’으로 불렸다. 사람들은 제니 킴을 PTD 한국대표라고 불렀다. 장덕순은 2023년 4월 말, 서울 강남구 선릉빌딩 6층에서 제니 킴을 만났다.
“PTD는 암호화폐 분산 파생상품에 초점을 맞춘 원스톱 금융서비스 플랫폼입니다. 누구나 100달러 이상이면 가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많이 가입시키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스페셜 파이브(S5)’ 등급을 달성하면 현금 1억 원을 드리겠습니다. 저도 10억 정도 투자했으니, 이수민 씨 도움을 받아서 함께 부자가 돼보시죠!”
본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장덕순은 제니 킴에게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제니 킴을 딱 한 번 만난 직후인 5월 1일 오전 9시, 장덕순과 이수민은 카카오톡으로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이 : “제니 대표는 어떤 거 같아요?”
장 : “냉철하면서도 사업 해서 결과 나오면 통 크게 쓸 줄도 알 거 같아요. (…) 일단 말이 통하잖아요. 전 직접화법을 좋아해요. (…) 전 사업을 해봐서 지질한 것은 신경도 안 써요.”
이 : “맞습니다. 아무리 본질이 좋아도 사람이 위에서 경영과 리더 역할을 못하면 배가 산으로 가기도 하고 변수에 직면했을 때 헤쳐나가질 못해 곤란에 처하죠.”
장 : “그렇죠. 리더감이 되어야 아래 라인을 끌고 가는 거에요. (제니 대표는) 자기 색깔이 분명해서 제대로 할 거 같고 (…) 우리가 ‘스페셜 파이브’ 가면 현금 1억 원 준다잖아요. 받아내야죠.”
이수민은 PTD가 매달 여러 나라에서 국제회의를 연다고 장덕순에게 알렸다. 4월엔 마카오에서 열렸고, 5월은 베트남 호치민, 6월은 한국 코엑스, 7월은 두바이에서 열린다고 했다. 장덕순은 PTD 플랫폼과 제니 킴을 더욱 신뢰하게 됐다.


실제로 제니 킴은 5월 베트남에서 열린 ‘PTD 국제회의’에 참여했다. 한국 투자자 일부도 초청을 받아 베트남 호치민으로 날아갔다. 여러 국적의 외국인들도 참석했다. 이 국제회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은 다시 PTD 홍보물과 사업설명회 자료집에 실렸다. 제니 킴은 이걸 카카오톡, 텔레그램에 뿌리며 투자자 모집에 활용했다.
‘PTD 글로벌 블록체인 금융파생상품 플랫폼’이란 제목의 자료집에는 PTD 운영진이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다. 총 23명의 운영진은 국적, 인종, 성별, 연령이 다양하다. PTD는 실체가 분명한 국제조직일까?
“제니가 무슨 국제회의를 합니까? (웃음) 그거 일종의 쇼예요, 쇼! 베트남 행사 좀 도와달라고 해서 제가 따라갔는데, 나보고 이사진 행세를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행사장에서 이사처럼 앞좌석에 앉아 있었어요. (웃음) 자료집? 그거 다 포토샵으로 만든 거지! 난 솔직히 그걸 믿는 사람들이 더 웃겨!”
제니 킴의 20년 지인 김준호(60대, 가명) 씨는 폭소를 터뜨렸다. 국제회의라고 소개된 행사에서 ‘알바’는 김준호 씨 혼자가 아니었다.
“사진에 나오는 외국인들, 거의 모두가 알바예요! 일당 얼마 쥐여주면 그런 행사에서 시키는 대로 대표, 개발자, 이사처럼 연기하는 사람들 많아요! 내가 중국에서부터 따지면 다단계 경력이 20년이에요! 말이 좋아 국제회의지, 그냥 투자자 몇 명 관광시켜준 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행사장에 온 외국인 중엔 물론 투자자들도 있긴 합니다.”
그의 말대로, 자료집은 한눈에 봐도 내용이 조잡하다. 그럼에도 여기에 속아 큰돈을 투자하는 사람이 많다. 피해자는 대부분 60~70대 중노년층이다.

