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여러 소리 헐 거 읎어! 잔말 말고 다 밥 먹구 가. 이?”

벌써 30분째다. 가겠다는 사람들과 붙잡는 노인. 하늘로 땅으로 눈길을 피하는 사람들에게 노인이 짐짓 언성을 높인다.

노인의 이름은 임홍빈(80).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당진시유족회장이다. 감자 심으러 가야 한다는 유족회 자문위원도, 이웃한 아산과 멀리 진주에서 온 시민사회 활동가들도 결국 붙들렸다. 얼결에 쭈뼛쭈뼛 따라나선 나까지.

임 회장은 아나고조림이 기막히다는 삽교천 ‘영란네’에 다섯 명을 둘러 앉혔다. 복분자주를 한 잔씩 따라주는 그의 표정이 그제야 좀 누그러진다. 사람들도 싫지만은 않은 듯 바쁘게 숟가락을 든다. 4월 11일, 당진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발굴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현장 ⓒ셜록

75년 만에 이름 없는 무덤이 열렸다.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대전전파관리소 당진사무소 앞. 한국전쟁 당시 부역혐의 학살이 일어난 이곳에서 4월 3일 유해발굴 조사가 시작됐다.

유해발굴 현장에서 불과 4~5㎞ 떨어진 강문리가 임홍빈 회장의 고향이다. 1945년생 해방둥이인 그가 다섯 살이던 1950년 10월 초. 아버지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아버지 기억은 읎지, 아무것도. 아버지 가시던 뒷모습만 이렇게 어렴풋이 떠오르고….”

1950년 7월 초 남쪽으로 후퇴했던 군인과 경찰은, 10월 초 당진 지역을 수복했다. 그와 동시에 인민군 점령기 동안 부역한 혐의가 있거나 좌익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경찰과 군인, 그리고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한 지역 치안대가 앞장섰다.

수사나 재판도 필요 없었다. 의심만으로 연행과 구금, 그리고 살해까지 가능했다. 때로는 실제 부역혐의와는 아무 관련 없는 사적 감정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기도 했다.

임홍빈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당진시유족회장 ⓒ셜록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부역혐의로 학살당한 희생자 수를 당진 지역에서만 750여 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당시 우강면 창고에 구금됐다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주민 ‘한창수’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우강면 주민들이 창고에 많이 구금되었는데 죽이려고 분류된 사람들은 낮에도 조사를 하였고 저녁에 불러내어 밥을 먹인 후 89명을 우강면 전파송신대로 끌고 가서 집단살해하였다.”(이하 진실화해위원회 <충남지역(1)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사건 조사보고서>)

우강면 주민 89명뿐 아니라, 가까운 합덕면 주민 300여 명 중 일부도 ‘전파송신대’ 인근에서 살해당했다. 희생자 대부분은 20~40대 남성들이었다. 임홍빈의 이웃에서도 여러 집이 한날한시에 가장을 잃었다. 그런데 아무도 시신을 수습하러 가지도 못했다.

아무도 시신 수습하러 갈 생각도 못했어. 무서워서. 거기가 산이 없고 다 들판이여. 지서 경찰들이 딱 앉아 있으면 누가 (시신을 찾으러) 가는지 다 보여. 그러니까 못 가는 거지.”

당시 우강지서 순경의 진술도 비슷하다.

“유족들이 이후 지서 경찰에게 시신이라도 수습할 수 있게 희생지를 알려달라고 하였는데 본인은 말단이라 윗사람에게 말하라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살벌하였다.”

유족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자리에 봉분을 조성하고 술과 음식을 놓고 차례를 지냈다. 이름 없는 무덤이 만들어졌다. 지금 유해발굴 조사가 이뤄지는 바로 그곳이다.

유족들이 몰래 만든 이름 없는 무덤. 그곳에서 유해발굴 조사가 시작됐다. ⓒ셜록

임홍빈은 아버지가 왜,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 채 유년기를 보냈다. “말 못하게 하니까, 다들 쉬쉬하니까”.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할머니도, 스물일곱에 과댁(寡宅)이 된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1999년 돌아가실 때까지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슬픔도 죄가 되던 시절. ‘빨갱이’란 죄는 호명과 함께 탄생하는 죄였다. 누군가 빨갱이라 부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죄인이 되고, 없던 죄도 만들어진다. 아버지의 죽음이 가족들에게 남긴 ‘교훈’이었다. 빨갱이 가족이란 죄를 피하기 위해 가족들은 강요된 침묵을 선택했다.

