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12일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 게시판에 이런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법치주의는 죽었다”
현직 판사인 A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무죄 판결을 작심하고 비판한 글이었다. 그의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것이 지록위마가 아니면 무엇인가? 담당 재판부는 ‘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 법치주의 수호는 판사에게 주어진 헌법상의 책무이다!!!”
A 판사는 법원 내부 징계를 받았다. ‘정직 2월’. 판사가 받을 수 있는 징계(정직, 감봉, 견책) 중 가장 수위가 높은 중징계였다. 징계의 이유는 ‘법관 품위 손상 및 법원 위신 실추’.
강남 오피스텔에서 성매매를 한 판사(감봉 3월)보다, 지하철에서 여성의 몸을 불법 촬영한 판사(감봉 4월)보다, 음주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친 판사(감봉 2월)보다 징계 수위가 셌다.
법원 내부 게시판에 판결 비판 글을 올린 판사는 중징계를 받았다. 성매매, 불법촬영, 음주 뺑소니 등 ‘추잡한’ 짓을 한 판사들도, 비록 솜방망이일지언정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법원이 징계에 두 손 놓고 있는 무리가 있다. 바로 ‘먹튀판사’다.

길게는 1년 가까이 미국으로 해외연수를 갔다 와놓고, 결과보고서조차 제출하지 않은 판사들. 국민의 세금을 ‘먹튀’한 판사들은 아무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해외연수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판사들을 추적했다.
셜록의 취재로 밝혀진 ‘먹튀판사’는 6명. 강○○, 김○○, 연○○, 이○○, 권○○, 이★★. 이들은 최근 5년 사이 국비로 해외연수를 다녀와 기한(3개월) 내에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법원 내규에 명백히 명시된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것.(‘법관 및 법원공무원의 해외연수 등에 관한 내규’ 제15조 2항)
이들 판사 6명이 각자 약 9개월 이상 미국에 머물면서 쓴 해외연수 경비 총액은 1억 4457만 원이다.(관련기사 : <보고서도 안 쓰고 공짜유학… ‘먹튀판사’ 6명 찾았다>)
이들 중 현재는 판사 옷을 벗고 변호사로 살고 있는 강○○ 전 판사는, 변호사 사무실 홈페이지 내 프로필에 ‘결과보고서도 제출하지 않은’ 해외연수 이력이 버젓이 자랑하고 있다.
이○○ 판사는 이른바 ‘연양갱 도둑’ 판결의 재판부 중 한 명이다. 군인이 군부대 내 연양갱 도둑 용의자를 의심하지 않고 보내줬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은 사건. 이○○ 판사가 속한 재판부는 징계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정작 본인은 해외연수 결과보고서를 내지 않고도 아무 징계도 받지 않았으면서.

같은 법원 지붕 아래에서 일하는 법원공무원도 판사들과 똑같이 국비로 해외연수를 다녀올 수 있다. 2020년 이후 국비 해외연수 대상자로 선발된 판사와 법원공무원에게 지원된 세금은 연평균 약 51억 원. 올해 기준, 한 사람당 평균 4759만 원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숙제’ 제출에 있어서는 결과 차이가 컸다. 최근 5년간 국비로 해외연수를 다녀와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법원공무원은 ‘0명’. 단 한 명도 없다. 세금으로 공짜유학을 다녀온 ‘먹튀판사’가 6명이나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같은 기간, 같은 내규에 근거해, 똑같이 세금으로 해외연수를 다녀왔지만, 판사와 법원공무원이 결과물 제출 ‘의무’를 대하는 태도는 엄연히 달랐다.

법원은 해외연수 결과보고서 미제출을 이유로 판사를 징계한 적이 없다. 법원의 ‘선택적 관대함’을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또 있다.
2022년 7월 법원공무원 B 씨는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 자유게시판에 이런 제목의 글을 올렸다.
“판사 ○○○, 파면을 촉구합니다.”
판사를 비판하는 글을 쓴 B 씨는 ‘정직 2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사유는 ‘품위유지’ 의무 위반. B 씨는 징계처분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은 정직 2월의 징계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판결문에는 이런 문장이 남았다.
“(모든 공무원은)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여기서 ‘품위’는 공직의 체면, 위신, 신용을 유지하고, 주권자인 국민의 수임을 받은 국민 전체의 봉사자로서의 직책을 다함에 손색이 없는 몸가짐을 뜻하는 것으로서,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국민의 수임자로서의 직책을 맡아 수행해 나가기에 손색이 없는 인품을 말한다.”

판사도 공무원이다. 법원 내규를 어기고 해외연수 결과보고서를 안 낸 판사들은 공무원의 ‘품위’를 지켰다고 볼 수 있을까. 세금 수천만 원을 쓰고 의무를 다하지 않았는데도.
판사를 비판한 ‘내부자들’에겐 중징계를 내리면서, 혈세 수천만 원을 낭비한 ‘먹튀판사’들의 잘못엔 두 눈을 꼬옥 감는 법원. 그들이 생각하는 ‘품위’란 무엇인가. 혹시 일반 공무원은 꼭 지켜야 하지만, 판사는 적당히 안 지켜도 되는 그 무엇쯤으로 여기는 건 아닌가.
해외연수 결과보고서 제출은 법원 내규로 정한 의무다. 법관이 자신들이 정한 규칙마저 지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국민에게 ‘법의 심판’을 운운하고 ‘법치주의’를 말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A 판사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쓴 문장을 읽어본다.
“법치주의 수호는 판사에게 주어진 헌법상의 책무이다.”
김보경 기자 573dofvm@sherlock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