장덕순은 제니 킴과 이수민에게 속아 5월 4일부터 비트코인 19.3개, 이더리움 164.9개, 도지코인 22만 개 등을 PTD 플랫폼에 보냈다. 2023년 5월 당시 기준, 약 13억 원에 이르는 금액이다. 코인을 보내는 작업은 제니 킴의 비서 ‘재키 리’가 대부분 담당했다. 재키의 한국 이름은 ‘복희’다.
제니 킴의 말대로, 다음 날인 5월 5일부터 이자가 1%씩 쌓이기 시작했다. 장덕순은 제니 킴을 더욱 신뢰했다. 이 와중에도 이수민은 장덕순을 상대로 불법 카지노 다단계 ‘비스타7’ 투자자 모임을 소개했다.
행사는 그해 5월 11일 시그니엘서울 호텔 연회장에서 열렸다. 드레스코드는 ‘세미정장 이상 레드포인트’였다. 최대한 화려하고 그럴 듯한 행사는 여는 것, 다단계 사기의 주요 특징 중 하나다.
제니 킴은 이 행사에 참여하진 않았다. 비서 재키 리와 전국을 돌며 PTD 투자를 홍보했다. 직접 발로 뛴 덕분인지, 장덕순처럼 PTD에 수억 원을 투자한 사람이 경남 창원에서 두 명이나 나왔다.
100달러부터 투자가 가능했으니, 전국의 소액 투자자들이 PTD에 얼마를 예치했는지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다. 장덕순 등 고액 투자자 금액만 합쳐도 50억 원이 훌쩍 넘는다.
PTD 시스템은 정확히 5월 23일부터 먹통이 됐다. 장덕순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자신의 투자금과 이자를 인출할 수 없었다. 제니 킴은, 다이비스가 먹통이 됐을 때 이수민이 했던 말을 똑같이 했다.
“지금 시스템 복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며칠만 기다려주세요.”
4월엔 다이비스에서 2억 원, 5월엔 PTD로 13억 원…. 두 달 연속 큰돈을 잃고서야 장덕순은 다단계 꾼들에게 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훌륭한 리더, 통 큰 CEO로 칭송받던 제니 킴은 장덕순의 연락을 받지 않고 피하기 시작했다.(관련기사 : <연변 제니 킴 vs. 지리산 갑부… 피눈물의 코인전쟁>)
이수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또 다른 다단계 플랫폼을 장덕순에게 소개했다. 이번 플랫폼의 이름은 ‘○○○ X’였다. 물론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다.
또 여기에 투자해서 그동안 손해 본 약 15억 원을 회복하라는 뜻이었을까? 장덕순은 “젊은 놈 이수민”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에게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누구 죽어나가는 꼴 볼 거예요?”
얼마 뒤 장덕순은 다시 한번 뒷골 당기는 사진 하나를 봤다. 한때 자기가 우러러봤던 제니 킴이 이번엔 ○○○ X 플랫폼을 홍보하고 있었다. 이 지독한 사기의 반복, 무한 복제되는 코인 다단계 시스템. 도대체 제니 킴의 실체는 뭘까?

중국에서 제니 킴과 동업을 했다는 김준호 씨는 이렇게 말했다.
“제니요? 그 양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중국에서 화장품 다단계 하던 사람이었어요. 왕년에 제가 중국에서 제니랑 일을 해봐서 잘 알아요. 2000년대 초반에 한국에 귀화를 했는데, 그 이후에도 중국을 오가며 다단계 사업을 한 겁니다.”
그의 말은 이렇게 이어졌다.
“제니는 그냥 중국 쪽 브로커한테서 PTD 플랫폼을 받아서 한국에 퍼트린 거예요. 원래 다단계라는 게, 줄줄이 이어지는 점조직이잖아요. 말이 좋아 대표지, 제니는 그냥 작은 점 하나일 뿐이에요. 거기에 투자한 장덕순, 이수민도 마찬가지고.”

김준호 씨는 또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다면 다이비스, PTD, ○○○ X 같은 코인 다단계 플랫폼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중국 쪽 브로커 애들한테 5000만 원만 주면 누구든지 코인 다단계 플랫폼을 살 수 있어요. 사업설명서야 구글 그런 데서 긁어오면 뚝딱 만들 수 있고.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요? 제가 지금 다단계 플랫폼 하나 만들고 있어요. (웃음) 다단계는 맨 위 꼭짓점에 있는 사람은 돈을 챙길 수 있는데, 제가 그걸 좀 먹어볼까 해서요.”
김준호 씨 역시 강남 테헤란로에 숱하게 많은 ‘다단계 죽돌이’다. 코인 다단계 꾼들에게 속아 플랫폼에 쌓인 뭉칫돈이 누구에게 어떻게 흘러갔는지 파악하는 건 무척 어렵다. 외국의 범죄단체로 흘러 갔을 수도 있다.
제니 킴은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 그는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김 씨에 따르면, 제니 킴은 서울 구로구의 방 하나짜리 다세대 주택에서 50대 남편과 살고 있다. 남편은 일용직 건설노동자라고 한다.
‘재키 리’라 불린 비서실장 이복희는, 제니 킴의 동네 동생이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제니 킴의 사무실에서 청소 알바를 했는데, 사람들이 비서실장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수민은 여전히 테헤란로 일대를 배회하고 있다. 셜록은 지난 18일 선릉역 5번 출구 인근의 한 빌딩에서 그를 만났다. 이수민은 ‘기능성 체형보정 속옷’ 등을 판매하는 다단계 설명회를 듣고 있었다. 그는 “이번 다단계는 미래가 아주 유망하다”고 나한테도 참여를 제안했다.(관련기사 : <우리 아버님들 테헤란로 왜 오셨습니까? “돈 벌러요!”>)
노년층이 은퇴자금을 갖다 바치며 “우리 리더님”이라고 부르는 다단계꾼들의 이들의 실체가 이렇다. 장덕순은 제니 킴, 재키 리, 이수민을 사기 혐의로 수서경찰서에 고소했다. 1년 여가 지났지만, 수사는 별 진척이 없다.
박상규 기자 comune@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