우강면 부역혐의 학살이 일어난 곳은 주로 현재의 ‘전파관리소’ 인근이었다. 1990년대 전파관리소 관사를 지을 때 땅속에서 유골들이 발견됐다. 그때는 임 회장이 건설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운명의 장난일까. 당시 관사 건설을 맡은 업체가 바로 임 회장의 회사였다.

뒤로 보이는 관사를 건설할 때도 땅속에서 유골이 발견됐다. 당시 관사 건설을 맡은 회사가 바로 임홍빈 유족회장의 회사였다. ⓒ셜록

75년 만에 열린 무덤은 수많은 ‘증거’들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젊은 아버지를 쏜 총탄에서 떨어진 탄피가 나왔다. 동네에 소문난 효자를 찌른 창날이 나왔다. 부지런한 농부가 신고 있던 고무신이 나왔다. 똑똑하다고 칭찬받던 학생의 옷에 달려 있던 단추가 나왔다.

그리고 인물 좋은 아들의 얼굴이었던 두개골이 나왔다. 씩씩한 장정의 튼튼한 다리였던 허벅지 뼈가 나왔다. 말 잘하기로 유명한 청년의 입 속에서 하얗게 빛나던 치아가 나왔다.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굴된 물건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탄피, 창날, 단추, 미상의 원형 물체, 고무신, 신발 ⓒ셜록/유족회 제공
죽은 자들이 스스로 말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 ‘학살’이 있었음을. ⓒ셜록

지난 11일을 기준으로 추정하기를, 20여 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대부분의 뼈는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어지럽게 뒤섞이고 겹쳐 있다. 유족들은 학살이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돼, 사람을 묻은 곳에 또 묻고, 또 묻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난 (유해발굴 현장에) 매일같이 오지. 요새 꿈자리가 아주 사나워. 생전 보이지 않던 사람들도 눈에 보이고. 그래서 괴로울 때가 많아. 밤잠을 설쳐. 술을 한잔 먹어야 잠이 드는데, 꼭 밤중에 다시 깨. 이거(유해발굴) 시작하고 나서 밤잠을 제대로 잔 적이 읎어.”

눈으로 보지 않으면 괴로움이 덜할까. 그래도 임 회장은 매일 현장으로 가 조사를 지켜본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를 못 봤으니께, 보고 싶어서 그러시나(유해발굴 현장에 오라고 하시나) 싶기도 하고….”

유해발굴 현장을 지켜보는 임홍빈 당진유족회장 ⓒ셜록

다시 4월 11일. 임 회장과 사람들의 ‘실랑이’가 벌어진 그날 이야기다. 유해발굴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그늘 아래에 두 노인이 앉아 조사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허리가 굽었다. 그를 모시고(?) 온 듯한 다른 한 사람은 그보다는 조금 젊었다. 두 노인은 한동안 조용히 앉아 있다가, 임 회장에게 다가가 잠깐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

임 회장이 그날 실랑이까지 하면서 사람들을 식당으로 데려간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식당에 앉은 임 회장이 윗옷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 아까 말없이 앉아 있던 허리 굽은 노인이 그의 주머니에 찔러넣고 간 돈이었다. 노인 역시 그곳에서 아버지를 잃은 유족이었다.

“아 글씨 그 양반이 슥 오더니 이걸 주고 갔는데, 내가 이걸 혼자 먹으면 쓰겄어? 내 돈이 더 들더라도, 이 돈은 다 같이 밥 한 끼 먹는 데 보태 써야지.”

탄피.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하는 증거다. 그리고 아직 땅에 묻혀 있는 ‘구멍 난’ 두개골들이 보인다. ⓒ셜록
유골과 그 위에 겹쳐진 고무신들. 그리고 고무신과 다른 종류의 또 하나의 신발. ⓒ셜록

나흘 뒤인 4월 15일 오후. 이번엔 정장 재킷을 단정하게 입은 장년의 남자가 혼자 유해발굴 현장을 찾아왔다. 손에는 당진 면천면의 명주라는 ‘두견주’ 한 병을 들고서. 서글서글한 인상에 비해 몸가짐은 유독 꼿꼿했다. 정중하지만 머뭇거리지 않는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제가 술 한 잔 올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혹시 이곳에서 돌아가신 분의 손자인가 되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특별한’ 손님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같은 지역에 대를 이어 살고 있는 후대의 시민으로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의 명복이라도 빌어드리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임 회장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떠나지 않았다. 격식이 더 필요할까. 흙바닥에 종이컵으로 술을 올리고, 남자가 절을 했다. 현장 곳곳에 드러난 유해 쪽으로 찬찬히 눈길을 옮겼다. 임 회장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은 선 채로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유해발굴 현장에 찾아온 ‘특별한’ 손님 ⓒ셜록
흙바닥이지만 정성껏 한 잔을 따르고 절을 올렸다 ⓒ셜록

아쉽다. 이 특별한 만남의 의미를 더 부연하고 싶지만, 남자는 기사에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시장도 안 오고, 국회의원도 안 오고, 진실화해위원장도 와본 적 없는 유해발굴 현장에, 그저 ‘한 사람의 시민’으로 찾아온 사람.

남자가 돌아가고 나서도 임 회장과 나는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차분한 애도의 발걸음과 조용한 위로의 한마디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라는 걸.

임홍빈 유족회장은 그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셜록

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4월 8일 ‘충남 당진 우강면 군경에 의한 희생사건(2)’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했다. 9명의 희생자가 추가로 확인됐다. 그들 사이에 ‘임용순’이란 이름이 있었다. 바로 임 회장의 아버지다.

비록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국가가 비무장 민간인을 사법절차 없이 살해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명백한 전쟁범죄, 국가범죄다. 1950년 10월 아버지를 죽인 가해자는 ‘국가’였다. 75년이 지난 이제야 국가는 ‘임용순’이 국가폭력 희생자임을 인정했다.

“소식 듣자마자 내가, 저기 우리 가족 납골묘가 있어. 아버지 유골은 못 모셨지만 비석만 있는데, 거기 아버지 함자 앞에다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희생자’라고 딱 새겨달라고 신청하고 왔어. 이제 됐지. 명예회복은 했으니까. 그게 제일 중요한 거여.”

지금은 아버지의 사진 한 장 남은 게 없다. 아버지의 이름 세 글자가 새겨진 도장 하나가 유일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탄환은 희생자의 몸으로 날아가고, 땅에 떨어진 탄피들은 흙 속에 남았다. 오른쪽 위로는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무신이 보인다. ⓒ셜록

지난해 12월 ‘내란정국’에 임명된 박선영 진실화해위원장은 비상계엄을 옹호해 논란이 됐다. 윤석열의 내란을 비호하는 이들은 아직도 ‘빨갱이’라는 단어를 너무도 쉽게 입에 올린다.

“지금 무슨 빨갱이가 어딨고, 흰둥이가 어딨냐구! 다 같은 국민이지.”

충남 당진 지역에는 한국전쟁 초기 군·경에 의한 국민보도연맹 학살, 인민군 점령기 좌익에 의한 민간인 학살, 수복 이후 경찰과 치안대에 의한 부역혐의 학살이 연이어 일어났다.

‘색깔’ 때문에 죽임과 죽음이 번갈아 일어난 곳. 하지만 뼈에는 색깔이 없다. 75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뼈에는 빨간 색도 파란 색도 보이지 않았다. 황토 사이로 보이는 건 그저 원한의 빛뿐이었다.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조사는 단순히 뼈를 캐내는 일이 아니다. 은폐된 진실을 구조하고, 희생된 이들의 이름을 소생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질문하는 일이다. 정의나 책임이란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이렇게 묻는 건 어떨까. 지금 국가의 ‘예의’는 어디 있느냐고.

“75년 전 사건이라 하니 좀 멀게 느껴지지만, 어제 있었던 일이라면 얼마나 비참한 참사였겠습니까. 그간 유족들이 증언해온 것들이 사실로 드러나는 현장이잖아요. 유족들 마음의 10분의 1도 따라가진 못하겠지만, 저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예의를 다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4월 15일 유해발굴 현장을 방문한 시민의 말)

최규화 기자 khchoi@sherlock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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